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서 '농사'짓는 '강북 대치동' 주민들

[마을의 귀환⑮] '텃밭부터 마을기업까지'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

등록 2012.09.25 14:13수정 2012.09.2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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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계의 희망은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뤄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책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2012년, '콘크리트 디스토피아' 서울 곳곳에서는 '마을공동체 만들기'가 한창입니다. 함께 '집밥'을 먹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는 것부터, 아이를 같이 키우고 일자리를 나누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까지. 반세기 전 간디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다양한 마을만들기 사례를 통해 마을이 왜 희망인지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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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서울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주민들이 직접 제조한 EM 발효액을 장터에 팔기 위해 포장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 40~60대 '아줌마' 5명이 아파트 둘러 앉아 노란빛이 나는 액체가 들어있는 투명용기에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스티커에는 액체 사용법이 적혀있다.

1. 부엌에서 발효액(50%)+세제(50%)사용
2. 세탁기 : 발효액 150~300cc 정도 넣어 한두 시간~하룻밤 담가 넣은 후 세탁(세제양 반 정도 사용)
3. 가정정원에서 발효액 500배 희석하여 물주기
4. 화장실 변기에 발효액 100배 희석하여 청소
5. 발효액을 10~100배 희석하여 냉장고 청소, 세차, 유리 닦기에 사용 
...(이후 생략)...

정체불명의 액체는 바로 EM 발효액. EM은 유용한 미생물(Effective Micro-organisms)이라는 뜻의 '친환경 미생물'이다.

놀라운 것은 이 EM 발효액을 관리사무소 지하 기관실에서 주민들이 직접 제조했다는 점.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 입주자대표자회의·부녀회가 주축이 되어 지난해에는 마을기업도 만들었다. 마을기업의 이름은 ㈜청구이엠환경.

음식물 쓰레기 하루 1톤, 아파트 자체적으로 퇴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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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서울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에서 송영분 부녀회장과 주민이 아파트 내 화단에 직접 심은 가지와 상추 등 채소를 수확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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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서울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 옥상에서 송영분 부녀회장이 도시텃밭을 만들어 친환경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 유성호


시작은 '음식물 쓰레기'였다. 부녀회 부회장 심상숙(48)씨는 아파트 주차장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장을 가리켰다. 지붕과 벽돌담으로 된 쓰레기장에는 페달을 누르면 뚜껑이 열리는 커다란 음식물 쓰레기통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처음 집을 보러 왔더니 각 집마다 바깥에 음식물 쓰레기통이 나와 있는데 냄새도 나고 보기에도 안 좋았어요. 부녀회에서 뭘 할까 고민하다가, 음식물 쓰레기장을 설치하기로 했어요. 부녀회원 4명이 며칠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아파트는 어떤지 사진을 찍었어요. 부천까지 갔다 왔다니까요."


그런데 9개 동, 780세대의 음식물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았는데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악취 제거 효과가 있는 EM 발효액을 뿌렸기 때문이다. 기관실에 있는 EM 발효액 제조기에 EM 원액, 물, 설탕, 쌀겨 등을 넣어 발효액을 만든다. 이렇게 생산된 발효액은 매달 열리는 마을 장터에서 1병당 1000원에 팔거나, 노원구청에 납품해 인근에 있는 당현천에 뿌려져 하천을 정화한다. 장애인 자활단체와 연계해 세탁비누를 만들기도 한다. 

또 하나, 청구3차아파트에서는 음식물 쓰레기와 EM 발효액을 섞어 퇴비를 만들고 있다. 아파트 한켠에 퇴비를 만드는 시설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하루 동안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는 약 1톤. 음식물 쓰레기 '선순환 구조'가 마련되면서 월 117만 원이 들던 음식물 수거·처리 비용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친환경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변영수(58) 입주자 대표회장은 "음식물 쓰레기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EM을 알게 되었고 제주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EM을 어떻게 활용할지 배웠다"고 말했다. 제주도에는 EM 환경센터가 있다. 부녀회원들도 자비를 들여 제주도에 '견학'을 다녀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퇴비는 결연을 맺고 있는 농가에 보내진다.

