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블 블로거, 어떻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나

[오마이 블로거를 만나다 3]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저자 이충렬

등록 2012.07.06 12:14수정 2012.07.06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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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렬 작가 ⓒ 김영사 제공


"최순우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건 1992년이었다. 한국에 나왔다가 최순우 전집 5권을 사 들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녁에 잠이 안 올 때마다 읽기 시작했는데, 전부 2~3번 정도 봤다. 그래서 대강 어떤 분인지 감이 왔고, 최순우 선생의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분이 이런 인품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혜곡 최순우를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나고 꼭 20년 뒤에 그에 관한 책을 썼다. 이충렬 작가가 펴낸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가는 이번에 출간한 책을 포함, 지금까지 4권의 책을 세상에 내놨다. 그 가운데 <간송 전형필>이 가장 널리 알려졌고,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지금도 스테디셀러가 되어 꾸준히 팔리고 있다.


이 작가는 출간 준비를 할 때 "이번 책을 특히 공을 들여 썼다"며 "만일 독자들에게 외면을 당한다면 절필할 생각까지 있다"는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된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를 읽으면 이 작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문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혜곡 최순우 선생의 전기를 쓰는 게 얼마나 지난하면서 인내가 필요한 작업인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느껴진다.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분석하고 혜곡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 증언을 들은 뒤 그것을 통해 최순우라는 인물을 형상화해낸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충렬 작가를 이야기할 때 '오마이뉴스 블로그'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작가는 '오마이뉴스 블로그'를 통해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그림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뒤, 메이저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 작가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작가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와 더불어 <오마이뉴스> 블로거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블로거인 기자 역시 이 작가와 '오마이뉴스 블로그'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처음에는 이 작가의 블로그를 찾아가 포스팅한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의 블로그를 풀빵구리 쥐 드나들 듯하면서 지속적으로 인연을 쌓아갔고, 그것이 개인적인 친분으로 발전했다. 

이 작가는 지난 4월 말, 혜곡 최순우 선생의 전기를 출간하기 위해 다시 귀국했다. 그리고 6월 27일,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를 세상에 내놨다. 이번에도 이 작가는 교보문고 광화문점 티움에서 책 출간을 기념하는 '강연회'를 할 예정이다. 아마도 그 자리에는 지난해에 이어 이 작가의 책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오블 블로거들이 대거 참석, 끈끈한 정을 나눌 것이 분명하다.


시골 고등학교 출신으로 국립박물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최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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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 옛집을 찾은 이들에게 최순우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이충렬 작가 ⓒ 이충렬


지난 2일, 김영사 사옥이 있는 한옥에서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를 출간한 뒤 설레는 마음을 지그시 누른 채 독자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이충렬 작가를 만났다.

"우리나라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 문화사에서 3명의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학자인 우현 고유섭 선생과 간송 전형필 그리고 혜곡 최순우다. 간송은 우리 문화유산을 지킨 분이다. 그래서 그분 이야기(<간송 전형필>·김영사)를 썼다. 문화유산은 지킨 다음에는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알린 사람이 바로 혜곡 최순우 선생이었다."

전작 <간송 전형필>에 이어 혜곡 최순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전기를 쓰게 된 계기에 대해 이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최순우는 1950년대부터 70년까지 걸쳐 600여 편의 글을 썼다.

이 작가는 "혜곡이 쓴 글의 양도 방대하지만 내용도 거의 독보적"이라며 "우리 것의 소중함을 알린 글이기 때문에 도대체 이 분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우리 것을 알리는 전도사가 되었는지 그것을 짚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 식민사관의 영향과 해방 후 밀려들어온 서구문물 때문에 우리 문화유산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순우는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려나가는데 온 생애를 다 바쳤다는 것이 이 작가의 말이다.

"전기 작업을 할 때 그 사람에 대해서 객관화를 해야 하지만 존경하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혜곡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혜곡의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이다. 문화는 우리의 국격이며, 우리의 자부심이다. 또한 문화는 우리의 영혼을 풍부하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 20세기가 자본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이제 너무 돈돈돈 하지 말고 인간적으로 풍요해지자는 생각을 했다."

또 다른 이유로 이 작가는 혜곡의 집념을 꼽았다. 이 작가는 "시골 고등학교 출신으로 대한민국 국립박물관의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최순우의 수십 년 동안의 노력과 집념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강조했다.

최순우는 박물관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와 의지로 노력했지만, 고졸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승진하지 못한 채 20년 동안 미술과장 자리를 지켜야 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좌절하고 한탄했겠지만 최순우는 달랐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를 거듭했으며,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

그뿐인가,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고려청자 가마터를 찾아 나서고, 백자 가마터를 찾아 나섰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최순우는 국립박물관장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 최순우를 이 작가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보수'로 지칭했다.

