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사진전은 안돼" 니콘 사장, 알고 보니

[인터뷰] 중국에 남겨진 위안부 할머니들 찍은 사진작가 안세홍

등록 2012.08.22 09:26수정 2012.08.2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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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홍 사진작가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갤러리 류가헌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지난 2001년부터 중국에 거주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작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날 안 작가는 사진전 '겹겹' 프로젝트에 대해 "할머니들의 아픔을 안타까워만 할 게 아니라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 유성호



꿈 많던 19세 소녀 히도미는 1940년 중국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왔다. 80여 년이 흐른 지금, 히도미는 '이수단(91)'이라는 원래 이름을 찾았지만 모국어를 잃었다.

"저희가 가기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와 (위안부 시절의) 아픔을 얘기해보신 적도 없었고, 같은 조선사람이 왔는데 그 이야기를 중국어로 한다는 걸 굉장히 가슴 아프고 수치스럽게 생각하셨다. 아리랑은 기억하시더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부르진 못해도 중간 구절은 잘 따라부르셨다."

사진작가 안세홍(42)씨는 지난 2001년부터 중국에 거주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진을 찍어왔다. 스무 살 안팎의 어린 나이에 강제로 끌려왔던 할머니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몸과 마음의 상처는 지독했고, 누구 하나 돌봐주는 이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겹겹이 쌓인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살아온 할머니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안씨는 카메라를 메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이미 한 잡지사에서 일하던 1996년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 집'에서 사진을 찍어왔다. 계속 할머니들의 말벗을 하고, 사진을 찍으며, 그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조금씩 터득했다.

그래도 중국 현지 작업은 쉽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 후 위안소가 있던 지역에 홀로 남겨졌던 할머니들은 70여 년 만에 찾아온 고향 사람의 방문을 두려워했다. 의심도 했다.

안씨는 할머니들과 함께 생활하며 믿음을 쌓아갔다. 2001~2005년 사이 중국과 한국을 7차례 오가며 한발짝 한발짝 할머니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의 세월을 기록했다. 그동안 안씨가 만난 12명의 할머니 가운데 8명이 세상을 떴다. 겨우 4명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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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엽(게이코, 수미코) 동원연도 1937년 13세, _ 할머니의 깊게 패인 주름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가슴속 깊숙이, 당시의 고통과 한이 지금까지 풀리지 못한 채 쌓이고 쌓여 커다란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 안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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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임, 동원연도1934년 22세 _ 할머니는 한시도 고향을 잊어 본적 없다며,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묻히고 싶어 하셨습니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100세이지만, 5년 전 중국의 오지에서 쓸쓸히 돌아 가셨습니다. ⓒ 안세홍


70년 만에 찾아온 '고향 사람'... "저마다 도움될 길 찾아 실천해야"

안씨는 이 사진들을 모아 2012년 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할머니들의 깊게 패인 주름에서 긴 세월 동안 겹겹이 쌓여온 한을 본 그는 프로젝트 이름을 '겹겹'이라고 붙였다.

여러 사람의 작은 힘들이 겹겹이 모일 때 비로소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뜻도 담겨 있다. 안씨는 "할머니들의 아픔을 안타까워만 할 게 아니라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해야 한다"며 "저마다 도움이 될 길을 찾아 실천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21일 '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시 종로구 갤러리 류가헌에서 안세홍씨를 만났다. 서울 전시회는 겹겹 프로젝트의 두 번째 성과물이다. 첫 전시회는 올 6월 26일부터 7월 9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전시회 개최는 그가 3년 전 일본에 갈 때부터 맘먹은 일이었다. 문제는 '어떻게'였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2011년 10월부터 준비한 끝에 비용과 장소를 마련했다. 그런데 전시회를 한 달 앞두고 장소를 빌려준 사진전시관 '니콘 살롱'에서 연락이 왔다. '정치색이 강한 일본부 위안부 사진전은 개최할 수 없다'는 일방적 통보였다.

설명을 피하던 살롱 측은 '니콘 사장의 지시'라고 밝혔다. 알고보니 니콘은 미쯔비시그룹 계열사였다. 미쯔비시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한 곳으로, 대표적인 전범기업으로 꼽힌다. 한국 대법원은 지난 5월 강제징용 피해자 9명이 미쯔비시중공업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 현지 작가들도 그렇고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일 군수산업을 주도하는 미쯔비시가 과거 잠수함·대포차용 렌즈를 만들던 기술을 바탕으로 세운 곳이 바로 니콘이었다. 우익단체의 위협이나 항의 시위는 잠깐이라 큰 부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쯔비시 문제를 어떻게 찾아내 부각시킬까 하는 점이 어려웠다. 그들이 바로 진짜 우익이었다."