관리사무실을 '문화센터'로, '엄마'들이 관리하는 '마을독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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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서울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 관리사무소 3층에 위치한 '입주민 독서실'에서 이날 독서실 실장으로 자원봉사로 나온 최승란씨가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열람실을 둘러보고 있다. ⓒ 유성호


58.8%. 서울시 주택 유형 가운데 아파트 비율이다(2011 서울통계연보). 2010년 기준, 아파트 거주 가구는 143만 9259가구로 전체 가구의 41.1%를 차지한다. 단독주택(37.2%), 연립·다세대 주택(16.6%)이 그 뒤를 잇는다. 서울시가 지난 11일 내놓은 '마을공동체 5개년 기본계획'에서 '아파트 공동체'가 강조된 것은 이 때문이다. 서울시는 오는 2017년까지 1080개의 아파트 공동체 활성화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콘크리트 숲' 아파트가 '마을'이 될 수 있을까. 수십 년을 '월급쟁이'로 살던 변영수 회장은 2008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입주자 대표회장을 맡았다. 10년 넘게 살면서도 출퇴근만 했던 아파트였다. 그러면서 통장에 있는 돈을 털어 아파트 공동체 문화 연구소를 차렸다. '아파트 공동체 실험'의 시작이었다. 변 회장은 "일본에 있는 맨션을 한국에서 관리하는 일을 했었는데 이론만 아는 게 아니라, 실제로 뭔가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2년, 변 회장은 ㈜청구이엠환경 대표이자 '아파트 공동체 만들기' 대표강사가 되었다. 청구3차아파트는 아파트 공동체 성공 사례로 꼽힌다.

청구3차아파트가 있는 중계동은 '강북의 대치동'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명문' 학교와 학원이 밀집해있어 '강북 8학군'이라는 별칭도 있다. 고등학교 3학년,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 세 아이를 둔 심상숙씨 역시 아이 학교 때문에 5년 전 이곳으로 이사 왔다. 청구3차아파트 주민의 75%가 심씨처럼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자녀를 가진 학부모다. 자가 소유주 비율은 70% 이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편이다.

20일 오전, 부녀회장 송영분(62)씨, 부회장 심상숙씨, 총무 유미옥(47)씨 등이 EM 발효액에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동안, 관리사무소 2층 '문화센터'에서는 요리 수업이 한창이었다. 오전 10시부터 주민들이 하나 둘 들어오더니 10여 명이 모였다. 30~40대 주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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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서울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열린 문화센터 요리 수업에 참가한 주민들이 직접 만든 요리를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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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서울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열린 문화센터 요리 수업에 참가한 주민들이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며 스시 요리를 배우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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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서울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열린 문화센터 수업에 참가한 주민들이 전문가 지도를 받으며 요가를 배우고 있다. ⓒ 유성호


오늘의 요리는 '스시'. 앞치마를 입고 레시피 용지를 받아든 주민들은 공부하듯 요리법을 꼼꼼하게 메모한다. 강사는 외부에서 초빙했다. 수강료는 한 달에 1만 원 정도. 요리의 경우, 별도의 재료비를 내야 한다. 스시에 들어갈 밥을 짓는 동안 주부들은 이야기꽃을 피운다.

