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놀러가면 술 마시고 노래방...구로에서는?

[마을의 귀환19] 2030 청년들의 마을 프로젝트 '구로는예술대학'

등록 2012.10.25 19:20수정 2012.10.2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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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계의 희망은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뤄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책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2012년, '콘크리트 디스토피아' 서울 곳곳에서는 '마을공동체 만들기'가 한창입니다. 함께 '집밥'을 먹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는 것부터, 아이를 같이 키우고 일자리를 나누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까지. 반세기 전 간디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다양한 마을만들기 사례를 통해 마을이 왜 희망인지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13일 오후 '구로커'는 서울 구로구 구로동 일대의 구로시장 곳곳을 누비며 마을의 보물을 찾아 나섰다. ⓒ 강민수


'구로는예술대학'이 있다. 이름만 들으면 서양화, 바이올린, 성악 등 예술을 배우는 학교 같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구로를 위한, 구로에 의한, 구로만을 위한 학교다. 성적순으로 합격과 불합격을 나누지 않는다. 엉덩이가 무거워 구로에서 진득하게 붙어 있을 사람, 문화예술을 매개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사람, '구로스타일'이 뭔지 제대로 보여줄 사람이 이 대학에 들어올 수 있다.

강의실은 서울 구로구 전체다. 눈부신 건물이 있고 푸른 잔디가 깔린 캠퍼스는 없다. 매일 무심코 지나가는 재래시장, 지하철역이 강의실이다. 배움이 있는 공간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간다.

교수진도 독특하다. 장어집 사장이 룸바 교실을 열고 마을의 할머니가 '밥상머리 교육'을 벌인다. 우리 주변에 늘 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보통 사람들이 교수로 초빙된다. 청년과 함께 삶의 지혜를 나눌 마을 사람, 모두가 교수가 될 수 있다.

'구로는예술대학' 아이들은 뭘 공부하나

전공은 '마을만들기학과' 하나다. 마을의 익숙한 공간을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고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학생은 '술래'로 불린다. 지역에 숨은 일거리, 놀거리를 찾아다니는 아이들을 뜻한다. 술래는 초빙된 교수의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구로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는 게 과제다. 꼭꼭 숨은 보물찾는 술래처럼 구로구 곳곳을 찾아 나선다.

구로는예술대학에서는 매주 두 차례 20여 명의 술래가 3, 4명씩 팀을 꾸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술래는 구로에 대한 애착은 물론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진 스무살 대학생에서부터 백수, 30대 직장인도 있다. 현재 '동네에서 간지나게 놀기 프로젝트', 구로커를 비롯해 구로의 고등학생들과 힙합 댄스로 관계를 만드는 '구로는예술고등학교', 구로만의 영화를 찍는 '김뽕과 아이들', '참새공방', '토요일 밤의 열기', '아웃사이더아트' 등 6개 팀을 꾸려 마을만들기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10년 4월 설립된 구로는예술대학은 비영리 문화·예술 법인인 구로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구로는예술대학은 구로 지역의 시민축제, 마을장터 등 커뮤니티형 축제를 기획·진행할 수 있는 청년 인력풀 구축을 목표로 한다. 또 마을 주민이 주민을 가르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이 과정에서 주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지난 10일 구로는예술대학의 술래들이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 구로아트밸리에 모여 각자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을 공유하고 있다. ⓒ 강민수


구로의 일거리, 놀거리 찾아 혈안이 된 청년들

"대박이야, 붕어빵이 8개에 천원! 천원에 붕어빵 몇 마리 주느냐에 따라 그 동네 사는 걸 알 수 있어. 홍대에 가면 천원에 3개 준다구"

지난 13일 오후 구로시장에 구로커가 떴다. '구로커'는 뉴요커(Newyorker), 서울러(Seouler)처럼 세련된 대도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말이지만, 이름처럼 초고층 빌딩에서 진한 아메리카노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구로커인 슉슉(신미숙, 31), 금홍(윤혜원, 25), 썸머(노아름, 20)는 전통시장인 구로시장에 '마실' 나갔다. 구로커는 구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놀거리를 찾는다. 슉슉은 "서울의 다른 재래시장은 아케이드(지붕)로 막혀 있어서 답답하다"며 "구로시장은 확 트여서 '6시 내 고향'에 나오는 시골스러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구로시장에서 '간지'나는 것을 찾기 위해 혈안이다. 흔히 '간지난다'고 하면 세련, 심플, 아우라 같은 단어가 연상되지만 이들의 시선은 독특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선지 앞에서 눈이 휘둥그레진다. 20kg 쌀 포대가 빽빽하게 쌓여 있는 모습도 신기한 광경이다.

