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악은 생수처럼 담백... 잡스런 맛 섞이지 않은"

'가야금 명인' 황병기 토크쇼-나의 음악, 나의 인생

등록 2011.12.22 17:29수정 2011.12.2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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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의 수다 그가 연주 대신 말문을 열었다. 쉽고 명확한 언어로 자신의 음악세계와 우리 음악에 관해 설명했다. ⓒ 국립국악원

▲ 황병기의 수다 그가 연주 대신 말문을 열었다. 쉽고 명확한 언어로 자신의 음악세계와 우리 음악에 관해 설명했다. ⓒ 국립국악원

"나의 음악은 생수예요. 무미(無味)의 맛이지요. 맛이 없다는 것은 맛이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고 다른 맛이 섞이지 않았다는 얘기랍니다. 단 맛, 거품 맛으로 찾는 청량음료와 다르지요."

 

이런 맛이 깊은 맛이다. 담백하다고도 한다. 인공향료와 방부제 든 '음료'와 어찌 비교할까. 사람도 한눈에 담백해 보인다. '물처럼 담담(淡淡)하다'는 동양 고전 채근담(菜根譚) 한 대목을 느끼게 하는 이 말을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들려줬다.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이 연주자가 아닌 토크쇼의 '스타'로 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수다'에 가까운 많은 말, 드문 일이다. 72세, 최근 논어(論語)에 심취해 '그 안에서 논다'고 했다. 해주고 싶은 얘기가 많았던 것 같았다. 진정성과 사랑이 묻어났다.

 

국립국악원이 새롭게 시도한 첫 번째 국악강연콘서트, 최근 서울 서초구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렸다. 정확하고 적확한 말을 매력적으로 구사하는 가수 이안씨가 말 상대로 나서서 대가(大家)의 음악과 인생을 잘 끌어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안씨는 국악을 제대로 배운 이였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 같은 분위기, 꽉 찬 객석이 내내 아늑했다.

 

국악 즉 우리 전통음악은 그가 나서기 전까지 대체로 '해석(解釋)의 음악'이었다. 선대로부터 전해진 곡을 잘 풀고 멋진 기교로 연주하는 것이 주류(主流)였다. 그는 가야금 연주자로 자리매김 하자마자 가야금과 거문고를 위한 곡을 썼다. 전통 가곡(歌曲)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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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강연콘서트 국악을 공부한 가수 이안 씨가 대가의 말 상대로 나서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 국립국악원

▲ 황병기 강연콘서트 국악을 공부한 가수 이안 씨가 대가의 말 상대로 나서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 국립국악원

특히 가야금 연주곡인 '침향무(沈香舞)'는 오래지 않아 '새로운 고전'으로, '히트곡'으로 자리 잡았다. 덩달아 '비단길'도 떴다. 우리 음악의 새로운 경지인 '창작 국악의 시대'를 그가 열어젖힌 것이다.

 

정작 그를 '스타덤'에 올린 것은 뜻밖의 사태였다. 그의 연주와 무용가 홍신자의 목소리와 율동으로 1975년 명동극장에서 초연한 '미궁(迷宮)'을 보던 한 여성이 무섭다며 소리를 지르고 공연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야금을 활로 연주하거나 기묘한 목소리가 섞인 실험적인 곡이었다.

 

다소 괴기스럽고 처연(凄然)한 분위기 때문에 젊은 층 사이에는 '이 곡을 3번 들으면 죽는다'는 등의 엉뚱한 괴담이 퍼지기도 했다. 군대에서 담력(膽力) 즉 배짱을 키워준다며 밤에 불을 끄고 이 곡을 들려준다는 일화도 있었다고 그는 소개했다.

 

인간의 마음, 내면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한 이 곡에 얽힌 에피소드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음악엔 서정적인 곡이 많다.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감성이 배인 곡들이다. 연주가이며 국악학자, 작곡가인 그의 팬이 의외로 다양한 까닭이다. 외국에 한국음악의 대표적인 얼굴 중의 하나로 비쳐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

       

"텅 비어 있으면서 충만(充滿)한, 달항아리 같은 그릇에 음악과 인생을 담지요. 대밭을 쓰다듬는 소슬바람 같은,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그립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배인 정서지요."

 

이날 공연에서는 작곡자인 그의 해설로 '밤의 소리' '달하 노피곰' '소엽산방(掃葉山房)' '자시(子時)' 등의 곡을 임은정 이지혜(가야금) 이선희(거문고) 김정승(대금) 서수복 양재춘(장구) 씨 등 국립국악원 연주자들이 연주했다.

  

그는 국악을 창작의 마당으로 불러낸 것처럼, 국악과 다른 장르를 합치는 '크로스오버 음악'으로 탈바꿈시키고자 시도해 왔다. 말하자면 '경계(境界) 허물기'다. 서양음악 재즈 인디밴드 비보이 뮤지컬 등과의 교류도 그렇고, 대중을 위한 '흥행성 공연'에도 나섰다.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장으로 일할 때 이런 파격이 활발했다. 아이디어맨으로도 정평이 있다. 토크쇼 형태의 이날의 특이한 공연도 그의 '발랄한 상상력'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기획자인 국립국악원 신성웅 학예연구사는 귀띔했다.

 

"철저히 '나'를 세운 음악이었기에 여러분들이 좋아해 주시지요. 그러나 음악을 보여드리는 여러 형태는 여러분들을 먼저 고려하는 방식입니다. 특히 세금을 쓰는 자리에 있는 이는 보다 대중적인 시도로 더 많은 이에게 봉사해야 하지요."

 

그의 말이 조용하면서도 힘이 있는 것은 이런 마음의 반영일 터다. 짧고, 쉽고, 명확하다. 마음에 울린다.

 

최근 KBS FM과 국립국악원이 전국 남녀 1023명과 국악 애호가 150명에게 설문한 결과 국악 창작음악 분야의 '좋아하는 음악인' 부문에서 그가 1위로 꼽혔다. 전통분야의 1위는 사물놀이의 김덕수 씨였다. 이날 객석의 열기가 매우 뜨거웠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기록이었다.

 

음악인으로는 특이하게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이화여대 국악과 교수를 지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며 현재 이 단체의 부회장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사회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이글의 필자는 시민사회신문 논설주간이며 경제관련 새 웹미디어 <머니토크쇼>의 대표를 겸하고 있습니다.

2011.12.22 17:29 ⓒ 2011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사회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이글의 필자는 시민사회신문 논설주간이며 경제관련 새 웹미디어 <머니토크쇼>의 대표를 겸하고 있습니다.
#침향무 #비단길 #가야금명인 황병기 #미궁 #거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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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등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생명문화를 공부하고, 대학 등에서 언론과 어문 관련 강의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누기 위해 신문 등에 글을 씁니다.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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