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노예주... 나에겐 흑인 사촌이 있습니다

미국 킬비씨의 용서와 화해... 전두환이 5·18 피해자에게 무릎 꿇을 날은?

등록 2012.05.28 21:31수정 2012.05.2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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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비극은 필연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양산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5·18광주민주화운동, 군사독재의 폭압, 용산참사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에도 숱한 피해자가 등장한다. 지난날의 비극은 은폐되고 조작되어 그 상처와 고통이 또 다른 형태로 피해자의 가족과 후손에게 이어진다. 피해자는 즐비하나 가해자의 존재는 좀체 찾기 어렵다. 자발적으로 피해자를 찾아 무릎 꿇고 과거와 화해를 시도하는 가해자를 만나는 일이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요원하다.

사죄는커녕 부와 권력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이다. 친일파 후손들은 선친의 재산을 되찾겠다고 나선다. 소위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가해자들(판사, 검사,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이 피해자를 찾아 머리를 조아렸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권력 유지를 위해 국가권력으로 살인을 저지른 일이 인혁당 사건이다. 하지만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죄악을 고발하는 목소리를 "가차 없는 모함"으로 치부하고, 인혁당 사건이 무죄라는 법원 판결 이후에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정치인이 현재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라는 사실이 한국 사회의 상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가폭력이 자행된 5·18 '대학살'은 어떤가. 공수부대가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고 대검으로 찌르며 '인간사냥'을 저질러 200명 이상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다. 오죽하면 외신기자가 "5·18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라고 묘사했을까. 당시 피해자 상당수는 현재까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고, 그중 10%는 자살로 세상을 등졌다. 일반인의 약 500배에 해당하는 수치다(2009년 5월 17일자 <KBS스페셜>).

하지만 신군부의 우두머리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폭동"이라며 진압을 정당화하고, 뇌물수수와 군형법상 반란 등의 혐의로 선고받은 추징금 중 1672억 원을 미납한 채 부를 누리고 있다. 그런 그에게 큰절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 일부가 아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반란'으로 규정한 이들이 국회의원 후보로 거론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노예 소유주였던 할아버지... "잘못을 사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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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노예제도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후손들. 피비(오른쪽)는 노예 소유주의 후손이다. 베티(왼쪽) 선조는 이들의 노예였다. 이들은 고고조할아버지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나온 먼 친척이다. ⓒ 피비 킬비


미국 역시, '노예제도'라는 역사적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노예제도는 수많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만들어내며 인종적 장벽을 쌓아올렸다. 1963년 마틴 루터 킹은 "노예의 후손과 노예소유주의 후손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 모습을 꿈꾸며 이 장벽이 허물어질 날을 손꼽았다.


마틴 루터 킹의 꿈을 실현시킨 주인공들이 있다. 피비 킬비씨(이스턴 메노나이트 대학교 갈등전환대학원 재정업무 디렉터)와 베티 킬비씨(흑인 인권운동가 겸 저술가)다. 백인인 피비는 노예 소유주의 후손이고, 흑인인 베티의 선조는 이들의 노예였다. 일면식도 없던 둘을 엮어준 끈은 다름 아닌 노예제도였다. 노예제도의 가해자와 피해자인 두 사람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간다. 결혼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버지니아로 이사 온 피비는 지역신문에서 자신과 이름(성)이 같은 흑인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킬비라는 성을 가진 흑인 가족들과 자신이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

가시지 않고 남아 있던 피비의 궁금증은 2006년, '커밍 투 더 테이블(CTTT)'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나면서 다시 싹텄다. CTTT이란 모임은 노예의 후손과 노예소유주의 후손들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 마틴 루터 킹의 꿈에서 기인했다. 노예제도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손이 만남을 통해 어그러진 과거와 화해하고 새로운 인종적 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민간 차원의 '과거사 정리' 프로그램이다. 이후 피비는 본격적으로 가족의 과거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법원에 남아 있는 인구조사 서류를 뒤졌고, 관련 서류를 찾을 수 있었다. 과거 우리 가족이 노예주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노예는 사람이 아닌 재산이었기에 할아버지가 5명의 노예를 소유했다는 것이 자료에 고스란히 기입되어 있었다. 이후 나는 우리 가족이 지난날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이 드디어 실현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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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 킬비 씨가 법원에서 찾아낸 선조의 재산 목록. 오른쪽 하단에 보면 노예들이 재산 목록으로 기재되어 있다. ⓒ 피비 킬비


자신이 노예제도 가해자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피비는 피해자의 후손들을 찾기 시작했다. 저술가로 활동하던 베티 킬비씨를 인터넷에서 찾았다. 노예 후손 중 한 명이던 베티가 쓴 책을 읽으면서 남아 있던 퍼즐을 맞춰갔다. 피비의 아버지가 자랐던 곳이 책에서 언급된 베티의 고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확인 결과 이들은 같은 고조할아버지에서 갈라져나온 먼 친척이었다. 피비는 고민 끝에 연락하기로 결심했다.