15년 째 구로에 사는 썸머, 구로에서 4년 째 직장을 다니는 슉슉, '청년 백수' 금홍은 문화와 예술로 구로의 일거리, 놀거리를 찾기 위해 이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술집, 노래방, 영화관, 커피숍 등 천편일률적인 놀거리와는 결별하고 싶어한다. 소비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시의 거리에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정을 나누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있다.

구로는예술대학의 구로커, 슉슉(신미숙, 31), 금홍(윤혜원, 25), 썸머(노아름, 20)가 13일 오후 구로시장의 달성기름집을 찾아 마실 나온 지역 주민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다. ⓒ 강민수


구로커는 먼저 구로시장의 '달성기름집'을 찾았다. 가게 안에 들어가니 들깨 볶는 냄새가 가득했다. 여영호(55) 사장은 호기심 가득한 구로커에게 참기름을 짜는 원리를 설명했다. 재래시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참기름의 탄생 과정이다.

"막 가져온 참깨를 기계에 볶아요. 조금 열을 가해서 고소한 냄새가 날 때까지. 그리고 참깨를 식히는 기계에 넣은 다음 기름 짜는 압축 기계에 넣죠. 참깨 한 되를 넣으면 소주병 한 병 분량의 참기름이 나와요. 마트에서 사는 참기름이 아니라 기계에서 뽑아내는 참기름이 진짜 참이죠."

"자식 같은 청년하고 말을 섞은 게 언제인지 몰라"

기름집 앞의 공터에서 마실 나온 인근 주민들도 만났다. 구로커는 황명자(49), 이진용(49), 이선용(53)씨와 구로시장의 유명한 맛집은 어디인지, 분위기 좋은 찻집은 어디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인근 떡집에서 얻은 송편과 기름집에서 내온 홍차가 흥을 돋우었다.

이종운(72) 구로시장 상인회장도 나섰다. 이 회장은 구로커에게 구로시장의 역사를 설명했다. 구로시장은 한국사회가 산업화되던 지난 1960대, 구로공단이 들어서면서 자리 잡았다. 하지만 2000년대 전후,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로 변모했다. 주변에 아울렛 등의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구로시장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구로커는 흥망성쇠의 역사를 들으며 구로시장에 더 애착을 가졌다. 청년이 떠난 시장을 청년의 힘으로 되살려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40년째 시장에서 신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종운 회장은 청년들이 재래시장에 나타난 것을 놀라워했다. 이 회장은 "50, 60대 아줌마, 아저씨들만 시끌벅적한 시장에 청년들이 오다니 시장 분위기가 달라질 것 같다"며 "늙은 상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청년들이 도와준다면 기쁘고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황명자씨도 "우리 세대가 홍대앞 클럽에 가는 게 낯선 일인 것처럼 젊은 사람들이 재래 시장에서 논다는 것도 그렇다"며 "자식 같은 젊은 사람들과 말을 섞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반갑고 자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구로커는 지난 6일 열린 구로다문화 축제에서 주민들에게 구로의 맛집과 멋집을 소개 받았다. 이를 기초로 구로커는 마을 내의 청년 투어를 기획하고 있다. ⓒ 강민수


구로는예술대학의 '구로커' 3명이 주민들에게 소개 받은 구로시장의 명물 칠공주 떡볶이집에서 시식하고 있다. ⓒ 강민수


홍대 놀러가면 술 마시고 노래방...구로에서는? 

구로커는 이어서 '칠공주 떡볶이집'을 찾았다. 이 가게는 지난 6일 열린 구로다문화 축제에서 주민들에게 소개 받은 곳이다. 떡볶이 집에는 간판이 없지만 보자마자 '칠공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0년 전 시작할 때는 '공주'였지만 이제는 백발이 된 일곱 할머니가 구로시장의 명물이 됐다. 추천받은 맛집 답게 손님들이 북적거렸고 떡볶이 맛도 일품이었다.