1995년 아파트 준공 이후, 관리사무소 2층은 주로 관리사무실 용도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2008년 현 입주자대표회의와 부녀회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요리뿐만 아니라 요가, 바둑, 보드게임, 도자기 공예 등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수시로 모임도 열린다. 부녀회 감사를 맡고 있는 박경실(42)씨는 "다른 아파트에서도 살아봤지만 이렇게 커뮤니티 활동이 잘 되는 아파트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공동체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는 입주자대표회의와 부녀회의 팀워크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변영수 회장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지르는" 스타일이라면, 부녀회는 때로는 '협조자', 때로는 '견제자'로서 꼼꼼하게 일을 진행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 의견 수렴. 변영수 회장은 "주민들이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입주자 대표회의, 부녀회, 관리사무소가 하나 하나 바꿔나갔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성과가 관리사무소 3층에 위치해 있는 '입주민 독서실'이다. 주민 82%의 동의를 얻어 2009년 6월 문을 열었다. 50평 공간에 7개 열람실, 83개의 좌석이 있다. 한 달 회비는 7만 원, 사설 독서실비가 15만 원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저렴한 편이다. 심상숙씨는 마을기업 일과 함께 독서실 관리 총괄도 맡고 있다. 

"독서실은 4년 전에 제가 처음 만들자고 그랬어요. 부녀회 부회장을 처음 맡고 나서 뭘 할까 하다가, 거창한 게 아니라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생각했어요. 그 때 큰 아이가 중학생이었는데 아파트 밖에 있는 사설독서실에 보내니까 딸아이가 밤에 오는 게 무섭잖아요. 제가 데리러 가게 되는 거예요. 아파트 3층에 입주자대표 회의실이랑 서당이 있었는데 그 공간을 활용하자고 했어요. 주민들이 정말 좋아해요. 3년 동안 한 번도 자리가 빈 적이 없어요. 평균대기자가 40~50명이에요."

독서실 관리는 주민들 5명이 돌아가면서 맡는다. "내 아이 같다 보니"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게 된단다. 심씨는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독서실 총무'가 된다. 독서실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다. 교육열이 높은 지역적 특성 탓에 독서실은 추석 연휴 하루, 설 연휴 하루. 일 년에 이틀만 쉰다.

도라지, 고사리, 흑미, 깨... 아파트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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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서울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에서 변영수 입주자 대표회장이 아파트 지하에 모아둔 빗물을 이용해 아파트 내 화단 텃밭에 물을 주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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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서울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아파트 지하실에서 변영수 입주자 대표회장이 아파트 내 화단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해 마련한 빗물 저장고를 보여주고 있다. ⓒ 유성호


아파트 곳곳에 꾸려진 '마을 텃밭'도 아파트의 자랑거리다. 송영분씨는 이날 집을 나서면서 가위를 챙겨 나왔다. 아파트 단지 화단에 심어 놓은 가지를 따기 위해서다. 반질반질 빛이 나는 보라색 가지 옆 상자 텃밭에 심어진 초록 잎의 배추가 한 눈에 보기에도 실하다. 송씨는 연신 싱글 벙글이다.

"이게 한약 먹은 배추예요. 한약 찌꺼기를 거름으로 줬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잘 자란 거예요."

유미옥씨는 아파트 난간에 고추 텃밭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고추가) 안 열리는 거예요. 그런데 난간에 내놨더니 주렁, 주렁, 주렁, 열리는 거예요. 신기해 죽겠어. 너무 예뻐."

도라지, 고사리, 흑미, 깨, 고추, 고구마, 땅콩, 토마토... 아파트 유휴공간에 심어진 작물들이다. EM 발효액을 섞어 만든 퇴비를 뿌리고, 빗물 탱크를 설치해 모아 둔 물로 '농사'를 짓는다. 옥상에도 텃밭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도시농업'이다. 변영수 회장은 "아파트 봉사단을 만들어서 단지 아이들과 함께 고구마를 심었다"면서 "추석 지나고 아이들 중간고사 끝나고 나면 고구마 수확해서 고구마도 구워먹고, 고기도 구워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 회장은 "우리 아파트 이야기를 하면 '너희가 특별한 것 아니냐'고 하는데 전혀 아니다"라면서 "주민들의 역량을 키우고 의사를 결집하면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을의 귀환 #아파트 공동체 #청구3차아파트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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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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