"국가공무원으로 충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면서 국가가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다 비판했다. 이런 분이야말로 진정한 보수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이런 분이야말로 공무원의 표상이며, 혜곡은 결코 표리부동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미국으로 이민, 자료 수집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이 작가의 최순우 칭찬은 끝이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이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든 의문. 세상에 흠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단점이 있기 마련이 아닌가. 최순우를 너무 모범적이면서 긍정적인 인물로 미화한 것은 아닌지?

이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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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사

"혜곡은 인간적인 흠이 거의 없다. 순한 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담이 너무 많아서 일부러 뺀 게 많다. 그런 얘기를 쓰면 더 미화를 시키는 것 같아서 뺀 것이다. 혜곡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 증언을 들었을 때 그의 험담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완벽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엘리트들만 있었던 국립박물관에서 관장이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작가는 "이번에 쓴 책에 가장 공을 많이 들였다"며 "간송의 책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보다 문화재 수집이야기가 더 많았지만, 이 책은 인간의 이야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야기 구조가 있는 본격적인 전기를 쓸 생각을 했고, 그래서 독자들이 읽으면서 지루해하지 않게 하려고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전과 달리 편집을 하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에 그는 만족해하고 있다.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궁금했다. <간송 전형필>은 14쇄를 찍으면서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잡았다.

"책이 출간되고 나면 1차 반응은 서평이다. 서평이 좋게 나와야 독자들이 그걸 보고 책을 산다. 책이 출간된 지난 주말, 대부분의 신문에서 긍정적으로 서평을 썼다."

이 작가는 대학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 지금까지 계속 그곳에서 살고 있다. 94년에 실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한겨레신문> 해외통신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외국에 거주하면서 전기를 쓰기 위한 자료 수집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인터넷으로 보급으로 어지간한 것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수집이 가능했다. 10년 전만 같아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 자료 수집을 많이 하다 보면 노하우가 생긴다. 여기에 가면 이런 자료가 있고, 저기에 가면 저런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어려운 것은 해외에 살다 보니 자료구입비가 국내보다 두 배쯤 든다는 것이다. 해외배송으로 책을 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딱 한 페이지만 필요한 책도 해외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구입한 경우도 많았다."

이 작가는 자료를 구하는 문제 때문에 국내의 지인들에게 수없이 많이 부탁, 신세를 많이 지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간송 전형필>을 '국민드라마'로 만들자는 제의받기도

이 작가가 언제 '오마이뉴스 블로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 인연이 어떻게 이 작가를 블로거에서 작가로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2006년, 이 작가는 <오마이뉴스>에 블로그를 연다. 당시 컴퓨터나 인터넷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그는 남의 손을 빌어 블로그를 만들었다. 오블 블로거들에게 '뜰기 처자'로 불리는 윤솔지가 그에게 블로그를 운영하라고 권유하면서 만들어주었다. 윤솔지는 소설가 윤정모의 외동딸로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블로그를 만든 이 작가는 어떤 글을 올리면 좋을까, 고민했다. 가장 잘 아는 것 혹은 잘 하는 것을 해야 신명나게 포스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치가 빠른 이 작가는 체득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의 '그림과 글이 있는 블로그'는 그림 이야기와 문화 이야기가 주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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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사

하지만 처음에 글을 올리는 건 쉽지 않았다. 사진을 올리면 사진이 보이지 않고 '배꼽(X)'만 보이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나중에야 이 작가는 사진의 용량이 커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진을 제대로 올릴 수 있게 적절한 조언을 해준 이는 역시 오블 블로거 '너도바람'이었다. 그는 일주일쯤 너도바람에게 '블로그 과외'를 받으면서 블로그 포스팅 요령을 터득한다.
꾸준히 그림과 관련된 글을 올리던 어느 날, 이 작가는 한 출판사로부터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름이 제법 알려진 메이저 출판사였지만, '건방지게' 그는 거절했단다. 아직 쓸 글이 많아서 책을 낼 시간이 없다고. 나중에 어지간히 글이 모인 뒤, 책을 낼 생각에 그 출판사에 연락했더니 그의 글에 관심을 보인 이는 이미 퇴직한 뒤였다.

그리고 몇 달 뒤, 김영사로부터 출간 제의를 받는다. 그렇게 해서 낸 책이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 블로거 이충렬이 작가 이충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어 두 번째로 낸 책 <간송 전형필>은 작가의 기대를 넘어서는 성과를 거뒀고, 그가 작가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간송 전형필>과 관련해 이 작가는 모 방송국에서 '국민드라마'로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유족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는 일화를 공개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간송의 일대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엄청난 반향이 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때문에 유족이 난색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간송미술관이 봄과 가을에 두 차례 전시회를 열 때마다 관람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수용하기 어려운데, 간송의 일대기가 드라마로 방영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될 것 같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 작가는 드라마 제작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우리 문화사의 중요인물에 주목하고 그들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거듭하고 있는 이충렬 작가는 "간송 전형필과 혜곡 최순우의 맥을 잇는 또 한 명의 문화인에 대한 전기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충렬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오마이뉴스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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