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와 안보는 별개문제? "분노하라!"

[주장] 한일군사협정, 과거와 현재는 과연 별개인가

등록 2012.07.04 11:18수정 2012.07.04 11:18
0
원고료로 응원
스테판 에셀의 최근 작품 <분노하라>를 읽어보셨는가? 못 읽어봤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라. 간단히 말해, 이 책은 나오자마자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그만큼 수많은 젊은이들, 의식 있는 이들에게 큰 영감을 준 텍스트로 가득하다. 스테판 에셀은 90세가 넘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작품, 감히 '위대하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만큼 훌륭한 저서를 남길 수 있었을까.

이 책이 말하는 명제는 확고부동하다. 책 제목 그대로 '분노하라'는 것이다. 무엇에 분노하는가. 자본의 핍박에, 이주민의 탄압에, 끊임없는 전체주의의 유혹과 압력으로부터 분노하고 저항하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1차적인 보편적 권리들을 위한 투쟁, 인간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벌이라는 것이다. 분노하지 않으면 투쟁 역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고 노령의 쇠약한 몸체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를 통해 그토록 강렬하게 외친 것이다.

그는 또한 '분노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나약함, 무력감 등 '참여'라는 테제로부터 스스로 소외당할 수 있는 모든 명제를 거부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의 책 <분노하라> 중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는 장에서 설명되고 있으며, 이외에도 그의 저작 중 <참여하라 - 질 반데르푸텐과의 대담(2011)>에서 역동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는 분노의 도가니다. 비록 언론에는 나오지 않고 있지만,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동, 아메리카 등지에서도, 심지어 가까운 일본에서도 저항의 분위기는 무르익어가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로부터 전해져 오는 뜨거운 열기에도 불구하고 이 곳 한국 땅만큼은 냉랭하기 그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우리가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비록 우리가 분노했지만 그 분노를 결집시킬 수 없었다는 것. 전자의 경우는 정말 최악의 경우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분노하지 않았음은 우리의 근성이 그만큼 지배자들에게 쉽게 복종하도록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는 온갖 종류의 전체주의가 활개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후자가 한국의 상황에 더욱 들어맞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비록 분노하긴 했지만, 그 분노의 정도가 미약하여 그 분노를 결집시킬 수도 없었고 더불어 결집된다 해도 권력과 맞서 싸울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가 분노할 만한 일에는 무엇이 있는가. 멀리 찾아볼 것도 없다. 한국적 상황에서, 우리가 분노할 수 있는 조건은 대략적으로 다음 세 가지다. 하나, 우리 민족의 진정한 해방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 원천봉쇄를 하는가. 둘, 인간이 자유를 누림에 있어 그 권리의 진정성을 호도하고 왜곡하여 궁극적으로 압살하려 하는가.


셋, 좀 더 나은 세계, 내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아래로부터 민중의 열망을 '혼란'과 '무질서' 따위의 단순한 국가주의적 관점의 1차적 논리로서 훼방 내지는 와해를 기도하는가.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충족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분노할 수 있고, 분노해야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어떠한 사건들이 있을까. 멀리 찾아볼 필요는 없다. 바로 최근에 국무회의에서 비밀리에 통과된 한일군사협정을 보자. 이 사건은 위 세 가지 중 첫 번째 조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정부는 한일군사협정이 '안보'를 위해서라고 말하며, '과거사와 안보는 별개 문제'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민의 동의 없이 비밀리에 통과되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적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은 둘째로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의 근본적인 문제점, 즉 한-일 간의 관계에서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라는 점을 볼 때에 당연히 분노해야 하며, 더불어 그 분노의 근원에는 '민족'이라는 주체를 빼놓을 수 없다.

'민족주의'라는 거창한 슬로건과 과도한 민족주의에의 우경화는 마땅히 지양해야 할 길이지만, 적어도 한-일 관계 내지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민족'을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과거 일제강점기가 과연 '국가'가 '국가'를 지배한 사건인가, 한 민족이 타 민족을 지배한 사건인가 하는 질문이 그 근원이다.

