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가 이 책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임승수의 인생 내비게이션 17] 진정한 여성주의자가 되는 길

등록 2012.09.06 20:53수정 2012.09.0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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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학생 시절 동녘출판사에서 나온 <여자는 왜?>라는 책을 공들여서 정독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 확인해보니 초판 1쇄 발행일이 1991년 4월 10일이네요. 꽤 오래된 책이죠. '여성 억압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서진영이라는 분이 썼습니다.


요즘에는 여성주의와 관련해서 <페미니즘의 도전>을 많이 읽는 것 같은데, 아무튼 저는 학창시절에 <여자는 왜?>를 읽고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어떤 식으로 구조적인 억압과 소외, 차별을 겪고 있는지 깨닫게 됐으니까요.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전혀 고민해보지 못했던 그런 종류의 억압들이,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성평등 의무교육도 받고 여성주의 활동가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도 생기면서 제 머릿속에 성인지적 관점이 좀 더 탄탄하게 형성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컨대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차이도 알게 되고, 그러면서 나름 여성주의적 시각을 갖추게 됐다고 자신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섣부른 자신감, 아니 자만심이 한꺼번에 날아간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이죠. 머리로 하는 여성주의와 몸으로 하는 여성주의는 그야말로 결이 달랐습니다.

우리 마누라가 그 책을 안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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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자는 왜?>와 <페미니즘의 도전> ⓒ 임승수


여성주의에 나오는 가사노동 분담이라는 개념은 결혼 전의 저에게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의 저에게는 가사노동 분담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설거지, 세탁물 개기, 화장실 변기 청소하기, 막힌 하수구 뚫기, 진공청소기 돌리기' 등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아이까지 태어나 육아노동이 추가되니 상황은 점입가경이 되었습니다. 저는 영유아는 그냥 눈 깜짝할 사이에 어린이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의 4세 이전 어린 시절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로, 영유아 시절의 지난했던 삶을 전혀 알지 못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요, 제 똥오줌은 부모님이 치워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수유도 장난이 아니더군요. 이제 막 태어난 애들은 한동안 밤중에도 세 시간마다 깨서 젖을 달라고 우렁차게 울어댑니다. 밤중수유란 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저는 크게 당황스러웠습니다. 육아노동 분담이라는 추상적 개념 역시 저에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마누라와 번갈아 밤중수유를 하고 함께 아이 목욕을 시키며, 정말 부모님께 효도는 못할망정 불효는 하면 안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게다가 세상의 절반을 대변하는 우리 '마눌님'은 일찍이 <페미니즘의 도전>을 독파하시고 다수의 여성주의 서적들도 섭렵한 무시무시한 분이죠. 왜 저들이 국가보안법처럼 구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악법을 근거로 '불온서적' 운운하며 진보적인 내용의 책들을 그렇게 핍박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우리 마누라가 <페미니즘의 도전>을 안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저 자신이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약간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억지로라도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을 분담했습니다.

"설거지를 니가 도와주는 거냐? 설거지는 니 일이야!"

그런데 저의 부실한 여성주의적 밑천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 터졌지요. 어떻게 보면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정말 나 자신을 다시 성찰하고 들여다보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강의 일정이 많이 잡혀서 피곤하고 정신이 없었던지라 설거지를 제때에 못해 많이 쌓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강연일정으로 피곤했던 저는 소파에 누워서 피로를 풀며 빈둥거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은 그분의 성대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파형의 음파가 제 고막을 다음과 같이 때렸습니다.

"왜 설거지 안 하는데? 결국 내가 했잖아!"

몸도 피곤한데 느닷없이 공격을 받으니 살짝 저항하고 싶어졌습니다. <여자는 왜?>를 읽은 자존심을 담아, 제 성대에서 상대적으로 저음이 강한 파형의 음파가 다음과 같이 튀어나왔습니다.

"요즘에 강연이 많았잖아! 피곤해서 그랬어. 솔직히 나만큼 집안일 잘 도와주는 남편이 어디 있냐? 내가 설거지 항상 도와주잖아."

솔직히 아무리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을 분담한다 하더라도 제가 하는 일은 마누라가 하는 일에 비해서는 턱도 없이 부족한 수준입니다.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지만, 그날따라 몸이 피곤해서인지 억눌러왔던 '진심(?)'이 나와 버렸습니다. 그때 부메랑처럼 돌아 온 마누라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설거지를 니가 도와주는 거냐? 설거지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니 일이야!"

완전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구나! 설거지는 내가 마누라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일이었구나!'

맞습니다. 결혼 후 함께 가사노동 분담에 대한 '대책회의'를 하면서 설거지는 제가 하기로 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설거지를 하면서도 무의식중에 나는 이렇게 마누라를 '도와주는' 착한 남편이고,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야, 라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좋은 일을 하고 봉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설거지를 하니, 결국 몸이 힘들고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황이 되자 더 이상 좋은 일과 봉사를 꺼리게 된 것이죠. 설거지는 제가 해야 하는 일, 즉 저의 의무가 아닌 것이니까요.

가사와 육아는 부부 모두에게 의무... 마누라한테 '빚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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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설거지 거리들. 내가 해야 할 일이다. ⓒ 임승수


마누라의 '니 일이야!'라는 한 마디에서 저는 여성주의의 정수를 깨달았습니다. <여자는 왜?>나 <페미니즘의 도전>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깨달을 수 없는 진짜 핵심적인 내용 말입니다.

'그래! 여성주의는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구나.'

하지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머리 돌아가는 것에 비해 몸 움직이는 것이 굼떠서 그런지 여전히 '제 할 일'을 빼먹고 마누라에게 잔소리 듣는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면목 없을 뿐입니다. 그래도 저 자신에게 달라진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이제는 진짜로 미안해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염치가 없었는데 지금은 조금은 염치란 것이 생긴 것이죠.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은 마누라뿐만 아니라 저도 해야 할 의무니까요.

이 글을 쓰는 지금 시간은 2012년 9월 6일 오후 3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습니다. 마누라는 둘째를 임신해서 입덧으로 괴로워하며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그제는 마누라가 밤중에 입덧 때문에 구토가 나와서 급히 화장실로 가다가 결국 화장실 문 주위에 1미터가 넘는 길이의 토사물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둘째를 가진 것이 기쁘기도 하지만 첫째를 낳을 때 산통으로 괴로워하던 마누라가 모습이 떠올라 한편으로 무척 미안하기도 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성별을 바꿔서 여자로 살면서 제 아내가 하는 역할을 하며 살라고 제안하면 뭐라 대답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당연한 건지 놀라운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거절하는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마누라에게는 빚진 인생입니다. 마누라, 청소기 돌린 지 오래돼서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설거지 #여성주의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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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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