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서 뜬 '2천원 컵밥', 이렇게 망가지나

[후속취재] 노점 컵밥 '판매 금지'...편의점엔 대기업 컵밥 등장

등록 2012.04.18 21:11수정 2012.04.1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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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밥을 먹는 노량진 수험생들 노량진 수험생들이 가장 싼 값에 구할 수 있는 식사가 컵밥이다. ⓒ 이규정


"컵밥이요? 이거 돈 없어서 먹는 거예요. 값이 싸잖아요."

서울 노량진에서 2000원짜리 컵밥을 주로 먹던 공무원 준비생 김아무개(28)씨의 말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김씨는 "밥을 식당에서 편하게 먹으면 좋죠. 그런데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이번에는 꼭 시험에 붙어야 하거든요"라며 다시 컵밥을 먹었다. 주문에서 식사를 마치기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각종 학원과 취업준비생이 많은 노량진. 이곳에서 컵밥이 고시식당과 더불어 수험생들의 주요한 끼니로 자리잡은 지 올해로 3년째다. 노량진 컵밥은 1800~3000원으로 서울에서 가장 저렴하고 '푸짐한' 식사 중 하나다.

수험생들이 "돈 없어서 먹던" 컵밥... 사라집니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컵밥은 일회용기(컵)에 밥과 각종 고명(참치, 날치알, 스팸) 등을 얹어주는 길거리 음식이다. 서울 동작구청에 의하면 노량진에서 컵밥을 판매하는 노점상은 총 16곳. 하루 평균 약 2500~3000개 정도의 컵밥이 팔린다. 노량진 수험생이 5만 명(<중앙일보> 추산)이라면 17~20명 중 1명은 하루에 한 번 컵밥을 먹는 셈이다.

주머니가 가벼울 수밖에 없는 수험생들에게 컵밥은 무척 중요한 존재다. 컵밥은 '노량진 특산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컵밥이 거리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역설적이게도, 인기가 많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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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대형 고시식당 뷔페식 고시식당에서 수험생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 이규정


대략적인 과정은 이렇다. 노량진 식당 상인들은 손님을 포장마차 컵밥집에 빼앗긴다고 판단했다. 동작구 중앙요식협회는 '컵밥 판매 금지'를 동작구청에 정식으로 요구했다. 구청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동작구청 건설관리과 가로관리팀 직원들은 4월 12일부터 컵밥집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단속반은 컵밥집 실태를 파악하며 노점상들에게 "컵밥을 팔지 말라"고 구두로 경고했다. 식사류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 2000원 컵밥을 둘러싼 '노량진 전쟁' 아십니까)


그렇다면 노점에서 어묵이나 핫바는 되지만 "컵밥은 판매하지 말라"는 조치는 합당한 것일까? 도로법 38조 1항에 따라 도로를 점유하고 있는 노점상은 현행법상 모두 불법이며 과태료 부과대상이다. 법대로라면 핫바와 컵밥을 '차별'할 근거는 없다. 중앙요식협회에서 민원이 들어왔고 이에 따라 구청은 '식사류'만을 단속대상으로 삼았을 뿐이다. 일종의 '중재안'인 셈이다.

물론 식당 주인들의 하소연도 합당하다. 한 식당주인은 "우린 세금 다 내지만, 길거리 컵밥집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말했다.

결국 민주노점전국연합(민노련) 소속 노점상들은 구청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4월 16일부터 컵밥을 팔지 않고 있다. 몇 곳은 임시로 문을 닫았고, 3곳은 메뉴를 바꿨다. 3곳 중 한 곳은 컵밥 대신 이제 핫바를 판다. 오므라이스 컵밥을 팔던 곳은 이제 라면을 판다. 한 상인은 "컵밥을 팔았을 때보다 매출이 4분의1로 줄었다"고 밝혔다.

