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방 숨소리에 샤워소리까지... 그래도 참았습니다

[공모-나는 세입자다] 단칸방 살며 희망 만든 14년 전... 1990년대 '잔혹동화'

등록 2012.10.02 11:50수정 2012.10.0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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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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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살았던 월세방을 최근에 찾았다.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개조했다지만 그래도 곧 쓰러질 듯 누추하기만 하다, ⓒ 김학용


1998년 6월. 연애 중이던 여자친구가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결혼을 1년 앞두고 남은 기간 동안 이것저것 준비하면 될 줄 알았는데 진지하게 논의하기도 전에 결혼 날짜부터 잡게 됐다. 재산도 없고 자리도 잡지 못했지만 아내는 나 하나만 보고 따라나섰다.


기본적으로 전셋집부터는 시작하고 싶었지만 당장 전세금을 마련할 능력도 없고 또 빚으로 인생을 시작하기는 싫었다. 게다가 아내가 해온 혼수와 예단도 '혼전임신'이 전부였다. 무조건 저렴한 월세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이리저리 알아봤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수중에 가진 돈은 200만 원이 전부. 이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은 집이 아니라 방이었고, 그것도 단칸방이었다. 겨우겨우 찾아낸 곳은 걸어다니기에도 비좁은 음침한 골목을 따라 허름한 단칸방들이 다닥다닥 모여있는 오래된 시골집이었다. 이불장 하나 넣고 두 사람이 누우면 더는 공간이 없을 정도로 좁은 방이었지만, 주인아주머니는 "보증금 100만 원으로 어디 가서 이런 방 한 칸을 얻겠어, 월세는 10만 원인데 1년치를 한꺼번에 줘야 해!"라며 위세부터 부린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차피 둘이 사는 건데 좀 좁으면 어때. 부지런히 모아서 넓혀가면 되는거지~! 귀한 인연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렇게 살면서 차근차근 이뤄가면 금슬도 더 좋아지고 백년해로 하지 않겠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비록 셋방 신세이긴 해도, 우리에게 이곳은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내 집'이 아닌가.

하지만 굳게 마음먹었던 다짐은 어느새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열악한 주거환경에 사람이 점점 변해가는 이 슬픈 현실, 1990년대 '잔혹동화'가 따로 없었다. 바깥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면 사람 2명이 겨우 비켜 지나갈 수 있는 화단이 있고 1호실이라고 쓰인 미닫이 문을 열면 조그만 부엌과 1.5평짜리 방이다.

다행히 부엌은 방 일부를 개조해 따로 썼다. 천장이 낮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십중팔구는 머리에 혹이 나기 일쑤였다. 세면장은 천정만 슬레이트로 대충 막아 비만 오면 물폭탄은 예사였다.


보증금 100만 원짜리 단칸방... '잔혹동화'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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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살았던 월세방을 최근에 찾았다.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개조했다지만 그래도 곧 쓰러질 듯 누추하기만 하다, ⓒ 김학용


더욱 가관인 것은 이렇게 개조된 세면장은 옆방과 보일러와 기름통으로 막아놓은 것이 전부여서 샤워하는 소리는 물론 '쉬' 하는 소리까지 다 들릴 판이었다. 속수무책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옆방이 여대생 자매가 사는 방이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옆방 사람 숨소리까지 다 들렸다. 아침이면 재래식의 '푸세식' 화장실에 아침이면 휴지를 손에 들고 화장실에 줄을 서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래도 참았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실망이 더 아플까봐.

어느 날, 퇴근하니 왠지 아내의 표정이 어색하고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다. 밥상을 차리며 아내는 별로 밥 생각이 없어서 안 먹는단다. 당신이나 많이 들라고 하는 아내에게 빨리 대답하라고 채근했다.

"응…. 주인아주머니한테 한 소리 들어서 조금 속상했는데… 근데, 지금은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밥이나 먹어, 어서…."

알고 보니 또 집주인의 이상한 계산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상냥하기 그지 없던 주인아주머니는 돈 문제, 특히 공과금에 관해서는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기 일쑤였다. 공과금 한 번 밀린 적 없이, 때 맞춰 군말 없이 준 아내는 세입자 입장에서 공평하게 적용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오늘도 여지없이 묵살당했으리라.

계량기가 하나밖에 없는 것을 악용, 주인집에서 일방적으로 계산한 살인적인 수도세와 전기세가 '내일까지 주기바람'이라는 경고성 쪽지로 나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태어날 어린 생명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아냈다.

임신의 기쁨도 잠시, 4개월로 접어들면서 입덧이 부쩍 심해졌다. 견디기 힘든 입덧과 푸세식 화장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긴 변비로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니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시달리는 아내를 바라보며 그저 "자기야, 미안하다"라고 한마디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였다. "무슨 소리, 난 당신만 있으면 돼~"라며 안기는 아내를 위해 웃어 보이는 나,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출산이 가까워오자 아내를 그 험한 곳에 남겨놓고 회사에 출근해 편히 보내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산후조리와 육아를 이런 곳에서 하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인근 주공아파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가장 큰 우선순위는 전세금 액수.

알아보니 가장 적은 평수(9평, 29㎡)로 1000만 원이면 올 전세가 가능했다. 중산층을 대변하는 상징인 아파트에 입주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욕실 딸린 아파트 진입이야말로 지금에 비하면 '호강'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퇴직금을 미리 정산하고 대출을 하고 현금서비스에 친구들에게 이리저리 융통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전세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일사천리로 계약한 9평 아파트... 아내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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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전세로 얻은 9평(29㎡) 주공아파트.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욕실 딸린 아파트 진입이야말로 단칸방에 비하면 '호강' 아니겠는가? ⓒ 김학용


출산일이 임박해왔지만 나는 이사만큼은 철저히 숨기고 '신비주의'로 일관했다. 출산 이틀 후, 살며서 병원에서 빠져나온 나는 이사도 혼자서 했다. 살림이 그리 많지 않으니 혼자서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햇볕도 들지 않는 단칸방에서 새 집으로 이삿짐을 옮기자니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쁨에 미칠 것만 같았다. 산후조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아내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 다르다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새로 계약한 아파트에 도착해서야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단칸방에서 견딘 5개월. 아내의 두 눈에서는 그 시간만큼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전셋집으로 옮긴 첫날 밤, 잠 못 이루던 아내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자기,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나랑 함께해줘서 고마워요"라고 속삭였다. 그 순간,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아내에게서 처음으로 소녀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만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사랑해"라는 말보다 훨씬 아름답고 감동적인 말, "나랑 함께해줘서 고마워"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말을 배웠다.

그대 곧 결혼하는가? 신혼집은 구입했는가? 아직 셋방살이의 설움에서 벗어 나지 못한 신혼부부들이여, 너무 낙심 마시라. 지금 사랑하는 이과 함께하는 그대, 그래도 '하우스푸어'보다는 낫지 않은가?

꽃은 저마다 피는 계절이 다르다. 개나리는 개나리대로, 동백은 동백대로 꽃들은 저렇게 만개의 시기를 잘 알고 있는데 왜 그대들은 하나같이 초봄에 피어나지 못해 안달인가?

그대, 좌절했는가? 친구들은 승승장구 하고 있는데, 그대만 잉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잊지 마라.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줄임) 다소 늦더라도 그대의 계절이 오면 여느 꽃 못지 않은 화려한 기개를 뽐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계절을 준비하라
-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중에서
덧붙이는 글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입니다.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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