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극복 당사자들이 내린 영광의 인권상

진실의 힘, 수상자 고 '김근태'

등록 2012.06.28 21:02수정 2012.06.2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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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근태'형이 인권상을 받게 됐으니 축하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근태형도 형이지만 부인인 인재근을 보고 싶어 깜짝 서울행을 택했다. 시상식장인 동숭동 '흥사단' 강당. 29년 전 우리 부부가 결혼했던 곳이고, 30여 년 전 오늘의 주인공 김근태 부부가 결혼했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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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강당, 이렇게 좁았었나/ ⓒ 조명자

흥사단 강당, 이렇게 좁았었나/ ⓒ 조명자

 

좁은 계단을 올라 3층 강당에 도착하니 여기가 이렇게 좁았던가 싶게 로비나 강당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른이 된 후 다시 찾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선 느낌처럼. 그런데 행사 시작 한참 전에 도착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인권상 시상을 하는 단체 '진실의 힘'(?) 이란 이름도 처음 들은 곳이고 시상식 준비를 하는 사람도, 강당에 와계신 어른들도 낯 선 분들 뿐이었으니까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의구심도 잠깐. '진실의 힘'을 만든 사람들이 소개되자 뭔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민주화운동 가족입네 떠들고 다녔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이분들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오늘의 행사는 한국의 고문생존자들이 만든 재단법인 진실의힘에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진실의 힘 선생님 두 분을 모시고 행사를 여는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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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생존자 네 분과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박사 ⓒ 조명자

고문생존자 네 분과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박사 ⓒ 조명자

 

85년, 전남대 의대 재학 중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모진 고문을 받고 간첩으로 둔갑되어 14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강용주씨가 행사 시작을 열었다. 무식이 죄라고,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랐는데 6월 26일은 고문방지협약이 발효된 날로써 1977년 유엔총회가 이 날을 기념해 6월 26일을 '고문 생존자 지원의 날'로 선포한 것이라고 한다.

 

1970년에서 80년대,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서 자행된 잔인한 고문사례. 자신의 입맛에 안 맞거나 정권연장을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어디서나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가 고문을 하고, 죽이고, 감옥에 가두는 것은 예사였던 고문 공화국. 그 시절 우리에게는 인권이란 게 없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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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생존자 네 분과 권인숙교수가 수상자 선정에 대한 과정을 발표하고 있다. ⓒ 조명자

고문생존자 네 분과 권인숙교수가 수상자 선정에 대한 과정을 발표하고 있다. ⓒ 조명자

 

 

음지에서 자행되던 잔혹한 고문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은 85년 민청연 의장이던 고 '김근태'형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무자비하게 당했던 고문을 그의 아내 인재근이 세상에 알리고부터였던 것 같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비로소 고문정권의 잔학상을 자세히 알게 됐을 것이다. 물론 고문으로 조작된 조직사건, 통혁당이나 인혁당, 남민전 사건 등이 있었지만 고문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해외 인권단체의 우려와 개입을 낳게 된 것은 이 사건이 시작이지 않았나 싶다.

 

진보적 정치인, 지식인, 학생운동가들의 투옥과 고문에 대해서는 항의하고 지지하는 단체가 많았지만 막걸리 반공법을 비롯한 힘없는 민초들을 잡아 가두고 간첩을 만드는 독재정권의 만행은 어디에서도 알아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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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강당, 시상식장 ⓒ 조명자

흥사단 강당, 시상식장 ⓒ 조명자

 

내 편은 아무 곳에도 없고, 끌려가서 고문을 하면 당하고, 간첩을 만들면 바로 간첩이 되고, 사형을 선고하면 죽임을 당하는. '진실의 힘'은 그렇게 당하고 살아난 고문 생존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단체다. 그 단체를 설명하는 작은 책자에는 이런 귀절로 시작을 열고 있다.

 

진실의힘은

물이나 알던 어부가, 땅이나 하늘이나 알던 농부가

자신의 이름 석 자 밖에 모르는 촌부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간첩'으로 내몰려 죽음 같은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 무죄를 얻어내고,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아

그 일부를 출연하여 만든 재단입니다.

 

 

쭈꾸미와 꽃게를 잡던 어부가, 논 갈고 밭 매며 부모자식 봉양하던 순박한 농부가, 직장생활 하던 가장이, 일본을 오가며 장사하던 상인이 어느 날 잡혀 가 지하 고문실에서 눈 코 입, 수건으로 가린 뒤 거꾸로 물속에 처넣는 물고문, 전기고문, 고춧가루 고문 그도 안 되면 신고 있던 신발짝을 벗어 머리고 등이고 온 몸을 난타해 피투성이가 되어 혼절을 해야만 매질을 그치는 잔혹한 고문 속에서 간첩이 되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들의 억울함을 알아주고 지원해주는 구원의 손길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년, 19년, 18년, 7년...그 모진 세월을 어찌 다 설명할까. 진도에서 농사를 짓다 남편, 시어머니, 시동생과 함께 어느 날 남산 안기부로 끌려가 고문 끝에 간첩 가족이 된 한화자선생. 80년 8월에 끌려가 85년 사형집행으로 주검이 되어 돌아 온 남편이 때로는 부러웠단다.

