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이 아프리카까지 소문났대요"

[마을의 귀환⑭] 부산 감천문화마을, '슬럼' 딛고 도시재생 상징으로

등록 2012.09.22 20:17수정 2012.09.2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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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계의 희망은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뤄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책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함께 '집밥'을 먹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는 것부터, 아이를 같이 키우고 일자리를 나누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까지. 반세기 전 간디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다양한 마을만들기 사례를 통해 마을이 왜 희망인지 살펴봅니다. 이번에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갑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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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 감천문화마을은 민관 공동으로 지역발전을 이룬 모범도시로 인정받아 '2012년 아시아도시경관상’을 수상했다. 아시아도시경관상은 타 도시의 모범이 될 만한 우수한 성과를 올린 도시, 지역, 사업 등에 국제연합인간거주위원회(UN-HABITAT)와 아시아경관디자인학회 주관으로 지난 2010년부터 매년 수여되고 있다. ⓒ 정민규


한국전쟁 당시 야밤에 부산항에 도착한 군인들은 크게 놀랐다. 이름조차 생소한 부산이란 도시에는 고층빌딩이 즐비했고 그 야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들은 다시 한번 놀란다. 그 휘황찬란했던 야경이 실은 산등성이의 빼곡한 판잣집들이 내뿜던 불빛이란 사실에.

지금도 부산의 어르신들은 이런 이야기를 추억삼아 하곤 한다. 전쟁통에 도시의 수용능력을 넘어서 몰려든 사람들은 닥치는대로 집을 짓었다. 그렇게 부산은 아기신발을 구겨 신은 어른의 발 마냥 어색한 도시가 됐다. 도시는 난개발의 표본이라 불러도 좋았고 재개발을 해야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리고 재개발은 자고로 아파트가 모범답안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마을공동체에서 도시재생의 답을 찾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이 그 대표적 사례다.

부산 감천마을에는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가 구부러진 골목길 마냥 얽혀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몰려든 피난민과 판잣집은 감천마을의 외형을 불려놓았다. 사람들은 비탈을 깎아 집을 짓고 그 집들 사이로 골목길이 만들었다. 때문에 지금도 마을의 골목길은 비좁고, 가파르다.

마을로 가는 길도 쉽지 않다. 감천마을로 가기 위해선 치솟은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 자동차 엑셀레이터를 묵묵히 밟고 고불고불한 길을 오르고 있으면 엔진이 신음소리를 낸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은 편이다. 도심에서 가까운데도 1964년에야 마을 초입에 겨우 포장도로가 깔렸다.

가파른 오르막길만큼이나 이곳 사람들의 삶도 숨이 가빴다. 전쟁 후 모두가 가난했지만 유난히 가난했던 마을에는 고물장수와 넝마주이, 엿장수들이 모여 살았다. 산업화를 거치면서는 이곳을 '슬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럴수록 마을은 쇠락해갔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재개발 소리가 나왔고, 동의서가 돌기 시작했다. 마을은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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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4일 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에 아프리카 우간다 공무원 20명 방문해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의 성과와 관광명소화 마케팅 방법 탐구를 목적으로 골목길 투어를 하고 있다. 19일에는 탄자니아의 지방고위공무원 15명이 사하구청과 감천문화마을을 찾아 낙후된 도시에 대한 창조적 시각과 재생방법 등을 벤치마킹했다. ⓒ 사하구


그런데 생각치 못했던 변화가 찾아왔다. 고불고불한 길과 다닥다닥 붙은 집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페루의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닮았다해서 이곳을 한국의 마추픽추라고 불렀다. 또 누구는 그리스의 관광지 '산토리니'가 이곳과 비슷하다며 '한국의 산토리니'라는 별명을 붙였다.


집들이 장난감 '레고' 블럭 같다고 해서 '레고마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2010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이 마을을 관광협력사업으로 선정했다. 동시에 마을사람들도 어리둥절했던 변화가 시작됐다.

젊은 예술가들이 마을로 찾아와서 상막했던 시멘트 돌담에 벽화를 채워 넣었다. 올망졸망한 집들 사이에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카페와 갤러리가 둥지를 틀었다. 이제 감천마을을 마추픽추나 산토리니가 아닌 감천문화마을로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아프리카에선 고위공무원 보내 도시 재생 노하우 배워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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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1일 문을 연 감천문화마을의 커뮤니티센터 '감내어울터'는 원래 오래된 목욕탕 건물이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이 건물은 욕탕과 사우나실, 수도꼭지 등 기존 공중목욕탕 시설물을 대부분 다시 활용해 리모델링했다. 지금 감내어울터는 주민들을 위한 강좌와 영화상영장, 모임방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 정민규


마을이 유명세를 타면서 3만명이 넘는 방문객이 해마다 이곳을 찾고있다. 지난 7월에는 유네스코 국제워크캠프에 참가한 10개국의 청년들이 이 마을을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와 우간다 등지에서는 고위공무원들을 보내 이 마을에서 도시 재생의 노하우를 배워가기도 했다. 이제 이곳은 50년 전 그때의 이 마을만큼이나 가난한 국가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  

지난 8월 유엔인간거주위원회(UN-HABITAT)와 아시아경관디자인학회는 감천문화마을에 아시아도시경관상을 수여하기로했다. 각국별로 도시 미관과 편의성 등에서 모델이 될 만한 도시·지역·사업 부문 가운데 한 곳을 선정해 수여하는 상을 감천문화마을이 받게 된 것이다.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 감천문화마을에서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창간한 '감천문화마을신문'이 그 변화의 시도이다. 신문은 마을주민들이 기자가 되고 마을의 이야기를 전하는 초밀착 지역전문지다. 학벌, 나이, 성별에 전혀 구애를 두지 않고 뽑은 20대에서 70대까지의 주민기자들이 발품으로 신문을 만든다. 모두 주민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제 발로 찾아온 사람들이다.