노점상 주인 전방욱(54)씨는 "손님들이 주로 고시생인데 밥을 찾지 라면을 먹겠어요?"라며 "우리도 장사 안 되고 학생들도 식비 많이 들게 됐어요"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전씨는 IMF 때 사업 실패로 한동안 방황하다가 7년 전부터 노량진에서 소시지 전문 노점을 시작했다. 그러다 2010년 말부터는 자체 개발한 오므라이스를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핫바로 메뉴를 바꾼 컵밥집도 메뉴를 개발해왔다. 노점상인 김아무개(31)씨는 "(컵밥을 개발하면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죠. 재료와 소스의 비율을 정하는데 나름대로 많이 연구했습니다"라며 그동안 과정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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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대로 풍경 노량진 컵밥집들을 옆에 두고 2~30대 젊은이들이 걸어가고 있다. ⓒ 이규정


핫바로 메뉴를 바꾼 지 한 달째인 현재 매출은 어떨까. 그는 "컵밥 팔던 때와 비교하면 현재의 매출은 60~70%정도 수준"이라고 말했다.

노량진 컵밥 없어지면?... "편의점으로 가겠죠"

그렇다면 컵밥 주요 고객인 수험생들은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장아무개(19)씨는 전남 광양 출신으로 노량진으로 올라온 지 두 달째다.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공무원시험을 준비중이다. 그는 "광양에 있을 때도 컵밥을 알고 있었어요"라며 운을 뗐다. 그는 "컵밥집이 있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학원수업이 늦게 끝나 다음 수업까지 촉박할 때 주로 컵밥을 먹었습니다. 컵밥이 없어지면... 편의점으로 가야죠, 뭐."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며 노량진에 1년가량 있었다는 김아무개(28)씨는 "학원비, 교재비, 고시원비가 매달 100만 원은 들어가니까 밥값을 줄일 수밖에 없어요"라며 '컵밥 판매 금지'를 아쉬워했다.

"공무원시험 준비는, 사실 부모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가능합니다. 최대한 시험에 빨리 붙어야 하는 압박도 있고, 돈도 그만큼 아껴야지요. 저는 한 번 떨어졌는데 죄인처럼 살아요. 돈 없어서 컵밥 먹는 건데... 이제 이것도 못 먹겠네요."

김씨는 씁쓸하게 웃었다.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만 2년째인 오아무개(31)씨는 "노량진 식당 대부분이 카드를 안 받아요. 식당이 얼마나 합법적인지 모르겠네요"라며 "길거리 컵밥이 사라진다고 안 가던 식당을 이용하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쉬움을 더 토로했다.

"식당 주인분들이 학생들이 컵밥 먹는 이유를 좀 생각해줬으면 해요. 싸고 많이 주고 빨리 먹을 수 있잖아요. 게다가 맛도 괜찮고요. 식당이 장사가 안 되는 이유를 잘 생각해보셨으면 해요."

회사원 심아무개(34)씨는 "노량진은 원래 물가가 싸요. 아직 200원짜리 어묵도 있어요. 저는 수험생은 아니지만 퇴근할 때 컵밥집 들러서 하나씩 사 가거든요"라며 "컵밥집이 많으니까 메뉴 고르는 재미가 있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거리에서 사라지는 컵밥, 이제는 대기업이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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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컵밥 출시 올해부터 편의점에서 컵밥을 팔기 시작했다. ⓒ 이규정


노량진 컵밥은 수험생들의 요구에 맞춰서 진화해왔다. 그렇게 3년, 고시생과 노점상들은 노량진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길거리 컵밥은 '판매 금지 품목'이 됐다. 대기업은 빵과 순대만 판매하는 게 아니다. 돈과 조직을 갖춘 대기업은 이제 '컵밥'까지 판매한다. 최근 한 기업은 편의점에서 컵밥을 팔기 시작했다.

어쨌든 수험생들의 든든한 식사가 되어왔던 길거리 컵밥은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고시생들은 계속 밥을 먹어야 한다. 이들은 식사 때가 되면 노량진에서 싼 식당이나 편의점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편의점이 '개발'했다는 컵밥을 사먹을지도 모른다.

민노련 노량진 지역장 양용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식당주인들 심정을 이해합니다. 저희는 구청에 잘 협조해왔고요. 하지만 이렇게 컵밥을 확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서로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이 있었으면 참 좋겠어요."
#노량진 #컵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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