 

"당신은 좋것소. 잊어불고 죽어서 좋것소."

 

간첩가족이라고 이웃들은 물론 혹여 자신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형제자매들까지도 철저히 외면했단다. 53일간 물고문, 매타작으로 수시로 기절을 했고 깨어나면 또 고문을 했단다. 한번은 기절했다 깨어났더니 수사관이란 놈이 "이년아, 여기가 어딘지 아냐? 서울대병원이다. 촌년이 출세했네. 서울대병원까지 오고." 그 정도로 맞고 또 맞으면서도 끝까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그랬다고 하시오'로 일관해 매를 더 벌었다고 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일개 촌부에게 간첩질을 했다고 하면 한 걸로 되던 시절이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이었다. 안기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개죽음을 당하고, 수십 년 감옥에 처박혀도 처자식 일가족이 굶고 병들고 거리에 나앉아도 어디 하나 손을 내밀 데가 없이 철저히 버려진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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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강당 진실의힘 인권상 시상식장 ⓒ 조명자

▲ 흥사단 강당 진실의힘 인권상 시상식장 ⓒ 조명자

 

간첩이 된 이유도 가지가지였다.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된 아버지, 숙부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옥인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30일간 고문 끝에 간첩이 되어 7년 옥살이를 한 이준호선생.

 

월북했다가 18년 만에 찾아 온 친척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모 형제 친인척 30명이 연행되어 아버지는 사형, 본인은 무기징역, 어머니는 3년 6개월, 누나는 4년, 남동생은 7년. 온가족이 징역을 살고 20년 만에 나왔더니 '내가 알던 지도가 사라져 버릴' 정도로 세상이 변했더라는 김태룡선생.

 

연평도에서 조기잡이를 하다가 북한 경비정에 끌려갔다 4개월 만에 살아 돌아왔더니 '북한에 포섭된 간첩'이라고 눈에 피눈물이 나도록 고문을 가해 별 수 없이 간첩이 되어 7년 옥살이를 한 박춘환선생.

 

친구 박춘환의 간첩질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깨복쟁이 친구 박춘환이 간첩이라는 것을 실토하라는 이유로 고문을 받고 징역을 산 임봉택, 유명록선생.

 

항일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6,25 때 행방불명 돼 아버지 얼굴도 몰랐던 박동운선생은 남파간첩인 아버지와 함께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남산 안기부 지하실로 끌려 가 두 달 동안 온갖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안기부 조서대로면 12살 부터 간첩활동을 한 것이 된다지만, 했다면 한 것이 안기부 법이었다. 공중에 매달아 매타작을 하면서 고춧가루 물을 얼굴에 붓고, 발가벗긴 채 철장에 묶고 라이터로 몸에 난 털을 태울 때 그는 죽음 보다 더 큰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이랴. 옆방 문을 열어 고문당하는 어머니, 작은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들려주고 만삭인 아내까지 잡아다 고문을 하겠다는 협박에 그는 간첩임을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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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근태동지를 대신하여 인권상을 수상하는 인재근의원 ⓒ 조명자

고 김근태동지를 대신하여 인권상을 수상하는 인재근의원 ⓒ 조명자

 

또다른 고문 생존자는 고문관들이 옷을 발가벗기고 마구 고문을 하고는 한밤중에 저희들끼리 술을 마시고 놀며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그 앞에서 발가벗은 채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더 맞을까봐 시키는 대로 발가벗고 노래를 불렀던 모멸감. 수십 년 지났지만 그는 지금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 노래라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맞아서 아픈 건 지나가는데 그 치욕은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단다.

 

고문 생존자 네 분이 단상에 오르셨다. 울먹울먹하며 인권상의 의미를 설명하시는 어른들을 뵈며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당신들은 이렇게 당했지만 다시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고문이 발붙이지 않도록 힘을 모으고,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고문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위로하고 도움을 나누며 고문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는 피해자와 가족들을 치유하기 위해 남은 생을 다 바치겠다는어른들 앞에 너무나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민주정권 10년 동안 이러저러한 조직 사건 당사자들 상당수가 크고 작은 배상금을 받았었다. 배상금을 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또 기금출연을 한 걸로 안다. 그 쓰임새를 보건데 개인의 이름을 빛내거나 사회적 조명을 받는 명분 위주의 쓰임새가 많았다는 걸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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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들에게 둘러싸여 연행되는 고 김근태의장 ⓒ 조명자

전경들에게 둘러싸여 연행되는 고 김근태의장 ⓒ 조명자

 

이분들 앞에 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노벨 평화상 보다 더 크고 진실되고 위대한 '진실의힘' 인권상. 오백만 원 그 상금의 의미와 가치는 그 분들의 한과 눈물, 잃어버린 삶과 혈육 그 무게를 통 털어도 부족한, 인간이 간직해야 할 '진실'의 무게 그것 아닐까.

크나큰 상을 수상하신 근태형은 하늘나라에서 어떤 수상소감을 발표하실까? 여섯 달의 부재가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 형의 미소가 유난히 그립다.

#진실의힘 인권상 #70~80년대 고문생존자 #김근태 #6월26일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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