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명이 합창? 박칼린도 이러지 못했다

[인터뷰] 6월 항쟁 기념 합창단 지휘하는 작곡가 류형선씨

등록 2012.05.22 08:55수정 2012.05.2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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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지난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달성된 '제도적 민주주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명박 정권에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지적이 계속되면서 단순히 '대통령 직선제'가 아닌 민주주의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정치수사적 표현으로 모호하게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논의가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6월이 다가온다. 항쟁 이후 5번의 대통령선거를 치렀고 2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대선이 있다. 즉 6월 항쟁 이후 25년 동안 우리는 5번의 민주주의 시험을 봤고 올 연말 그 6번째 시험이 기다리는 것이다. 이번 6월은 지난 시험의 오답들을 정리하고 다가오는 시험을 준비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 의미를 더 깊이 담기 위해 그날의 현장인 서울 광장도 열린다. 다가올 시험의 결정적인 참고서가 될 박원순 시장이 광장을 열고 시민들이 자리를 채운다. 항쟁 기념일인 6월 10일 오후 6시 서울광장에서 610명의 시민합창단이 무대에서 서는 기념공연 '우리 승리하리라'가 바로 그것이다. '6월항쟁 25주년 행사 국민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에서 정은숙 성신여대 음대 석좌교수가 시민합창단 단장을 맡고 작곡가 류형선(48)씨가 지휘를 한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강북구 4·19기념탑 인근 식당에서 류씨를 만나 이번 합창공연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물소리'라는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그는 지난 6월 항쟁 당시 군복무 중이었고 이후 복학한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한 '항쟁세대'에 속한다. 이후 국악 바탕의 음악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고 음반프로듀서와 음악감독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이번 공연을 "단순히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6월이면 누구든 떠올리고 참여할 수 있는 행사로 만들고 싶다"며 "610명이라는 규모만 있는 합창이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무대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는 25일까지 계속되는 합창단원 모집에 참여를 부탁했다. 기존 합창단에서 단체로 참가할 수 있고 개별 참가자들도 가능하다.(관련내용 자세히 보기)

 

"이 시대의 모습에 미안함을 가지고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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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시민의 합창' 모집 포스터 ⓒ 최지용

'610 시민의 합창' 모집 포스터 ⓒ 최지용

류씨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과 담을 쌓아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어떤 특정한 의미가 강조되는 행사에 적극 나선 적은 많지 않았다. 대개는 음악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사회참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스스로도 이번 지휘를 맡은 것을 놓고 자신은 "외딴 섬"이라며 "평소 나 같으면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을 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기독교적이면서 우리 전통과 역사를 향한 감수성으로 채워진 음악들을 하던 그가 이런 행사의 지휘자로 나선 것은 "미안한 마음" 때문이라고 한다. 이명박 정권 이후 벌어진 민주주의 후퇴 상황에 앞선 세대로서 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후배 세대인 청년들과 자녀세대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향한 자책이기도 했다.

 

"지금 시대가 욕망의 대로를 질주하는 시대라고 하지 않나?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어떻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조롱을 받는 시대가 됐는지…. 그런 시대를 내가 멀쩡히 살아가고 있다는, 어떤 빚진 심정이 있었다. 그 빚을 조금이라도 탕감하고 싶은 마음으로 지휘를 하게 되는 거 같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맥락으로 참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거점"으로 6월 항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87년 체제의 극복'이라는 말에도 "'약발'이 다 했다는 뜻"이라며 새로운 전환지점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단순히 지난 과거를 기념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거점으로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약발이 다 했다는 거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87년 체제 극복이라는 표현에 절대 공감한다. 4·19나 6월 항쟁과 같이 시민이 승리하는 보편적 경험이 그때처럼 전민항쟁으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사람과 사람을 묶는 매체가 너무나 다양화됐기 21세기 네트워킹 방식으로 새로운 승리를 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보편적 승리의 경험 이후의 선택이었다. 87년 항쟁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후보 분리 등 여러 요인이 있긴 했지만 다시 한 번 군부독재의 인물이 당선된 것. 그 이후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또 다시 뒤집어졌고 그 후로 민주주의 후퇴가 일어난 다는 점에서 승리의 경험 이후의 선택은 훨씬 중요하다. 류씨도 이 점을 강조했다.

