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의 절대 권력, 답은 나일강에 있었다

[세계문명기행 I - 나일 문명 기행②] 이집트의 고대 역사...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

등록 2012.09.04 09:40수정 2012.09.1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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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10여 년간 세계 여러 곳을 다녀 보았다. 인권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 공부의 전제로서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다. 도대체 인간은 왜 문화와 문명에 따라 달리 살아 왔는가, 그럼에도 무엇인가 유사성은 발견되지 않는가 등등의 의문을 푸는 방법으로 여행만한 것이 없었다.

이런 의문을 품고 여행을 한지라 편한 여행은 될 수 없었다. 사전에 공부를 해야 했고, 돌아 온 다음에는 무엇인가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여행은 고역이 되리라. 하지만 나는 이런 여행을 행복 중의 행복으로 여겨왔다. 앞으로 힘이 닿는 한 이런 여행은 계속되리라 믿는다.


앞으로 연재할 글들은 나의 문명기행을 정리한 것이다. 거창하게 세계문명기행기라 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저 박아무개 교수가 직접 다녀 본 곳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정도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 관심 있는 독자의 일독을 기대한다. - 기자 말

'5천 년 역사'라는 말에 주목하는 이유

세계문명사를 공부하다 보면 하나의 공통점은 주요 문명이 대체로 5천 년의 역사를 가진다는 점이다. 중국도, 메소포타미아도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5천 년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긍지의 표현과 같다. 우리도 세계문명사와 궤를 같이하는 장구한 역사를 가졌다는 의미다. 그런데 세계문명사에서 문자와 유적에 의해 그 연대가 확실히 5천 년 이상의 역사를 증명한 문명은 그리 많지 않다. 아마도 가장 확실한 문명 중 하나는 나일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일 문명은 단순한 구전과 신화의 역사가 아닌 유적과 문자로 그 확실한 연대기가 증명되기 때문이다.

나일강 유역에서 호루스의 봉사자로 통하는 파라오가 나타나 나일강 전역을 지배한 역사는 기원전 3천 년 이전으로 올라간다. 기록상 최초의 파라오는 메네스인데 그는 상하 이집트, 즉 통일 이집트의 최초의 왕으로 기록되며, 그는 장차 30 왕조라는 장구한 파라오 혈통의 초석이 된다. 메네스의 뒤를 이어 3왕국 시대가 도래한다. 3왕국 시대는 2개의 중간기를 거치는데 이 시기 파라오의 권력은 절정을 맞는다. 중간기는 이집트가 내부 분열을 겪거나 외침을 받아 파라오의 왕권이 흔들리는 시기다.

고왕국은 제3왕조부터 제6왕조까지를 말하는데, 기원전 2640년부터 2134년까지의 시기다. 이 시기 눈여겨 봐야 할 왕조는 제3왕조의 파라오 제세르다. 그는 나일 문명의 석조건축술의 시조로 회자되는 사카라의 피라미드를 건축한다. 이 당시 건축가 임호테프가 활동하는데, 그는 나일 문명에서 건축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제4왕조는 기자에 세워진 세 피라미드의 주인공들이다. 쿠푸·카프레·멘카우레 등이 군림한 왕조다.


제6왕조 이후 이집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왕국의 쇠퇴기를 맞는다. 제1중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2040년부터 1650년까지 중왕국 시대가 도래한다. 이 시기는 테베(오늘날 룩소르)가 융성하면서 황금기를 맞이한다. 멘투호테프·세소스트리스·아메넴헤트 등이 나일 문명의 번영을 가져다준 이 시기의 파라오들이다.

제6왕조가 끝나면서 또다시 중간기가 시작된다. 새로운 위기다. 이때 이방 민족인 힉소스는 이집트를 점령해 나일 삼각주에 있는 아바리스에 수도를 정한다. 그러나 곧 테베를 중심으로 해방운동이 일어나 힉소스는 쫓겨 간다. 드디어 기원전 1570년부터 신왕국이 개창돼 1070년까지 계속된다. 신왕국은 나일 문명의 꽃이라는 불리는 시대이다. 제18왕조에서 제20왕조까지 이어지는데, 제18왕조에서는 최초의 여자 파라오 하트셉수트를 비롯하여 투트모시스 3세·아멘호테프 3세·아크나톤·투탕가문 등 걸출한 파라오들이 들어선다. 이집트는 다시 통일되고 경제는 번영하며 사회도 세련됐다. 이때의 영화는 지금도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왕국에서도 도전장을 내미는 세력이 있었으니 철기문명의 시발점인 히타이트다. 이들 세력에 대하여 제19왕조의 세티1세와 람세스 2세 (기원전 1279~1212년)는 강력히 대응하는데 특히 람세스 2세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카데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는 결코 람세스 2세가 승리한 전투라고 볼 수는 없지만 람세스에게는 죽을 때까지 자랑으로 남는 전투가 된다. 나일강 이곳저곳의 유적지를 돌다 보면 지금도 여러 곳에서 카데시 전투 장면의 부조를 볼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세기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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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람세스> 겉표지 ⓒ 문학동네