막상 결심하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주변에서는 "혹시 재산반환 소송이라도 당하면 어쩌냐"고 염려했다. 하지만 정작 피비는 언제, 어떻게 연락할 것인지, 혹시 이 일로 베티의 가족에 불쾌함을 초래하는 건 아닌지 그게 더 걱정됐다. 숙고 끝에 2007년, 1월 15일 마틴루터 킹 데이에 베티에게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당시 피비가 보냈던 메일 내용이다.

내 이름은 피비 킬비입니다. 백인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꿈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 어쩌면 우리가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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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대 후반 버지니아는 노예를 가장 많이 소유한 주였다. 빨간 동그라미 지역이 피비 킬비의 선조의 농장이 있던 곳. 베티 킬비의 선조는 그 농장의 노예였다. ⓒ 피비 킬비


공교롭게도 베티는 첫 번째 메일을 받지 못했다. 피비는 베티가 연락하길 원치 않는다고 여겼다. 몇 주 뒤 다시 메일을 보냈다. 첫 번째 메일을 보낼 때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낯선 이가 보낸 이메일이었지만 베티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메일의 제목이 "또 다른 킬비로부터"였기 때문이다. 베티는 "충격 그 자체였다. 백인 친척이 보낸 메일을 받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 베티는 마틴 루터 킹의 삶과 정신에 대해 강연하며 전국을 돌고 있을 때였다. 마틴 루터 킹의 꿈을 우리가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이메일을 받았지만 막상 속 깊은 곳에서는 불편함이 꿈틀댔다. 가족 중에선 베티에게 "제 정신이냐?, 왜 사랑하는 가족을 노예로 만들었던 이들을 만나려 하냐"며 언짢아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베티는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위선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티는 피비에게 "안녕, 사촌(Hello cousin)"이라는 제목의 메일을 보냈다. 불편함도 잠시 둘은 마치 오래 전 헤어진 혈육처럼 서로 연락하며 울고 웃었다. 2007년 2월, 결국 두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마주앉게 된다. 베티가 자신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시사회에 피비를 초대한 것이다. 베티는 그날 저녁 청중에게 다시 만난 백인 사촌을 소개했다. 노예의 자녀와 노예소유주의 자녀가 한 테이블에 마주 앉는 꿈이 실현되는 자리였다.  

"치유로 '전환'되지 않은 고통은 다시 '전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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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지역에서 흑인 최초로 백인 사립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베티 킬비 씨. 당시 다른 흑인 학생들과 함께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등교하는 모습(왼쪽). 저술가인 베티의 저서인 (오른쪽). 인종 차별과 싸워온 자신과 그의 가족의 삶을 담겨있다. ⓒ 피비 킬비


둘은 만남을 통해 과거의 비극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서로 살아온 삶은 서로의 피부색만큼이나 극명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베티는 소작농에 교육 기회마저 박탈당한 아버지의 갖은 노력 끝에 백인들만 다니는 고등학교에 최초로 입학한 흑인 학생 중 한 명이 됐다. 하지만 지역 교육위원회와 지난한 소송을 거쳐야 했고, 백인 학우들의 모욕과 폭력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베티의 가족이 협박전화가 시달리는 동안 피비는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백인들만 다니는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혜택을 누렸다.

피비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종 문제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수치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며 "그런 면에서 아버지 역시 또 다른 피해자"라고 말했다. 피비는 그래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안에 있는 감정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스스로와 이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우리 안에 있는 적개심의 벽을 허무는 데 서로를 알아가고 만나는 것만큼 좋은 길은 없다. 노예제도로 인한 수많은 상처는 미국 아프리칸 어메리칸들의 역사적 단절을 가져왔다. 고통스런 단절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후손들이 연대를 통해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피비와 베티의 만남이 부러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오래 전 조상이 저지른 잘못을 사실상 도덕적 책임도 전무한 후손이 제 발로 피해자의 후손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살육당한 피해자의 가족 앞에서 전두환(혹은 그의 후손이)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 박근혜가 혹은 인혁당사건의 가해자들이 피해자 가족을 부둥켜안는 일이, 아직도 우리에겐 꿈인가.

미국의 영성가 리처드 로어 신부의 말이다.

"치유로 전환되지(transformed) 않은 고통은 다시 전이(transferred)된다."
#노예제도 #과거사정리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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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갈등전환센터 센터장 (서울시 이웃분쟁조정센터 조정위원, 기상청 갈등관리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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