전자는 100% 아니, 200% 지배자들의 관점이다. '국가'가 뜻하는 다분히 포괄적인 의미 덕분에 내부에서 행해졌던 수많은 배신적 행위들에 대한 정당화 내지 합리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민족'이라는 주체를 빼놓고서는 반민족적, 반민중적 배신 행위들에 대한, 나아가 과거 일제에 의해 세워진 물질적 토대와 사회, 문화, 법률 제반 조건들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질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라는 뼈아픈 시기를 지나온 우리로서는, 당연하게도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것을 청산할 필요가 있고 더욱이 광복 후 6개월 만에 벌어진 첫 사건이 어처구니 없게도 친일세력에 의한 반민특위의 해체라는, 스스로 해방을 부정하는 괴이한 역사를 겪었기에 여전히 과거사에 대한 청산은 우리의 현재적 과제일 수 밖에 없다.

정부의 '과거사와 안보는 별개 문제'라며 한일군사협정을 정당화하는 것, 즉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라는 맥락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까닭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사의 연속성을 애써 부인한 채 '안보'라는 1차원적 국가논리로 정당화하는 셈이다.

우리는 스스로 해방을 부정했다. 반민특위 해체 이후에도 친일분자들에 대한 청산은 계속 시도되었지만, 이미 기득권을 거머쥐었던 친일 세력은 그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탄압했다. 과거에도 친일 청산에 반대하는 목소리의 주요한 논리는 '안보'와 '질서'였고, 현재도 한일군사협정의 빌미를 '안보'라고 이야기한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해방을 누리고자 한다면, 진정한 '민족 국가'의 건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과거에 지배당했던 민족으로부터 수탈당한 물질적 토대를 빼앗아야 할 것이고, 나아가 그들이 조성해놓은 제반 사회 조건들에 대한 혁파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우리가 노예였던 과거를 파괴함으로서 진정한 민족적 해방을 이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 과정은 혁명이거나, 최소한 혁명에 준하는 파격적인 개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을 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여전히 '친일 청산'이라는 명제가 과거의 명제가 아니라, 명실공히 현재적 명제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이유이다.

여전히 정부와 우익세력은 한일군사협정이 '안보'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협정의 성격은 논외로 하더라도 우리가 현재적 명제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친일 청산'이라는 문제를 과거형으로 치부하고 역사의 연속성을 무시한다는 점. 하여 진정한 민족의 해방을 위한 과거사 청산에 대한 근원적 질문들이 근본적으로 막힐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과거와 현재를 별개로 치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독일을 보라, 과거 유태인 학살을 저지른 그들이, 공식적으로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나치의 포로수용소를 방문하고 조의를 표하기 위해 애를 쓰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분노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진정으로' 분노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분노하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 과거를 과거의 일로 치부하는 그 순간 우리는 과거의 노예가 된다. 때문에 과거의 잘못된 것은 반드시 현재로 다루어져야 하며, 그렇게 될 때에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한일군사협정은 글에 나와있듯이 협정의 속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1차로 '군사'협정인데다 근본적으로는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자세 없이 졸속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친일 문제는 단순히 과거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친일 문제,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관련한 모든 것은 원점에서 재논의되어야 하며,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 더불어 진정한 민족적 자유와 자긍심은 그러한 치욕적인 과거를 스스로 파괴할 때에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을 일체 부인하고 단순히 현재적 상황만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며 유치한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과거는 과거일 수 없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다. 역사인식의 중요성이 괜히 나온 말이겠는가.


이 글을 <한겨레> 신문에도 투고했음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과거를 과거의 일로 치부하는 그 순간 우리는 과거의 노예가 된다. 때문에 과거의 잘못된 것은 반드시 현재로 다루어져야 하며, 그렇게 될 때에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한일군사협정은 글에 나와있듯이 협정의 속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1차로 '군사'협정인데다 근본적으로는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자세 없이 졸속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친일 문제는 단순히 과거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친일 문제,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관련한 모든 것은 원점에서 재논의되어야 하며,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 더불어 진정한 민족적 자유와 자긍심은 그러한 치욕적인 과거를 스스로 파괴할 때에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을 일체 부인하고 단순히 현재적 상황만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며 유치한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과거는 과거일 수 없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다. 역사인식의 중요성이 괜히 나온 말이겠는가.


이 글을 <한겨레> 신문에도 투고했음을 밝힙니다.
#한일군사협정 #친일 #해방 #민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단독] 김건희 일가 부동산 재산만 '최소' 253억4873만 원
  4. 4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