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검사만 스폰서 했겠나? 판사·경찰도 많다"

[인터뷰] 지난 1월 출소한 '스폰서 검사' 폭로한 정용재씨

등록 2012.03.08 16:51수정 2012.03.0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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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스폰서 검사'를 폭로한 정용재씨. ⓒ 구영식

"못 죽어 살고 있다."

그의 얼굴도, 발도 퉁퉁 부어 있었다.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걸음걸이도 힘겨웠다. 그럴 정도로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스스로 "영구장애인"이라고 불렀다. 7일 오후 서울 광화문 한 찻집에서 만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년간 검찰과 싸우면서 그에게 남은 것은 '몰락'밖에 없었다. 한때 매출 수백억 원에 이르던 그의 부(富)는 봄눈 녹듯 사라졌고, 검사들과 호형호제하던 끈도 끊어진 지 오래됐다. 이제는 아들의 취업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검사 스폰서' 정용재씨. 한때 잘 나갔던 건설업자였던 정씨는 지난 2010년 "20여 년간 60여 명의 검사들에게 향응과 접대를 했고 금품을 건넸다"며 '스폰서 검사' 명단을 폭로해 세상을 뒤흔들었다. 이 명단에는 현직 검찰 고위간부들까지 포함돼 있어 파장이 아주 컸다. 폭발성이 큰 사안이라 검찰진상위가 꾸려지고, 그것도 모자라 특검수사까지 받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제가 의도했던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정씨가 '스폰서 검사'의 핵심인물로 지목했던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은 '스폰서 특검'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한승철 전 대검 감찰부장은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고, 면직취소 소송에서도 이겼다. 박 전 지검장은 이후 변호사 사무실을 무사히 개업했고, 한 전 부장은 최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복귀했다.

정씨는 "검찰이 제 식구 감싸기로 일관해 수사는 축소·은폐됐다"며 "검찰에게 불리한 사실들은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검사들과 자주 만났던 장소로 한 횟집을 지목했지만 딱 한 번 방문하고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축소·은폐수사의 사례로 들었다. 그는 2010년 12월 7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4월 20일 < PD수첩 > 방송 이후 국민, 언론들에서 큰 관심을 가져주시고 저를 격려해주셨다. 하지만 진상규명위, 특검 등의 수사는 모든 관련 검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됐다. 은폐, 축소, 개인사찰, 보복수사…."

정씨는 "제가 의도했던 목적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특히 검찰의 '먼지털기식 수사'에 치를 떨었다.

"H건설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 PD수첩 >에 증언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검찰은 방송 직후에 그를 잡으러 왔다고 한다. 게다가 H건설 쪽에 그 친구를 자르라고 압력을 넣어서 직장까지 잃을 뻔했다. 또 A선배의 초등학교 3학년 아들 명의로 개설된 계좌까지 추적했다. 당시 A선배는 검찰 고위 간부와의 술자리에 동석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정씨는 지난 2010년 12월 8일자 일기에서도 "지금 이 시간에도 공소시효가 다 지난 것까지 싹쓸이 먼지털기수사가 계속되고 있다"며 "국민들이 진정 검찰개혁에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고 썼다.

"기회가 되면 '스폰서 판사·경찰'도 폭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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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재씨가 교도소에서 작성한 일기장에는 검찰내부비리문제를 다룬 한 일간지 칼럼이 붙여 있다. ⓒ 구영식


정씨는 '스폰서 검사 명단'에 포함돼 있던 일부 검사들이 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은 것에 "어이가 없어서 유구무언일 뿐"이라고 탄식하면서 "그래서 폭로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월 15일 작성해 기자에게 보낸 육필편지에서 그런 답답한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그렇게들 노력하셨는데 참 어려운 무한한 권력을 가진 집단…. 제가 시도한 것(폭로)이 전혀 순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퇴보된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하고 가슴이 아프고 억울하기 짝이 없다."

이어 정씨는 "검찰에 기소권과 수사권을 동시에 준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들었다"며 "검경수사권 조정을 하기에 시기가 이르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런 무소불위 권력을 경찰과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대통령 책임론'까지 제기했다.

"저와 언론이 검찰개혁의 밥상을 차려줬지만 제대로 안 됐다. 1차적 책임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다. 검찰진상조사위나 특검의 조사가 축소, 은폐, 보복 등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잇달았지만 이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에게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공소시효를 떠나서 철저하게 도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시했다면 조사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특히 정씨는 "제가 검사들만 만나 스폰서 역할을 했겠나?"라며 "판사와 경찰들도 많이 만났지만 그때는 검찰 하나 상대하기도 힘들어서 검사 명단들만 공개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기회가 되면 판사와 경찰들도 폭로할 생각"이라며 '2차 폭로'의 여지를 남겼다.

"나는 '법무부 요시찰 인물'... 24시간 감시했다"
정용재씨는 교도소에서 '요시찰 인물'이었다. 보통 재소자의 등급을 S1∼S4로 나뉘는데 정씨는 'S3'등급이었다고 한다. 중형을 선고받은 사람들과 같은 등급을 받은 것이다.

정씨는 "교도소에서는 감시 카메라로 저를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며 "감방에서 대소변을 보고, 식사를 하고, 자면서 코 고는 것까지 다 체크해서 법무부에 보고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지난 2008년 경찰 승진 로비와 사건무마 명목 등으로 총 7400만 원을 받은 혐의(변호사법 위반)로 구속돼 복역 중이었다. 그런데도 교도소에서 그를 엄격하게 관리한 것은 그가 '스폰서 검사' 명단을 폭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시하는 것 때문에 아주 힘들었다. 기자들이 면회오면 면회가 안 됐다. 면회하는 동안 녹음도 하고, 담당자가 와서 대화내용을 기록했다. 편지도 다 검열했다. 편지를 본 뒤에 검찰을 비판하는 부분 등이 있으면 빼달라고 사정했다. 이런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다."

정씨는 2년간의 감옥생활을 통해 재소자 인권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전국 50여 개 교도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재소자 징벌 방식'이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며 "재소자들이 출소하는 저에게 강력하게 부탁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교도관과 재소자가 다투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선조사수용 후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잘못을 밝히기도 전에 재소자를 징벌방으로 옮기고 수갑과 쇠사슬을 채운다. 당연히 면회와 서신, 신문구독, TV시청, 목욕, 사제품 구매 등이 금지되고 식사도 반으로 줄인다. 식사하거나 화장실에 가는 경우만 제외하고 24시간 묶어놓는다."

다만 정씨는 "힘들고 고통스럽게 감시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일부 교도관들의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며 "그분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정용재씨는 기자에게 "1년간 생활비를 대준 부부, 인터넷 카페를 통해 후원금을 전달해준 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자신의 휴대전화번호(010-2015-0119) 공개를 요청했다.


덧붙이는 글 정용재씨는 기자에게 "1년간 생활비를 대준 부부, 인터넷 카페를 통해 후원금을 전달해준 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자신의 휴대전화번호(010-2015-0119) 공개를 요청했다.
#정용재 #검사 스폰서 사건 #박기준 #한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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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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