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들어오면 대통령도 그냥 못 나간다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 27]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파괴하는 야만, '고문'의 죄악상

등록 2012.01.02 21:58수정 2012.01.02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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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을 할 때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릎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깔았습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 <고문근절대책공청회 자료집-고문피해의 증언> 중 '민청련 의장  김근태씨 경우'(1987)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으로 근무하던 지난 2006년 11월 하순, 유럽 몇 개국의 과거사 청산 실태 현지조사차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대상국은 나치와 독재정권의 상흔이 남아 있는 네덜란드, 독일, 체코, 폴란드 등 4개국. 8일째 되던 날 밤, 일행은 짙은 밤안개를 뚫고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 현장인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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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과 포로들이 나치에 의해 강제로 수감돼 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감방과 그 둘레로 처진 고압 철책선들 ⓒ 자료사진


이튿날 아침 일행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았는데 평소 우리가 알았던 것과는 달리 이곳 수용소는 두 군데였습니다. 아우슈비츠, 즉 오시비엥침시(市)에 위치한 제1수용소와 이곳에서 3km 가량 떨어진 비르케나우(브졔진카의 독일식 이름)에 있는 제2수용소가 그것입니다. 두 곳 모두 현재 폴란드 당국에 의해 특별시설로 관리, 보존돼 오고 있는데 일반인 관람이 가능했습니다. 그날도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넓은 평지에 조성된 수용소에는 유대인들이 최후를 맞은 독가스실과 시신을 불태운 화장터, 희생자들의 노역장 등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용됐던 수용시설(일종의 감방)에 들어서자 순간적으로 서늘한 냉기가 엄습하던 것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이 고문대 위에 묶여 전기고문을 받으며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다고 하는데 그때의 고통, 그때의 심경이 과연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피의 고문과 보복의 역사

그해 연말 무렵 한 모임에서 지금은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 근황을 주고받다가 근자에 유럽 출장을 다녀온 얘기 끝에 프라하 카를교(橋) 입구에서 만난 '고문박물관'과 아우슈비츠 수용소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랬더니 박 변호사는 마침 두어 달 전에 자신이 고문 관련 책을 펴냈노라며 기회가 되면 그곳엘 한번 가보고싶다고 했습니다(그 뒤 박 시장이 그곳을 다녀왔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다수의 저서를 펴낸 박원순 서울시장은 역사 관련 서적도 여럿 출간했는데, 2006년에 그가 펴낸 <야만시대의 기록>(전3권, 역사비평사 펴냄)은 한국의 고문사(史)를 집대성한 역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일제강점기~노무현 정부까지 한국 근현대의 고문의 역사가 총망라돼 있는데, 관련문서는 물론 피해자들의 증언, 해외사례 등도 다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박 시장의 저서를 참고하여 고문의 죄악사를 간추려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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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2006년에 펴낸 <야만시대의 기록>(전3권). 고문의 역사를 집대성한 것으로, 국내에서 출간된 고문 관련 연구서 가운데 유일하다 ⓒ 정운현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는 1997~2000년 중반까지 3년에 걸쳐 195개 국가를 대상으로 고문 실태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무려 150개국의 국가기관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벌어졌으며, 70여 국가에서는 광범한 정도로 고문이 성행하고 있고, 또 80개 이상의 국가에서는 고문으로 사람이 사망한 사살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고문은 1960년대 미-소 냉전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새천년의 문턱에서도 우리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었음이 사실로 확인된 것입니다.  

동서고금의 역사서를 펼쳐보면 인류의 역사는 피의 고문과 보복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문은 비단 절대군주나 봉건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현대까지도 이어져 왔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의 근현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일제 때는 일경과 그 하수인인 친일경찰들이 독립운동가를 고문하여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꺾고자 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고문 끝에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고, 심산 김창숙 선생은 고문 끝에 앉은뱅이가 돼 평생을 불구로 살았습니다.

"고문이 지옥인 이유는 죽음마저 허용되지 않기 때문"

8·15 해방이 되자 악랄한 일경은 모두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고문이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그 하수인인 '숙달된 조교'들은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의 수족노릇을 하며 민주인사들을 탄압하는 데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경찰관들로부터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2년 전인 1985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결성 혐의로 잡혀간 김근태 전 의원도 바로 그곳에서 물고문, 전기고문을 수차례 당했습니다. 민주인사들 가운데 고문 피해자는 이루 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를 한 황지우 시인은 어느 글에서 사람들이 지옥을 생각해낸 것은 고문 체험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쓴 바 있습니다. 황 시인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주되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식을 주지 않는 것이 고문자의 직업정신이다. 지옥이 지옥인 것은 그곳에는 죽음마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고문의 죄악상은 비단 여기서 그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고문은 피해자의 육체와 정신을 송두리째 파괴해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맙니다.  