람세스 2세는 치세기간 수많은 건축물을 만들고 히타이트와의 평화조약도 체결해 최고의 나일 문명을 일궈낸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여행을 마치고 소설 <람세스>(전 5권)를 읽었다. 고고학자 크리스티안 자크가 쓴 이 소설(번역 김정란)은 3200년 전 람세스 2세가 활동한 시대를 마치 어제 일처럼 그린 글이다. 람세스가 지나는 모든 곳이 지금 이집트의 최고의 유적지가 됐는데, 여행의 여운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소설을 읽다 보니 내 자신이 마치 람세스가 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기원전 672년부터 3왕국 시대가 끝나고 후기 왕조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나일 문명의 이집트는 서서히 쇠락해 간다. 기원전 6세기 중반 페르시아에는 키루스가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마침내 이집트를 압박해 온다. 페르시아는 키루스의 대를 이은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다리우스 2세 때까지 통치한다. 기원전 403년 페르시아에서 해방된 이집트는 새 파라오를 맞이하지만 기원전 343년 다시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고 왕조는 완전히 멸망한다.

이어서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한다.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더는 막강 군대를 동쪽으로 틀어 페르시아를 파죽지세로 무너뜨린다. 마침내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침공하여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병사함으로써 그 드넓은 제국을 제대로 통치 한 번 못하고 제국은 부하들에 의해 분열된다. 이집트는 대왕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파라오가 된다. 나일 문명의 본류인 이집트인에 의한 왕국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에 의한 외래 왕국인 셈이다.

바로 이 왕국의 마지막 파라오는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다. 그녀는 로마의 카이사르와 세기의 연애를 하고 그 사후에는 안토니우스와 결혼한다.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가 패전하자 독사를 이용해 스스로 자결하고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로 말미암아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끝을 맺는다. 그 이후의 역사는 로마의 역사다. 이제 이집트는 로마제국 황제의 속주에 불과한 시대를 맞게 되고 로마제국이 쇠퇴하면서 함께 쇠락해 간다. 기원후 7세기가 되면서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이집트는 이슬람 문명권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일 문명의 젖줄 나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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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에서 바라본 드넓은 나일강 풍경 ⓒ 이승철


나일강은 나일 문명의 어머니다. 이 강이 없었다면 나일문명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강은 나일 문명의 모든 것을 만들어 냈다. 신을 만들어냈고 파라오를 만들어 냈다. 때문에 나일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일강의 문명사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위키 백과사전의 설명을 빌리자면 나일강은 크게 두 개의 강, 즉 백나일(탄자니아 국경 부근에서 발원하여 빅토리아 호수로 흘러간 다음 이티오피아로 흐르는 강)과 청나일(이디오피아에서 흘러오는 또 하나의 강)이 수단에서 만나 이집트를 관통한다.

총 연장 6671킬로미터. 아마존강과 더불어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이다. 이집트는 전 국토의 95%가 사막이고 나머지가 바로 나일강 유역으로 이뤄진다. 사람이 살면서 경작을 할 수 있는 면적은 단 5%에 불과하다. 그러니 고대나 지금이나 나일강이 갖는 의미는 이집트인들에게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일강은 이집트의 젖줄이다.

고대사회에서 나일강 강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언젠가부터 통합된 사회체제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곳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도 강력한 파라오 체제를 이룬 것은 강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북동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나일강가에서 살 수밖에 없었기에 이 강의 관리는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을 것이다. 만일 상류에 사는 사람들이 강을 이용해 하류의 사람들을 괴롭힌다면 당연히 하류의 사람들은 상류와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강은 통일적인 관리를 요구한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강을 사용하면 모든 사람들이 공멸한다.

따라서 나일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안정된 사회를 위해 강력한 통치조직을 필요로 했다. 이 조직은 당연히 상·하류를 모두 통치하는 그런 조직이어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일강에서 왜 그렇게도 빨리 파라오라는 강력한 왕이 탄생한 것을 알 수 있다.

