마네킹 공장서 일한 남자, 이렇게 변했다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94] 산업현장 보건관리와 산재실태 다룬 다큐멘터리 <보라>

등록 2011.12.03 11:03수정 2011.12.0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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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모던 타임즈>(1936)를 기억하십니까? 컨베이어 벨트 공장에서 하루 종일 나사못 조이는 일을 하던 찰리(찰리 채플린)에게 세상은 모조리 조여야 하는 대상입니다. 작업대에서 볼트를 조이던 손이 반초만 늦어도 작업공정은 엉망이 되고,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길들여진 손은 작업대를 떠나도 전자동으로 움직입니다. 급기야 여자 엉덩이에 달린 단추마저 조이려던 찰리는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영화는 '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어떻게 노동자의 고혈을 짜내는지를 찰리를 통해 묘사합니다. 노동자들은 양떼처럼 공장에 출근하고 회사는 스크린을 통해 감시합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담배라도 피우려면 벽에 붙은 스크린에서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점심시간도 아까워 작업 도중에 밥 먹을 수 있도록 자동급식기계까지 설치하지만 고장 난 기계는 찰리를 폭행하고 미치게 만들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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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보라> 포스터 ⓒ 시네마달

<모던 타임즈>로부터 75년. 현재 노동자들의 일터는 세월만큼 달라졌을까요? 기계가 모든 것에 군림하고 지배하며 인간성을 소진시키고 생명을 소멸해가는 자본의 반인간성은 사라진 걸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묵직하게 성찰하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안간힘'이라는 헤드카피로 독립영화의 새 지평을 연 다큐멘터리 <보라>입니다.

영화는 인천중앙병원 의사가 작업환경측정 등을 확인하기 위해 어느 회사 사무실을 방문하면서 시작합니다. 보건관리 담당자는 자신은 잘 모른다(?)며 여직원을 동석시키고, 의사와 여직원 사이에 질의응답이 이어집니다. 이윽고 진폐와 소음성난청 판정을 받은 노동자가 2명 있으니 관리를 강화하라고 주문합니다.

이 회사는 용광로에서 녹인 쇳물로 철 구조물을 만드는 주물공장. 카메라는 굉음이 진동하고 불꽃이 튀며 연기가 자욱한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담습니다. 카메라는 다시 의사가 다녀간 사무실 풍경을 비추다 책상 위에 스크랩해 둔 신문기사 '질병 35% 담배가 원인'을 클로즈업합니다.

그리고 자막을 통해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해 소개합니다. 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의 노동자는 해당 사업장의 보건관리 업무를 맡은 산업의학 전문의에게 3개월에 한 번씩 작업환경점검과 직업병 상담 등 보건관리를 받도록 명시되어 있다는 것.

영화는 마네킹 생산 공장 등 산업 현장의 보건관리와 산업재해의 실태를 1년에 걸쳐 기록합니다. 하지만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거나 선동하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그들의 작업환경을 규정짓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과 구조를 철저하고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또한 이 과정을 기록한 다양한 이미지와 챕터들을 파격적인 구성으로 편집해 기존의 다큐멘터리의 틀을 깹니다.


그러나 카메라가 직시하는 곳은 시종일관 한 곳입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일하는 사람들의 작업환경과 그들의 노동조건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그 곳.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그 이면을 관통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실체 말입니다. 다큐멘터리의 힘인 '진실의 눈'은 현상의 이면에 감춰진 본질에 '필'이 꽂혀야만 저력을 발휘하니까요.