"고문의 목적이 오직 자백과 밀고의 강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는 자신을 모멸해야 한다. 가해자들 앞에서 동물처럼 내지르는 비명소리와 고문에 굴복하는 굴욕감으로 인해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 자신을 낙인찍게 만드는 것이다."

프랑스가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억압하고 그 운동가들을 고문하자 1958년 당대의 지성 장 폴 사르트르는 고문을 비판하며 위와 같이 말했습니다. 고문은 피해자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굴욕감과 패배감을 맛보도록 강요합니다. 이를 통해 그간 소중하게 여겨왔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신념과 신뢰, 정체성, 자신감 등을 송두리째 파괴시켜 회복하기 어려운 파멸상태로 빠지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문은 가장 악랄한 형태의 인권침해랄 수 있습니다. 고문 끝에 '항복문서'를 쓰고 풀려난 김근태 전 의원 역시 "치 떨리는 분노와 굴욕감을 느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고문과 가혹행위, 조사가 함께 이뤄졌던 조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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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승줄에 묶인 김근태 전 의원. 김 전 의원은 수사과정에서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해 오랫동안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그간 고문을 자행한 수사기관은 중앙정보부(나중에 안기부, 다시 국정원으로 개칭됨), 보안사, 경찰서 등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분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거나 '신길산업', '부국산업' 등의 거짓 간판을 내건 곳들은 그 비밀스런 이름만큼이나 고문이 성행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하면 이곳 나름의 '의례절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저 수의나 군인작업복으로 갈아 입혀 일단 자신이 일상공간에서 분리돼 별천지로 옮겨 왔음을 인식시킵니다. 그런 연후에 '환영식', 또는 '입방식' 차원에서 무자비한 폭행과 동시에 협박을 가해 고문과 가혹행위를 가하는 데 편리한 상태로 만드는 게 보통입니다.
대체로 조사실에서는 고문과 가혹행위와 조사가 함께 이루어지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순조롭게(?) 조사가 진행되지 않을 경우 제2단계가 기다리고 있는데, 특별 고문실로 불리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곳에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전기고문을 과학적으로 하기 위해 발명했다는 '칠성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앞서 언급한 박종철 군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이곳에는 한 번 들어오면 대통령도 그냥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즉 고문만 하면 무엇이든 자백하게 하고 또 무슨 사건이든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간판상품'이 바로 전기고문이었습니다.

"밤늦게 다른 방(고문실)으로 데려가서 옷을 모두 벗겨 팬티만 입히고 결박된 상태로 얼굴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물을 붓고 "박형규 목사한테 노동자연맹 조직에 대해 보고했다"고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견디다 못해 "박형규 목사한테 보고했다"고 허위자백을 했습니다. 물을 붓고 전기선을 연결해서 전기고문을 하고 발바닥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전국민주노동자연맹사건 신철영씨의 경우)

우리나라 수사기관의 악랄한 고문 관행은 대체 언제,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요? 박 시장은 그의 저서에서 "일제시대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고 썼습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일본 고등계 경찰들의 고문은 전 세계적으로도 악명을 떨쳤는데, 이들 밑에서 하수인 노릇을 하던 한국인 경찰관들이 해방 후 군대와 경찰로 흘러들면서 고문기술과 관행이 전수됐다는 것.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아놓는 '통닭구이', 눈·코·귀·입 등에 고춧가루를 탄 물을 붓는 '고춧가루 붓기', 물고문, 전기고문 등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특히 6·25와 남북대치, 군사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고문기술자들은 빨갱이 색출을 빌미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물고문과 전기고문 끝에 죽음을 맞은 박종철
우리와 비슷한 군사독재를 경험한 남아메리카의 고문피해자 41명을 분석한 '알로디 보고서'에 따르면, 고문에 동원된 수단은 크게 신체적 고문, 심리적 고문으로 나뉩니다. 신체적 고문은 구타, 전기고문, 물고문, 골절, 성적 공갈, 강간, 금식 등, 심리적 고문은 협박, 본인이나 가족 살해위협, 살해 실연, 잠 안 재우기, 성적 굴욕감, 약물 투입, 성고문 등입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흔히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불립니다. 물고문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전적이고 보편적인 고문방법으로 불리는데, 흔히 전기고문과 결합해 그 공포와 효과를 배가시켜 왔습니다. 고문술도 기술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술도 날로 발전한 셈입니다. 