나일강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범람을 경험했다. 이것은 연중에 일어나는 정확한 자연현상이었다. 사막지대를 흐르는 강의 범람은 그것이 적정 수준이면 재앙이기 보다는 신이 준 선물이 된다. 사막지대에서 강의 범람은 주변 토지를 옥토로 만들어 풍년을 약속하는 연중행사기 때문이다. 만일 범람이 전혀 없다면 그 사막지대에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물론 범람의 정도가 지나치면 강가에 사는 사람들의 집과 신전을 파괴하니 재앙이다. 이 때문에 나일강의 범람은 당시 파라오에게는 재정 수입과 직결됐다. 범람의 수준이 적절하면 세금은 제대로 징수됐지만, 범람 수준이 낮거나 과도하면 세금을 깎아줘야만 백성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일강변의 신전에는 강의 수위를 재는 나일로미터라는 시설이 있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여러 신전에서 볼 수 있다.

나일강의 범람은 20세기에 들어 와서도 계속됐으나 그것은 20세기 초의 아스완 올드댐과 1960년대 조성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아스완 하이댐의 완공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나일강은 세계 최대의 인공 호수인 낫세르 호수에 의해 갇히게 됐고, 하류의 범람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됐다. 아스완 하이댐의 완성은 물의 생산적인 사용에 도움을 줬다. 전기를 생산해 인근 국가에까지 수출을 하는 산업역군으로서의 역할을 했고, 더 이상 강의 범람으로 인한 시설물의 피해를 보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댐의 완성은 크나 큰 문제도 야기했다. 거대한 담수호가 생김으로써 나일강 상류의 기온변화를 초래했고, 사막 기후에 습도를 높임으로써 수천 년 동안 건조 기후에서 보존되어 온 문화유적에 상당한 문제를 야기했다. 더욱 가장 치명적인 것은 나일강가에 조성된 고대 유적지가 물속으로 수장될 운명에 처했다는 사실. 뒤에서 보게 될 아부심벨 신전이 대표적이다. 물론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의 노력으로 지금도 그 신전의 위용을 볼 수 있게 됐지만,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파라오 아래서 백성이 생각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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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 ⓒ wikimedia commons

신이 없는 문명은 없다. 인류는 동서를 막론하고 신을 만들어 냈고, 이어 종교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해 동서의 차이는 분명하다. 인도와 동남아 지역을 제외한 동양의 신과 종교는 사뭇 고답적이다. 하늘을 신으로 섬겼지만 거기엔 어떤 형상이 없었다.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동양의 신은 사람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천신이 있었지만 그 모습을 아는 이는 없었다. 아니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은 일찌감치 인격신을 만들어 냈다. 사람과 유사한 인격을 갖는 신, 어떤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런 신을 만들었다. 그리스와 로마는 이런 신들의 집합소다. 그런데 이집트는 이런 신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만든 신들의 역사에서 이집트는 큰 형님 역할을 단단히 해 왔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사람들이 신들의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신전을 세울 때 이미 이집트에서는 그보다 천 년 전, 혹은 이천 년 전에 피라미드를 만들고 스핑크스를 만들며 신들의 집, 신전을 세웠으니 말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수없이 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신들 중 웬만하게 알려진 신들은 각자 지상에서 거처할 수 있는 신전이 조성됐다. 이것을 조성한 이는 신들의 대리인인 파라오였다. 신전을 세우기 위해 파라오는 시공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의 계획과 구상 속에 그의 주인인 신들에게 최고의 거처가 만들어졌다. 신전 중에서 신이 거주하는 지성소는 일반대중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오로지 파라오와 일부의 제사장들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신의 대리인인 파라오의 특권이었고, 파라오는 그 특권에 의해 백성을 다스리는 권위를 인정받았다. 파라오는 신들의 화신이었으며, 때때로 신들의 반열에서 신들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수천 년 동안 지속됐을까. 그것은 나일강이 품은 비밀이다. 나일강변에서 사는 고대인들은 항상 같은 생활을 했다. 연중 4개월은 범람의 계절이었다. 이 기간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범람기가 끝나면 또다시 4개월은 땅을 고르고 파종을 했다. 그리고 나면 다시 4개월, 이 기간은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기간이다. 이렇게 1년 365일은 정확히 돌아갔다.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파라오는 결코 민주적인 통치자가 될 수 없었다.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파라오가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라면 누가 그의 말을 듣겠는가. 그에게는 신적 권위가 필요했을 것이다. 신이 직접 내려주는 권위가 없으면 그는 수많은 백성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파라오 아래에서 사는 백성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풍요와 안전이었다. 풍요가 전제되지 못하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하기 어렵고 파라오의 압제를 견디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파라오에게도 긴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곳간이 채워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백성을 부릴 수 있었겠는가. 피라미드의 건설도 파라오의 풍성한 곳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 풍요와 안전은 신을 갖게 되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심리적 요인이었다.
#나일강 #이집트 #세계문명기행 #나일문명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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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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