생업과 병행하는 비전문 기자들이 만드는 신문이라고 얕보면 큰코다친다. 4000부가 제작되는 신문은 모든 마을 내 가정으로 배달된다. 100% 열독률은 그 어떤 메이저 신문도 따라잡지 못한다. 신문에는 '감천 2동 문화마을 입구에서 한 이백미터쯤 들어가면' 있는 조그만 칼국수 집에서부터 마을주민들 중 오디션을 거쳐 선발된 '산복합창단 운영'에 관한 이야기까지 깨알같은 소식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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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16일에는 감천문화마을 감내어울터에서 산복마을합창단 오디션이 열렸다. 선발된 주민들은 12월까지 교육을 받고 본격 활동에 들어간다. ⓒ 사하구


매월 나오는 신문 제작을 앞두고 마지막 편집회의가 열린 18일 저녁, 10여 명의 주민들이 마을의 사랑방격인 '감내어울터'에 모였다. 특히 이날은 감천문화마을신문 주민기자들의 주민기자증이 나오는 날이기도 했다.

기자증을 받아든 주민기자들이 주민을 대표하는 기자단으로의 사명감에 빠진 것도 잠시, 최고령 손판암(74) 할아버지가 "근데 명함은 안 줄끼기가?" 하는 볼멘소리를 했다. 손 할아버지는 "명함을 안 주면 기자증을 반납하겠다"는 은근한 협박으로 주민기자단장인 심상보씨에게 명함 제공 약속을 얻어냈다. 

주민들의 능동적 참여로 점차 진화... 단발성 아닌 꾸준한 연구가 비결

이어진 편집회의에서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주요쟁점은 마을에서 3000원에 식사를 제공하는 착한 식당이 있는데 여길 소개하면 옆집들이 '삐치지' 않겠냐는 것. 결국 지역 상권의 상생을 위해 사진에서 간판은 잘라내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딸 이름으로 기사를 써온 한 기자는 "딸 이름으로 대신 쓴 것 아니냐"는 강한 의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U-턴을 아는 초등학생이 어디 있느냐"는 다른 기자들의 의혹제기에 자신의 딸은 똑똑해서 다 안다던 이 기자는 결국 "내가 썼다, 우짤래?" 하는 발군의 적반하장으로 다른 주민기자들을 무력화시켰다.

아직 이번 달 신문도 나오지 않았는데 다음 달 신문의 기획 아이템도 넘쳐났다. 꽃을 아름답게 가꾸는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겠다는 기자가 있었고, 많은 주민들이 졸업한 감천초등학교 소식도 실어야겠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추석이 다가온 만큼 외지에서 찾아오는 자식들의 인터뷰도 해보자는 '추석 특집 기획'도 논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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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문화마을신문 손판암 주민기자가 이명희 동서대 교수와 마주앉아 신문 편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감천문화마을신문을 매달 한차례 발행된다. ⓒ 정민규


주민기자들은 신문에 더 많은 마을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생각이다. 지금은 17명이 활동하는 기자단에 2기 기자단을 추가 모집해 규모도 키워나갈 예정이다. 이런 식으로 감천문화마을은 관청이나 외부에서 주도하던 기존의 마을 살리기를 뛰어넘어 주민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해가는 공동체로 발전해가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감천문화마을이 이런 변화를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성천(81) 감천문화마을협의회장은 "처음에는 돈 몇푼 안되는 작품 세운다고 주민들 반응이 좋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불평도 있어고 반대도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를 해결해준 것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가자 사람들은 마을의 변화된 모습에 하나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지금은 100%는 아니더라도 80%는 만족할 것"이라며 웃었다. 이를 위해 마을협의회는 마을사람들을 모아서 토론의 자리도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마을협의회는 그동안의 성과를 알렸고 주민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밝혔다. 김 회장은 "좋은 의견을 청취해서 함께 가는 길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며 토론의 성과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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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발행되는 <감천문화마을신문> 주민기자들이 직접 취재해 만드는 기사에는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가득하다. ⓒ 정민규


김 회장은 "최근에는 주민들이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갈고닦은 솜씨로 요리대회를 열어 좋은 음식이 만들어지면 동네 브랜드로 발전시켜 나갈 생각이다. 오는 10월말에는 마을축제도 열 계획이다. 이외에도 마을사람들이 하고싶은 일은 끝이 없다. 김 회장은 "언제까지라고 정해놓고 마칠 사업이 없다"며 "계속 추진해야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신문 발행을 돕고 있는 이명희 동서대 교수(영상디자인학)는 감천문화마을의 시작을 함께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학교에서 잘리겠다"는 엄살을 떨만큼 감천문화마을을 자주 드나들고있다. 대학원생들의 논문 연구에도 감천문화마을의 사례를 적극 이용할 정도다.

이 교수가 밝히는 감천문화마을의 저력은 꾸준한 연구이다. 한두 번 행사 치르듯이 끝나는 마을살리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마을에 대한 현황조사와 연구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었다.

이 교수는 "감천문화마을은 너무 개발에 치우친 지금의 개발보다는 보존과 함께 개발을 해나가자는 대안"이라며 "감천문화마을이 새로운 마을 운동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을공동체 #감천문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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