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홍콩에 가더니... 뭔가 달라졌어요

[공모-여행지에서 생긴 일] 낯선 도시에서 낯선 엄마를 만나다

등록 2012.07.01 14:21수정 2012.07.0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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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엄마와 단둘이 홍콩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을 현상해 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잊어버린 지 수개월 째. '이러다 곧 1년이 되겠다' 싶어 현상할 사진들을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특별할 것 없었던 여행이 새롭게 곱씹어진다. 반 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말이다. 문득문득 아쉬운 점이 생각나고, 미처 가지 못한 곳, 먹지 못한 것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다시 일상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 여행지에서 만난 생소한 풍경, 낯선 사람들과 음식, 그리고 그 도시의 냄새 등... 여행의 흔적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와의 여행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와의 여행을 언젠가 해야 할 '일', 다시 말해 '의무감'으로 여겼던 탓일까. 떠나기 전 홍콩이 재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전에 한 번 다녀왔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홍콩의 야경이나 딤섬 역시 크게 그립지 않았다. 엄마와의 시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할 일 다 했다'라는 생각이 더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진을 정리하다가 엄마와의 홍콩 여행이 다시 보였다. 진짜 좋았고, 진짜 즐거웠구나.

엄마와의 여행,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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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야경. 보이는 것만큼 예쁘게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쉽다. ⓒ 김효진


사실 엄마와 여행을 떠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살갑지 않을 뿐더러 때로는 불편해지기까지한 딸이 여행을 가자고 하니, 엄마는 가고 싶어 하는 눈치면서도 몇 번씩이나 이런 저런 이유를 늘어놓으며 간다 안 간다 마음을 바꿨다.

엄마가 마음을 바꾸는 동안 내 마음도 왔다갔다했다. '엄마에게 여행을 가자고 한 게 과연 잘한 일인가'라는 약간의 후회와 걱정.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비뚤어지고 불편해지고 있는 관계를 여행을 통해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다. 말로는 마음을 바꾸면서도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엄마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고, 거기에 나의 의무감도 더해졌기 때문에 여행은 계속 추진됐다.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계속해서 가네 안 가네 하던 엄마는 결국 별수 없이 비행기에 올라탔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여전히 불편했다.

바깥 음식을 (믿지 못해서) 잘 먹지 못하는 엄마. 낯선 곳을 두려워해 익숙한 곳에서만 약속을 하는 엄마. 종종 찾아오는 불면증으로 힘들어하는 것도 모자라 잠자리도 많이 가리는 엄마. 쏟아지는 해외 뉴스에 외국여행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는 엄마. 함께 여행을 다니기 좋은 조건이 하나도 없는 엄마와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홍콩에서 만난 엄마... 뭔가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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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밤거리. 엄마는 신이 났다! ⓒ 김효진


홍콩에 도착하자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내게로 향했던 불편함을 걷어내고 연신 생글생글 웃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하나하나를 나보다 더 즐기며 좋아했다. 자유여행이었던 탓에 버스와 지하철을 계속 갈아타고, 많이 걸어 힘들었을 엄마는 "하나도 힘들지 않다"며 어디든 데리고 가기만 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한국과의 다른 점, 비슷한 점, 좋은 점, 나쁜 점 등을 수다스럽게 늘어놨다. "예쁘다" "멋있다" "좋다" 등의 감탄을 연신 쏟아내기도 했다.

11월의 홍콩은 습도가 무척 높았다. 여행을 하는 3박 4일동안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다. 자칫 '짜증 수치'가 치솟을 수 있는 날씨. 당장은 좋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걱정한 건 다행히도 기우였다.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기 힘들어 우비를 뒤집어쓰면서도 엄마는 뭐가 재미있는지 계속 웃었다. 사진을 찍을 때는 다소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사진이 잘 나왔는지 꼭 확인을 했고, 더러는 "이렇게 저렇게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홍콩에서 엄마는 모든 음식에 감동했다. 나는 엄마가 바깥 음식을 이렇게 잘 드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식당의 위생 상태, 물수건 소독에 대한 불신, 조미료 맛이 나는 음식에 대한 비판 등 엄마와의 외식은 항상 부정적인 단어들의 나열로 기억될 뿐이다.

그런 엄마가 "음식이 맛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맛이 나느냐"며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음식이 맛있긴 했지만 엄마가 서울에서 가졌던 불신이 100% 해소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엄마는 음식이 아니라 홍콩의 낯설음을 맛보고 있었다. 낯설다는 것은 사람을 두렵게도 하지만, 사람을 새롭게 만들기도 한다. 틀에 박힌 일상.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 지지 않는, 혹은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엄마의 일상이 낯선 곳을 두려워하고, 먹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는지. 엄마는 일상을 벗어나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홍콩에 와서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낯설기 때문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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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구석구석 궁금한 것이 많은 엄마. ⓒ 김효진


나는 엄마에게 가능한 많은 곳을 보여주고, 많은 것을 맛보게 해줘야겠다는 일종'의무감' 때문에 홍콩의 주요 명소들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빅토리아 피크, 마담 투소, 피크 트램 등등 어지간한 곳은 다 돌아다녔고, 한국에서는 한 번도 같이 가본 적이 없는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기도 했다. 우산을 써도 감당이 안 되는 많은 비가 내리던 때도 야시장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언제 또 올지 모른다며 아픈 다리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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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두 잔, 석 잔... 계속 이어지는 술, 그리고 엄마와의 수다. ⓒ 김효진


서울에서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던 이야기도 술술 풀렸다. 낯선 홍콩의 밤, 빗줄기, 조명, 그리고 술... 홍콩이라는 것만 빼면 서울에서도 충분히 함께할 수 있는 것인데 한 번도 함께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 모든 것이 홍콩에서는 가능해졌다. 한 잔이 두 잔으로, 두 잔에 석 잔으로 이어진 홍콩의 밤. 불편함을 걷어낸 그날 밤에 나눈 대화는 오랜만에 날이 서지 않은 채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에 한 약속들은 마치 마법처럼, 지금까지도 잘 지켜지고 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엄마와 나는 낯선 모습 속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나에게 여행이란, '낯선 도시 더하기 낯선 사람들'이었다. 가보지 못한 곳을 가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말이다. 두 번째 다녀온 홍콩, 너무나 친숙한 엄마... 내 기준에 하나도 맞지 않는 이 여행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진을 정리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나는 그때 그 여행을 대단한 여행이라고 부르리라'라고. 그곳에서 만난 낯선 엄마는 내 새로운 여행 친구로 기억될 것이고, 홍콩은 전과는 다른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런 여행도 충분히 낯설기 때문에, 그 속에 새로운 즐거움이 있기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공정여행 기사 공모에 응모한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정여행 기사 공모에 응모한 기사입니다.
#홍콩여행 #엄마와의 여행 #낯선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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