고도의 전기고문은 박정희 정권 초기인 1964년부터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군 보안대, 치안본부 대공분실, 각 경찰서 등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졌습니다. 끔찍한 전기고문의 피해 증언은 첫 머리에 소개한 김근태 전 의원의 폭로가 가장 구체적인데 당시 수사당국은 여성 피해자에게도 전기고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전기고문은 물고문의 연장선상에서 물고문보다 더 심각한 고문방식으로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전기가 주는 충격은 인간에게 구타 등 다른 가혹행위보다도 더 큰 공포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종말을 앞당겼던 박종철군 역시 물고문과 전기고문 끝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위와 같은 물고문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위의 피고인은 전기고문을 하기로 하고 위 조사실 안에 있던 이른 바 '칠성판'이라고 하는 전기고문용 나무침대 위에 박 군을 강제로 올라가게 하여 박 군이 두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없도록 로프로 박 군의 몸을 결박하고 전기가 잘 통하도록 박 군의 몸에 물을 부은 후 미리 준비된 직류의 전기회로를 박 군의 양손 엄지와 검지 사이, 그리고 사타구니에 번갈아 가며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처음에는 전류의 세기를 약하게 하다가 물을 뿌리며 점차 전압을 높게 하는 방법으로 전기고문을 가하여 북 군에게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공포감을 주면서 박종운 군의 소재를 대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박종철열사추모사업회, '손해배상청구소송 소장', 1988)

일반적으로 고문피해를 당한 사람은 그 육체와 영혼,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 많은 상처와 후유증을 갖게 됩니다. 신체에 대한 다양하고도 심각한 공격이 있었고, 고통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장기간 노출되었기 때문에 신체 이상과 변형이 초래된 탓입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고문피해자들이 겪는 만성적 후유증으로 기억력 및 집중력 장애, 수면곤란 및 악몽 경험, 신경증, 불안증, 우울증, 병적 소견없는 갑작스런 땀흘림 등이 있습니다. 게다가 고문피해는 피해자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쳐 다음 세대까지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기기도 합니다. 부모가 구속돼 있는 동안 부모의 부재를 경험하거나 부모가 고문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자식들의 경우 불안, 불면증, 악몽, 자폐증, 학과 수업부진 등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고문은 그 자체로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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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경찰 조사 도중 고문살해당한 박종철 열사 24주기를 맞아 당시 부검을 담당한 검사였던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해 1월 14일 오전 고문이 자행된 서울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옛 대공분실) 5층 9호 조사실을 방문해서, 물고문 도중 욕조에 목이 눌려 사망하는 상황을 기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흔히 사람 목숨이 모질다고도 하지만 반대로 한 순간에 깨지는 것이 사람 목숨이기도 합니다. 마치 단단한 질그릇이 어느 순간 사소한 실수로 박살이 나듯이 인간의 영혼도 한 순간에 박살나기도 합니다. 고문은 절대로 '사소한 충격'이 아닙니다. 어느 날 불시에 닥쳐온 갑작스런 연행과 뒤이어 마주친 낯선 고문자들, 그리고 그들의 험상궂은 인상과 폭언, 협박과 폭행. 구태여 물고문, 전기고문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사람들에겐 이 정도만으로도 큰 충격이 되고도 남습니다. 고문 피해로 인해 영혼이 상처받고 그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은 어찌 보면 '깨진 질그릇'인지도 모릅니다. 그 깨진 조각을 주워 모아 강력본드로 붙인다고 해서 그 상처조차 없앨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은 제12조 2항에서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고문 금지를 명문화 해두고 있습니다. 또 형법 제125조에서는 법관이나 수사관계자가 고문(가혹행위)을 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군사독재 시절 수사기관들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국사범'에 대해 관행처럼 고문을 자행해 왔습니다. 고문은 불법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닌 상황에서 피해자를 비(非)인간 취급하는 것이 바로 고문이기 때문입니다. 시인 고은은 '고문'이라는 시에서 고문을 그렇게 썼습니다.

고문

고문을 당해보면
인간이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고문하는 자도
고문당하는 자도
깊은 밤 지하 2층 그 방에서 

* 민주화운동을 하다 수사기관에 끌려가 당한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64세라는 결코 길지 않은 생을 살다 간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영전에 이 글을 바칩니다.
#김근태 #아우슈비츠 #전기고문 #박종철 #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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