일본 도쿄서 시작된 '겹겹 프로젝트' 가로막은 니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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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홍 사진작가의 '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갤러리 류가헌을 찾은 학부모와 학생이 할머니들의 세월을 기록한 사진들을 관람하고 있다. ⓒ 유성호


안씨는 결국 도쿄지방법원에 '니콘 살롱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은 그의 손을 들어줬지만, 끝이 아니었다. 살롱은 '법원은 전시회장 사용을 허락했지 우리가 사진전 홍보 등을 도와야 한다고 결정하지 않았다'며 사진전 홍보·진행을 일절 돕지 않았다. 홈페이지에서 관련 정보뿐 아니라 니콘 살롱의 위치까지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81제곱미터(약 25평)쯤인 전시관에 1대 있던 폐쇄회로(CCTV)용 카메라는 10대로 늘었고, 입구에는 금속탐지기가 설치됐다. 살롱은 직원과 변호사를 각각 세 명씩 전시회장에 상주시키며 안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전시회 첫날에는 전시회장뿐 아니라 니콘 살롱 건물 안에서 언론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그는 근처 공원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안씨는 "(니콘 살롱이) 조직적으로 전시회를 방해했고, 저와 관람객들의 인권을 침해했지만 '그래도 전시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니콘 살롱의 훼방작전은 오히려 전시회 홍보에 크게 기여했다. 안씨는 "재판까지 가는 등 이슈가 되니까 궁금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다"며 "관람객 숫자는 약 7900명이었고, 20~30대가 40%정도 차지했다"고 말했다. 상당수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일본 정부의 행태를 비판하거나 사과의 뜻을 밝히는 이들도 있었다.

"전 항상 그들에게 '일본 국민이 아니라 정부가 사죄할 일이고, 여러분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답했다. 사실 일본 국민도 철저히 피해자 아닌가. 전쟁 당시 매춘 등을 이유로 굉장히 많은 여성들이 동원됐고, 그들은 철저히 인권을 유린당했다. 또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아직도 일본이 (헌법 개정 등으로) 전쟁을 준비하는 상황이다, 당신들이 바로 알아야 한다, 한일 문제로 바라볼 게 아니다'라고도 거듭 말한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나 난징대학살, 오키나와 미군기지 등을 감추려는 이유도 전쟁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드러나면 반성해야하고, 더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일본 현지의 뜨거운 반응에도 니콘 살롱의 태도는 그대로다. 살롱은 또 한 번 '9월 13일 오사카 니콘 살롱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개최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안씨는 다시 가처분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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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임, 동원연도1934년 22세 _ 1957년 중국의 문화혁명 때 중국정부로부터 외국인거류증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을 수 있는 유일한 서류이기에 살아계시는 동안 아주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 안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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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임, 동원연도1934년 22세 _ 당시 생각만 해도 눈물이 절로 나신다며, 말씀을 하시는 중간 눈물을 훔치고 계십니다. 오랜 세월 탓에 기억력은 희미해지지만, 당시의 고통은 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 안세홍


"할머니들 살 날 기껏 5년" 그가 이 악물고 전진하는 까닭

그런데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과 언급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며 걱정이 늘었다. 안씨는 "지금도 (여러모로) 시달리고 있는데, 일본에 돌아가면 더 할 것"이라며 "정부가 뭘 하려면 처음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야 하는데, 갑자기 발언하는 게 과연 진정성이 있냐"고 반문했다. 독도 방문 등 이후 "정부가 행동한 것도 없다"며 "조금씩 이슈화하면 괜찮은데 (갑작스레 일이 커지니) 만일을 대비할 요소가 여러모로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 중 하나가 비용이다. 겹겹 프로젝트는 개인들의 후원과 자원봉사활동으로 진행 중이다. 도쿄 전시회 준비에 필요했던 2000만 원 가량의 비용 역시 시민들이 프로젝트 후원계좌로 1000엔(한국돈으로 1만 4000원 정도)씩 보낸 돈을 차곡차곡 모아 마련했다. 이날 전시회의 진행을 돕던 한 남성도 일본에서 공부 중인 한국 유학생이었다. 전시회장 한 쪽에 놓인 겹겹 프로젝트 후원 안내물을 소개하던 안씨는 "한국에서도 홍보하는데 아직 (후원금이) 하나도 안 걷혔다"며 "스폰서 좀 찾아달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8월 7일 시작한 서울 전시회가 26일 끝나면, 오는 28일 도쿄에서 세 번째 겹겹 프로젝트 사진전이 열린다. 안씨는 이후 9월 19일부터 11월 4일까지 국립대구박물관에서, 그 사이 일본 오사카와 도쿄에서도 계속 전시회를 이어간다. 올 연말부터 미국과 중국, 유럽에서도 사진전을 연 후에는 다시 중국으로 떠날 계획이다.

"이수단 할머니처럼 살아계신 분도 찾아봬야 한다. 할머니들 대부분 90대 전후로, 살 날이 5년 정도밖에 안 남으셨다. 이번에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이유다. 제 사진 한 장이 할머니들의 존재를, 그들의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올바른 역사를 알리는 작업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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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 볼 때면, 울화가 치밀어 화를 참지 못하십니다. 그 동안 누군가에게 얘기를 할 수 없었고, 들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 안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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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딸이 할머니의 생일 선물로 치마저고리를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아직 기념사진을 찍지 못했기에 사진을 찍고 싶으시다며, 옷을 갈아 입고 계십니다. ⓒ 안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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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허벌판의 옛 위안소터를 두 할머니가 걷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은 당시 서로를 의지 하며, 당시의 고통을 이겨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안세홍


#일본군 위안부 #위안부 #일본 #안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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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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