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있지 못한 '광주열사'... 부끄러움을 배웁니다

[서평] 열사에서 인간으로 <박관현 평전>

등록 2012.11.03 12:15수정 2012.11.0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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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현 평전> 표지 ⓒ 사계절

제목을 보고 약간 의아했다. 무식하게도 박관현 열사를 그저 '광주항쟁 열사'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왜 5월이 아니라 10월에 책이 나왔나 한 것이다. 책을 넘겨보고 나서야 까닭을 알게 됐다. 1982년 10월 12일. 박관현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꼭 서른 해가 되는 날에 맞추어 책이 나온 것이었다. '박관현' 이름 석 자밖에 모르고 이 책을 그저 '많고 많은 열사 평전'이라고 생각했던 부끄러움이 결국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했다.

<박관현 평전>(관현장학재단 편저, 최유정 씀, 사계절 펴냄)은 1980년 5월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광주지역의 민주화 항쟁을 이끈 박관현 열사의 평전이다. 동화작가인 최유정이 박관현 열사의 출생부터 '광주의 아들'로서 보낸 1980년 봄과, 감옥에서도 목숨을 돌보지 않고 투쟁하다 결국 숨을 거두기까지 그의 삶을 기록했다. 평전이 빠지기 쉬운 '영웅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열사'로 남은 한 사람의 '인간'적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서장에서 박관현 열사의 죽음에 대한 의혹 세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책은 이후 열사의 어린 시절부터 찬찬히 되짚어나가며 그의 삶을 재생해낸다.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가문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박관현 열사. 도서관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그가 양심적인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뒤늦게 '운동가'로 나서게 되는 과정이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생생하게 그려졌다.

뒷날 박관현 열사와 함께 '광주항쟁의 상징'으로 기억된 윤상원 열사와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본격적으로 역사의 파도와 함께하게 된다. '들불야학'으로 대표되는 지역노동운동을 시작하고, 전남대 총학생회를 민주적으로 새로 건설해 1980년 봄, 광주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5월 18일 이후 수배자로 쫓기다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양심수 탄압에 맞서 단식투쟁을 하다 스물아홉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열사'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인간'의 마음

그의 삶을 따라가며 머릿속에 각인된 말은 바로 '됨됨이'와 '염치'였다. 멋진 연설로 군중을 선동하는 '항쟁 지도자'의 모습보다 자기 곁의 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헌신하는 '벗'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말썽만 부리던 자신을 위해 밤을 새워가며 매질을 견디고 가족을 설득한 박관현 열사의 모습에 콧날이 시큰거렸다는 한 당시 야학 학생의 회상은 열사라는 이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인간의 마음을 느끼게 했다.

'5월 광주 열사'의 대표 격으로 기억되는 박관현 열사는 역설적이게도 5월 18일, 광주에 있지 못했다. 5월 17일 계엄 확대와 함께 수배를 당한 그는 여수와 서울 등지로 쫓겨 다니며, 광주에서 죽어나간 친구들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가 감옥에서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극단적인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때 느낀 '산 자의 부끄러움'이었다.


24일에 걸친 단식 도중 결심공판 법정에 선 박관현 열사는 최후진술에서 "항쟁의 거리를 빠져나간 부끄러움을 간직한 제가 시민들과 함께 (전두환 정권을) 심판할 것입니다"(233쪽)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죽어가는 동안 이름을 숨기고 숨죽여 눈물 흘려온 시간이 남긴 부끄러움.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박관현 열사의 투쟁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런 부끄러움을 우리와 함께 지녔기 때문 아닐까.

꼭 30년이 지난 지금, '민주'와 '진보'라는 가치로 대표되는 무리에는 똑똑한 이도 많고 말 잘하는 이도 참 많지만 어째 '부끄러움'을 아는 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정권교체니 뭐니 하는 정치공학에만 몰두해서, 한때의 벗들을 적으로 돌리고 매도하는 '됨됨이 없는' 인사들만 보일 뿐이다. 청춘의 모든 것을 바치고도 마지막 남은 목숨 하나를 바치지 못해 부끄러워했던 한 사람, 그의 고백을 빌어 되묻고 싶은 답답한 날들이다.

"부끄럽다, 부끄러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81쪽)
덧붙이는 글 * <박관현 평전> 관현장학재단 편저, 최유정 씀, 사계절 펴냄, 2012년 10월, 290쪽, 1만2800원
* 진보생활문예 <삶이보이는창> 2012년 11-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박관현 평전 - 새벽 기관차

최유정 지음, 관현장학재단 엮음,
사계절, 2012


#박관현 #광주항쟁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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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사람.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 2021)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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