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가던 나그네도, 이 누정에 앉아 쉬었다네

[전통가옥의 숨은 멋 엿보기 116] 의정부 사계 박세당 사랑채

등록 2012.07.18 14:31수정 2012.07.1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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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의정부시 정암동 19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3호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 ⓒ 하주성

▲ 사랑채 의정부시 정암동 19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3호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 ⓒ 하주성

누마루에 앉아 본 경치가 절경이다. 수령 450년의 고목이 된 은행나무 너머로 북한산의 바위가 병풍처럼 드리워졌다. 앞에는 파란 잔디 위에서 한가롭게 뛰노는 개 몇 마리가 평안함을 안겨준다.

 

주인이 타 주는 향이 좋은 차 한 잔이, 오히려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의정부시 정암동 19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3호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 비록 사랑채 한 채만 남아있지만, 그 한 채만으로도 옛 정취를 가늠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 사랑채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1629 ~ 1703)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하였던 곳이다.

 

서계 선생이 집필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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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수인 은행나무 박세당 사랑채의 앞에 서 있는 수령 450년의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하주성

▲ 보호수인 은행나무 박세당 사랑채의 앞에 서 있는 수령 450년의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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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루 사랑채의 좌측 끝에는 장초석 위에 올린 누정이 있어 멋을 더한다 ⓒ 하주성

▲ 누마루 사랑채의 좌측 끝에는 장초석 위에 올린 누정이 있어 멋을 더한다 ⓒ 하주성

서계 선생은 인조 7년인 1629년에 이조 참판을 역임한 박정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세인 현종 1년인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경연 시독관, 함경북도 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라는 한창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할 나이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 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 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원래는 안채와 안 사랑, 바깥 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사랑채 앞에 서 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사랑채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멋 겸비한 사랑채,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 정기 느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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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 누정에 올라 앞을 내다보면 은행나무와 함께 북한산의 기암절벽이 바라다보이는 절경이다 ⓒ 하주성

▲ 정경 누정에 올라 앞을 내다보면 은행나무와 함께 북한산의 기암절벽이 바라다보이는 절경이다 ⓒ 하주성

서계 선생의 사랑채에는 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을 지나 금강산으로 여정을 잡았던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 들려 차 한 잔에 피곤한 다리를 쉬어갔기 때문이다. 이곳은 금강산으로 가는 곳의 길목으로, 누마루에 걸터앉으면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절경이 장관이다.

 

사랑채는 모두 네 칸 반 정도의 팔작집이다.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반 칸은 광을 달아내고 두 칸 반을 방을 드렸다. 방 앞으로는 마루를 넓게 놓아 생활공간을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좌측의 한 칸은 층이 지게 누정을 조성하였다.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올린 누정은 삼면으로 들창을 내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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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칸 반의 사랑채는 두 칸 방의 방을 드리고, 앞으로는 넓은 마루를 깔았다 ⓒ 하주성

▲ 방 네칸 반의 사랑채는 두 칸 방의 방을 드리고, 앞으로는 넓은 마루를 깔았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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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편 사랑채 뒤편에도 방 뒤오 툇마루를 놓아 쉴 공간을 더했다 ⓒ 하주성

▲ 뒤편 사랑채 뒤편에도 방 뒤오 툇마루를 놓아 쉴 공간을 더했다 ⓒ 하주성

아마도 서계 선생은 그 누정에 올라 책을 쓰고, 사람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담소를 했을 것이다. 들창을 모두 열어젖히고 서계 선생의 후손인 집주인이 타 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아마 예전 선생이 이곳에 기거했을 때도 이렇게 나그네들과 차 한 잔으로 세월을 낚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니 좁은 협시문에 '서계박선생진영각'이라 쓰여 있다. 담으로 돌아 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가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인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하석 박정의 초상화 두 점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는 잘 보여주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영정은 외부인에게는 보여주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볼 기회가 거의 없다.

 

뒤편에는 하석 박정의 영정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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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각 사랑채 뒤편에는 사계 박세당 선생의 영정을 모신 진영각이 있다 ⓒ 하주성

▲ 진영각 사랑채 뒤편에는 사계 박세당 선생의 영정을 모신 진영각이 있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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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각 진영각은 조산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등록문화재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한다 ⓒ 하주성

▲ 진영각 진영각은 조산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등록문화재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한다 ⓒ 하주성

하지만 7월 17일 찾아간 이 고택에는 동행자 중 한 분이 문화재위원이면서 집주인과 친분이 있어 영정 두 점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박정은 광해군 1년인 1619년에 문과시험에 합격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진영각에 모셔져 있는 두 점의 초상화 중 한 점은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영정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걸린 이 그림은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다른 하나의 영정인 우측의 영정은 서계의 초상화이다. 숙종 연간이 169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창주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세걸은 숙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한 인물로, 서계에게 팔선도를 증정하기도 했다. 서계와는 교류가 깊어 석천동을 자주 방문하기도 했다. 이 초상화를 주선한 사람은 서계의 아들인 박태보로 알려졌다. 

 

지난해 불이 나서 많은 자료가 전소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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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 진영각에 모셔진 박세당(우측)의 영정과 하석 박정의 영정(좌측) ⓒ 하주성

▲ 영정 진영각에 모셔진 박세당(우측)의 영정과 하석 박정의 영정(좌측) ⓒ 하주성

사랑채와 두 점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진영각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기둥과 벽 등에 불탄 흔적이 보인다. 지난해 12월에 누전으로 인한 불이 났다는 것이다. 소화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작동되지 않아 사랑채 옆에 있던 서가와 진영각 뒤편의 창고가 전소가 되어버렸단다.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볼썽사납다.

 

그 무엇보다도 서가에 보관하고 있던 300여 권의 고서가 불에 전소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은 그 책들이 다 타버린 것으로 인해 많은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다. 금강산으로 향하던 수많은 사람이 지친 몸을 쉬어가던 곳. 서계 박세당의 사랑채. 오늘 그곳에 앉아 옛 선인들의 마음을 함께 느껴본다. 아마도 북한산의 기운이 이 집으로 응집이 되어, 이곳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경기리포트와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세당 사랑채 #문화재자료 #의정부 #금강산 가는 길 #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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