3시간 30분에 1명씩 하루 평균 7명 사망하는 '산재공화국'

카메라는 산업보건의학 전문의와 동행하며 노동자들의 다종다양한 일터를 찾습니다. 18년 동안 빡세게 일한 노동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아 동문서답을 하고, 상담 의사의 목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는 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상담을 하고 현장에서 인터뷰도 합니다. 그들 중에는 현직 의사로 <하얀정글>을 연출한 송윤희씨도 보입니다. 이 회사에서는 '건강검진' 받으라는 지시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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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안전보건 전문의들이 공장을 방문해 노동자들을 상대로 근골격계 질환 등에 대해 상담하고 있다. 그러나 질의응답은 어긋나기만 하고 건강관리는커녕 기본적인 상담도 쉽지 않다. ⓒ 시네마달


인터뷰 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일하는 현장을 봐야 검진을 제대로 할 수 있어 찾았다는 의사의 말에 중년 여성 노동자는 "몸으로 1시간만 일해 보면 다 안다"고 응답합니다. 눈에 보이는 작업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업(환경) 간의 간극을 명쾌하게 응축한 이 말은 많은 것을 함의합니다.

"1시간만 일해도 석면이 얼굴을 하얗게 뒤덮는데, 이게 가슴을 조이고 숨이 막혀 4층에 올라가려면 세 번 정도 쉬어야 하거든. 저녁에 잠을 자려고 하면 기침이 나오거나 팔다리를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쑤시고 아파."

한때 마네킹 공장에서 일한 중년 남자와의 인터뷰는 이들의 작업환경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불과 2년 반 동안 일했을 뿐인 몸이 10년이 지나면서 거동조차 어렵게 망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중간 중간 현장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고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담히 보여줍니다.

이제 카메라는 노동자들을 집단 상담하는 장면으로 이동합니다. 쇳가루 분진이 날리는 가운데 조립을 하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용접을 하며, 본드와 시너 같은 유기용재를 사용하면서 노동자들은 폐암에, 백혈병에, 심장질환에, 호흡기질환에, 원인 불명의 두드러기 등에 노출됩니다. 고된 노동과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담배와 술을 달고 살며 '안간힘'을 다해 버텨 보지만,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3시간 30분마다 1명씩, 하루 평균 7명 사망. 연간 사망자 수 2089명. 부상자 8만9459명. 총 재해자 수 9만8645명. 경제적 손실 17조 원. 아프간전 피해규모냐고요? 아닙니다. 지난해 한 해 동안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적용되는 사업장에서 발생한 산재 현황입니다. 전쟁터 못지않은 '보라색' 일터,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산업재해 1위를 달성하고 있는 '산재공화국'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올해 초 고용노동부는 산업재해율이 12년 만에 0.6%대로 떨어졌다면서 선진국 진입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와 일터의 색깔은 보라색이다

다큐멘터리의 영어 제목은 'The Color Of Pain' 즉, 통증의 색입니다. 보라색은 다쳐서 멍이 들었을 때의 파르르한 통증의 이미지입니다. 영화에서 보듯 그 '보라'는 안간힘을 쓰며 혹독한 노동을 버텨내는 노동자들의 육신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정직한 노동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만 돌아오는 건 각종 산업재해와 직업병뿐인 일터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영화는 한국사회의 산업 현장과 그곳에서 삶을 지탱하는 '안간힘'을 보라색으로 규정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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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 가스 등이 최루탄 가스마냥 자욱하게 들어찬 공장에서 작업하는 노동자. 눈에 보이는 사고도 공상으로 처리되지만 장기간 육신을 파고든 질병과 통증은 공상처리 조차되지 않는다. ⓒ 시네마달


그 통증의 색이 어떻게 일터와 노동자들을 보라색으로 물들여왔는지 카메라는 2008년 2월에 있은 한국타이어 역학조사 발표 현장을 통해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심장질환 등으로 모두 13명이 집단 사망한 사건에 대해 역학조사는 이들 사건과 작업환경 사이에는 직무관련성이 없다며 종결짓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발표 도중 귀를 찢는 듯한 마이크 잡음이 어떤 '통곡'소리처럼 빈번히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한국산업안전공단의 이 발표는 노동계와 시민단체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이들 단체들이 공정한 재조사를 촉구한 기저에는 노동부 등이 분기별로 발표해 온 각종 산재통계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실한 산재 원인조사입니다. 그간 1년에 한 번씩 이루어져 오던 조사가 이명박 정부 들어 2년에 한 번씩 조사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업무상 사고 부상자에 대한 조사도 10% 표본조사로 그쳤습니다.