구로커들은 이날 방문을 바탕으로 구로시장 탐방단을 꾸릴 계획이다. 구로의 청년들을 모아 한나절 구로시장을 누비며 시장을 놀이 공간으로 만들어갈 예정이다. 또 이날 만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로시장에 관한 온·오프라인 소식지를 만들기로 했다.

슉슉은 "우리가 신촌이나 홍대에 놀러 가면 옷 구경하고 술 마시고 노래방 가는 것밖에 더 있나?"며 "시장의 오래된 골목들, 독특한 풍경을 구로의 청년들과 함께 개발해나갈 것"이라고 프로젝트 방향을 설명했다.

"우리는 왜 동네가 아닌 홍대, 강남으로 나가서 노는가! 우리는 왜 구로에 산다고 말하지 못 하는가!"

구로커는 지난 6일 열린 구로다문화 축제에서 주민들에게 구로의 맛집과 멋집을 소개 받았다. 이를 기초로 구로커는 마을 내의 청년 투어를 기획하고 있다. ⓒ 강민수


구로는예술대학은 'OO은대학'에서 출발했다. OO은대학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영영은대학? 오오는대학? 'OO'은 '땡땡'으로 읽는다. 'OO'에는 어떤 게 들어가도 좋다. 지역이 들어갈 수도, 책, 사람이 들어갈 수도 있다. OO을 대상으로 배움터를 만든다는 게 OO은대학의 모토다.

2009년 '마포는대학'에서 시작된 'OO은대학'은 2012년 10월 현재 'OO은대학연구소' 산하에 4개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구로는예술대학을 비롯해 부평은대학(인천 부평), 원종종합시장은대학(경기 부천), 온수리대학(인천 강화)에서 술래양성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또 부산의 남항시장은대학, 서울의 관악은대학은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

OO은대학은 앞세대와 뒷세대가 만나는 청년 반상회, 배움과 가르침을 연결하는 인생 복덕방이 되기를 꿈꾼다. 기성세대는 삶의 경험에서 청년들과 공유하고 싶은 지혜를 나눈다. 먹고사는 문제로 마을에서 소외된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지혜를 배우며 마을의 관계망을 형성하게 된다.

부평은대학의 술래들이 지난 9월 인천 부평구 부개동의 뉴서울아파트의 환풍 시설을 코끼리 벽화로 그리고 있다. ⓒ 부평은대학


"OO은대학은 느슨한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강원재 OO은대학연구소 1소장은 "OO은대학은 사람들이 만났다 흩어지고 또 다른 계기로 만나는 느슨한 네트워크, 공동되기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 강원재 소장

OO은대학은 공동체를 지향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과 청년이 가르침과 배움의 '공동되기'를 꿈꾼다. 강원재 OO은대학연구소 1소장은 촛불집회를 공동되기의 대표사례로 꼽는다. 그는 "촛불은 수많은 관계망 안에서 일시적으로 만났다 헤어지는 공동되기였다"며 "노사모처럼 일정한 목표를 갖는 순간, 폐쇄성과 배타성이 나타나며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동체는 목적 지향적이다. 목적을 갖게 되는 순간, 공동체는 계속 성장을 해야 한다. 대신 OO은대학은 사람들이 만났다 흩어지고 또 다른 계기로 만나는 느슨한 네트워크, 공동되기를 지향한다."

청년의 마을 활동도 '공동되기'여야 한다는 게 강원재 소장의 설명이다. 그는 "청년들은 한 지역에 정착해 살아가기에는 경험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며 "마을의 기성세대와의 관계를 통해 배우면서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고, 다시 관계 맺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마을 활동의 지향점을 찾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착해서 살아가는 마을공동체보다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관계를 맺는 '유목적 공동되기'가 청년의 삶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주목받지 못했던 마을의 사람과 공간은 술래를 만나면 반짝이는 보물이 될 수 있다. 이 순간에도 술래가 마을의 숨은 보물을 찾아 나서고 있다.
#구로는예술대학 #구로커 #OO은대학 #강원재 소장 #마을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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