 

그는 "아마 그 선택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마지막 선택이 되지 않을까"라며 "승리의 보편적 경험을 함께 만들어내는 주체로 참여하면서 다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25년 만에 다시 부르는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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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시민의 합창'을 지휘하게 된 작곡가 류형선씨. ⓒ 류형선

'610 시민의 합창'을 지휘하게 된 작곡가 류형선씨. ⓒ 류형선

무엇보다 걱정이 되는 건 610명이나 되는 단원을 통솔하는 일이다. KBS 예능프로 <남자의 자격>에서 합창단 프로젝트가 두 차례 방송되며 합창이 주는 매력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개개인이 내는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고 그러면서 목소리뿐 아니라 마음도 하나로 맞춰가는 게 합창의 매력이다. 프로그램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대게 합창단의 인원은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50~60명가량이다. 어떻게 610명을 지휘할 수 있을까.

 

"정말 방법을 구상 중이다. 상당히 많은 작전을 짜야 한다. 제일 많은 인원을 지휘해본 것도 130명이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나고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연습도 충분히 돼야 하고 두 번 예정된 전체 연습도 절대 빠져서는 안 된다. 물론 어려움이 있겠지만 단순히 610명이 노래한다는 기획된 행사로만 끝난다면 이번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분명히 예술적인 성과를 남길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 예술가적 욕심이 있어보였다. 610명이라는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 웅장함이 상당할 텐데, 그런 시각적 효과에만 기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는 "그냥 대충 한다면 시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6월 항쟁이 가지는 가치를 음악에 담아야 하는데, 그런 기획적인 요인만 남기는 건 예술가의 양심불량"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부를 노래들이 다 6월 항쟁 과정에서 그 주역들의 심장에 박혀 있는 노래다. 25년이 지나 지금 다시 불리는 것인데, 역사의 감수성이 담긴 노래들이다. 이 노래의 가치를 지금 시대의 노래들이 수혈받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음악에는 자극적이고 개별적이고 상업적 소통만 남아 있다. 이 노래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과시해보려고 한다. 또 작곡가로서 이 노래가 어떻게 불려야 사람들의 가슴을 꿰뚫고 갈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그걸 현실로 옮기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이번 행사에서는 <그날이 오면> <우리 승리하리라> <철망 앞에서> <동지를 위하여> 등 항쟁 당시 불렸던 노래들이 다시 불려진다. 그는 "이 노래들이 앞으로도 불려야 한다, 지금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과거에 대한 회상 정도"라며 "이 가치들이 앞으로도 계속 불리기 위해서는 음악적 완성도가 필요하다, 610명이 만들어 내는 무대가 음악적으로 완성도를 높이고 예술을 담게 되면 그 가치도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역사가 준 선물, 포장만 보고 버릴 것인가"

 

류씨는 또 이번 합창이 올해 6월 항쟁 기념일에만 불리는 게 아니라 "매년 정례화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프랑스가 시민혁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문화를 형성한 것처럼, 우리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 가치를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6월 항쟁이 중도개혁적인 사람들의 잔치로 특화돼버리면 그 의미를 살려나갈 수 없다. 역사가 우리에게 안겨준 선물을 포장만 보고 버리는 꼴이 된다. 그 안의 내용물이 뭐가 있는지는 봐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시민 모두의 잔치가 돼야 한다. 6월 항쟁과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 의미와 가치를 축소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 외연을 시민들이 확장해줘야 한다. 이 일이 가진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가지고 6월 항쟁이 그걸 지키는 거점이 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는 "우리가 지금 욕망의 프레임에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모습을 봐도 그냥 가만히 있게 되는 것"이라며 "시민들이 함께 모인다면, 이 합창이 매년 불리고 자연스러운 문화로 만들어진다면 사회를 보다 나은 모습으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류씨는 끝으로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 소셜테이너들의 참여가 이뤄지면 좋겠다"며 "대신 연습은 꼭 참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또 다시 불참했다. 다가오는 이번 6월 항쟁 기념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임기 중 단 한 번도 '민주화'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호언철패, 독재타도'라는 구호로 1987년 항쟁을 기억한다. 그리고 얻어낸 대통령 직선제. 그 선거로 당선된 사람은 지금 그날을 기념할 것을 거부하고 있다. 610명의 목소리가 부를 <그날이 오면>이 다시 기다려지는 이유다.

#6월항쟁 #6.10 #류형선 #합창 #서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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