만성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눈치 보지 않고 산재처리를 요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 사업장의 97%를 차지하고 있는 5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재해율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특히 산업안전 점검대상과 보험률 인상 등을 피하기 위한 공상처리는 사업장의 관행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랩니다. 이와 관련 한 보고서는 공식통계보다 12배 이상 많은 산재가 은폐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노동전문가들이 거의 전수 보고되는 사망자 수로 산업재해의 진실에 근접해가는 이유입니다.

"한 달에 한 번도 현장에 들어오지 않던 윗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이 현장에 올 때면 특수 마스크를 쓰는 등 중무장한 채 왔어."

이와 관련해 마네킹 공장에서 일한 남자의 증언은 많은 것을 암시합니다. 일본의 산업안전은 철저하게 준수되고 있다는 것이며, 국내의 사용주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일언반구 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장을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은 별것 아니다

카메라는 후반부 들어 공장 밖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반세기 넘게 농사를 지은 할머니들과 채석장 인부, 투 잡을 하는 초고속 인터넷 서버 관리자 등으로 일터를 확장합니다. 하지만 고된 농사일과 농약에 뼈마디가 휘고 돌가루가 폐에 쌓이며, 24시간 밤샘 노동을 한 뒤 커다란 종이상자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청년 서버 관리자 등 공장 밖의 작업환경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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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이 우거진 숲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사진동호회 회원들. 노동자들은 언제쯤 녹색의 자연에서 고단한 몸을 풀어 놓고 즐겁게 쉴 수 있을까. ⓒ 시네마달


그리고 카메라는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야외로 출사 나가는 장면과 실내 수영장 등을 두루 비춥니다. 생뚱맞아 보이는 이 장면은 두 가지를 뜻합니다. 나무와 숲이 우거진 녹색의 공간에서 즐거운 놀이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그들 역시 이들처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그럴 때 기업의 생산성은 높아지고 국가경쟁력은 강화된다는 것을.

국가경쟁력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양질의 고용은 물론 무엇보다 안전한 작업환경과 노동자의 건강권이 우선 확립되어야 합니다. 영화에서처럼 기본적인 안전보건수칙조차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각종 산재와 사망사고는 노동자와 가족을 붕괴시킬 뿐만 아니라 기업의 생산성과 국가경쟁력을 잠식시키는 주범중의 주범이니까요.

헌데 이명박 정부가 역주행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3월 이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에 직결된 산업안전보건 기능의 지방 이양을 재가했습니다. 그리고 노동부는 관련법률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뒤 오는 12월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업무의 전문성은 물론 인프라조차도 구축되지 못한 채 기업유치에 혈안이 된 지자체에 떠넘기는 것은 노동자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스스로 책임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모던 타임즈>의 찰리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하지만 실업자가 되어 거리를 떠돌다 시위에 참여해 옥살이까지 합니다. 겁 많고 착한 찰리는 그러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소녀와 함께 '모던 타임즈(현대)'를 떠나 새로운 지평선을 향해 씩씩하게 발을 내딛습니다. 그렇다면 온통 시퍼렇게 피멍이 든 일터에서 노동의 새벽이 거듭될수록 산재와 직업병으로 몸뚱이가 허물어져만 가는 <보라>속 노동자들에게도 찰리처럼 희망은 존재할까요? 

안타깝게도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피땀으로 구축해 온 산업안전보건 체계가 백척간두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시장의 규제 완화를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 정도는 서슴없이 팽개치는 이명박 정부에게서 희망의 싹을 발견하기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보다도 어려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산업재해 #직업병 #산업안전보건 #산재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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