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정만 봐도 웃기는 사부(왼쪽)와 ‘버섯머리녀’ 아모(오른쪽). 사부는 이 영화에서 이소룡의 제자로 설정되어 있다. 이 영화는 이소룡에 대한 패러디면서 동시에 오마주(위대한 사람에 대해 예술로서 경의를 표하는 것)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MAGNUM
<다크 나이트 라이즈>처럼 고공 촬영으로 시작하지만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도 있다. 지상에 내려오면 '사자놀이'라는 중국의 전통놀이가 등장하고, 버섯 머리를 한 송지효 닮은꼴 아가씨(이하 아모)가 빨간 체육복 바지를 입고 나온다. 이때부터 유쾌함의 시작이다. 주성치의 영화는 대부분 코미디다. 그것도 유쾌한 코미디라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아모는 소룡(주성치)의 후배. 함께 사부 밑에서 쿵후를 배우는 사이다. 외국 방송사에서 요청해 쿵후 시범을 보이다 사자놀이 현장이 아수라장이 되고 난 뒤, 소룡은 사부에게 크게 혼난다. 쿵후 연습은 게을리하고 허구한 날 당구와 연날리기에 심취했다는 이유에서다.
주성치 영화는 기존 영화들을 패러디하는 게 기본이다. (이 영화는 특히 이소룡 영화를 패러디했다. 주성치의 극중인물 이름이 괜히 '소룡'이 아니다.) 사부의 친지가 소룡의 집에 찾아와 밥 먹는 장면에서 젓가락으로 걸신들린 듯이 먹는 소룡의 모습은 그런 패러디 정신을 여지없이 발산해준다.
어쩌면 주성치의 또 다른 명작 <식신>은 이 영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식신>에서 음식을 먹은 이들이 너무 맛있다며 사람 키보다 더 큰 고기 위를 구르는 모습과, 주성치가 시장에서 지저분해 보이는 '잡쉐면' 그릇을 거렁뱅이처럼 받아드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소룡이 쿵후를 한다며 땅을 구르는 장면과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니 말이다.
사부가 친지와 땅을 보러 가자 소룡은 당구에 빠져 있다. 한 어린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구를 잘 쳐서 상품으로 막대사탕을 받기도 한다. 주성치의 영화에는 어린이가 주성치를 빤히 쳐다보는 장면이 잘 나온다. <희극지왕>에서도 그런 장면이 있었는데, 아마도 주성치가 자신의 연기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유치뽕스러운' 연기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당구에 빠진 소룡을 찾아온 아모는 소룡을 어떻게든 정신 차리게 하려 하지만, 그는 얼빠진 행동에 열중할 뿐이다. 나중에 서로 티격태격하다 아무 생각 없이 소룡이 아모의 손을 잡자, 아모는 화가 나서 가버린다. 둘을 지켜보던 할 일 없는 어느 아저씨는 영문을 모르는 소룡에게 아모가 너를 좋아해서 화를 낸 거라고 말해준다.
▲ 아모가 자신을 좋아한다는걸 알고 ‘깜놀’하는 소룡. ⓒ MAGNUM
사실 주성치는 장동건 뺨치게 잘생겼다. 2대 8 가르마를 해도 우스꽝스럽기보다는 잘생긴 얼굴이 먼저 보일 만큼. 게다가 '부잣집 도련님' 같은 이미지에 유머까지 겸비해 세계적으로 여성팬이 꽤 많다. <도학위룡>의 성공 이후 중국과 홍콩에서 유명해져서, 이 영화의 길거리 촬영 장면에서도 행인들이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어딜 가나 눈에 띌만한 외모의 소유자가 웃기기까지 하니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뭔가 비밀을 숨긴 채 소룡이 사부의 친지와 홍콩에 가는 장면으로 진행된다. 홍콩에 가기 전 아모가 소룡에게 뭐라 말하려 하나, 소룡은 한사코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안다며 아모의 말을 듣지 않고 떠나버린다. 들으나 마나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일 줄 아는, 전형적인 '왕자병 캐릭터'인 것이다. 그런 그가 밉지 않은 걸 보니, 나도 어지간히 그를 사모하는 모양이다.
홍콩에 처음 온 소룡이 신기해하자, 여기는 어디고 저기는 어디라고 팔로 가리키며 알려주다 팔이 아파 고통스러워 하는 사부의 친지. 이런 게 주성치 영화의 미덕이다.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이어가며 보는 사람들을 웃게 한다. 이런 독특한 유머 코드는 시종일관 깨알같이 이어진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사부의 친지에게 빌린 돈을 갚으라며 찾아온 악당들과 대결할 때, 소룡은 잠든 상태다. 아무리 두들겨 패고 집어던져도 깨어나지 않고 침까지 흘리며 잔다. 그러다 알람시계가 울리자 일어나 '둥근 해가 떴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체조를 한다.
▲ 철저한 미남배우 주성치(왼쪽). 그가 손에 든 휴대전화가 눈에 띈다. ⓒ MAGNUM
물론 그가 이후 불시에 잠드는 걸 보면 아마도 기면증 환자인 듯하다. 그런 질병도 이 영화는 유쾌하게 승화시킨다. 악당들을 제대로 된 쿵후 실력으로 멋지게 제압한 소룡은 이제 그동안 쿵후 대신 빠져있었던 당구로 사부의 친지를 돕는다. 홍콩의 내기당구란 내기당구는 다 찾아다니며 우승해 그 상금을 사부의 친지에게 주는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의 갈등은 꽤 쉽게 해소된다. 여기서 황당함을 느낄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갈등이 등장하는데, 악당의 두목이 이제는 소룡 사부의 땅을 차지하려 하는 것이다. 이후 소룡은 중국의 국위 선양을 위해 사부의 땅문서가 걸린 당구대회에 출전하고 우여곡절 끝에 최종 승리한다. 해피 엔딩. 주성치 영화가 그래서 좋은 것 같다. 바보 같은 사람이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결국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 참 좋다.
워낙 옛날 영화라 첨단 기술적으로 새로운 건 별로 없다. 하지만 홍콩 영화가 지금보다 부흥기였던 시절이라(이 영화는 1991년 작이며, <첩혈쌍웅>에 출연한 이수현이 연출했다) 상업 영화로서의 볼거리와 재미난 배경음악, 무리 없는 촬영과 연출은 나쁘지 않다. 특히 중국과 홍콩의 야외촬영 장면은 당시 현지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줘 흥미롭다.
주성치는 자신을 안다. 연기를 못 하는 것도 알고(<희극지왕>에서 우정 출연한 성룡에게 주성치는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하세요?" 성룡은 대답한다. "그냥 열심히 하면 돼." 대사가 짧지만 상당히 코믹한 신이었는데, 그런 코믹한 문답 신 자체가 연기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노력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영화가 일류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 마지막 '한 큐'를 대성공시킨 소룡이 두 팔 들어 승리를 증명해보이고 있다. 잘 보면 그의 ‘마세’로 인해 당구대가 뚫려 있는데, 당구장에서는 이런 '마세'가 사실상 금지되어 있어서인지 영화로 보면 더욱 쾌감이 느껴진다. 금기에 도전하는 미학, 그것이 주성치 영화의 특징이다. ⓒ MAGNUM
그의 미덕은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 가장 빛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망가뜨리며 보여주는 그의 코믹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며, 어쩐 일인지 거부감이 크지 않다. 아마도 그런 그가 지혜롭고 겸손해 보여서인 듯하다.
<도학위룡> <신격대도> <식신> <파괴지왕> <희극지왕> <당백호점추향> <소림축구> <장강7호> 등 그가 나온다는 이유로 본 영화들이 많고, 나름 '주성치 빠돌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를 놓쳤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비록 최근 그의 모습은 나이 들었다는 생각에 서글픔도 느끼게 하지만, 장동건이 나이 들어도 장동건이듯 그 역시 주성치인 건 변함없을 것이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몇 안 되는 아시아 스타이니만큼 앞으로도 세상을 유쾌한 웃음으로 채워주는 좋은 작품들을 보여주길 기대해본다.
▲ 엔드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촬영 NG 장면들. 과거 홍콩 영화, 특히 성룡 영화에는 이런 NG 장면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다시 봐도 '추억 돋는' 장면이 아닐수 없다. ⓒ MAGN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