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세 나라 건너뛴 나, '사랑' 때문이었다

[불혹 배낭여행기①] 길 위에서 나를 돌아보다 마케도니아로 돌아갔다

등록 2012.12.04 16:43수정 2013.03.2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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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오리드의 호수로 뛰어드는 세계각국의 청춘들. ⓒ 홍성식


2011년 8월 15일 저물녘. 낮 동안 쉼 없이 거리와 숲을 달아오르게 만든 태양이 거대한 수평선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늘도, 그에 맞닿은 호수도, 더불어 그걸 바라보는 내 얼굴까지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평화롭고 적요한 풍경 속에서 백조 두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씨엠립,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이란의 사막도시 야즈드에서 보던 석양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다. 허나, 이곳에서의 일몰처럼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히는 강렬함은 없었던 듯하다. 바로 이 편안함과 나른한 혼곤함을 느끼기 위해 나는 자그마치 19시간을 낡은 버스에서 꾸벅대며 마케도니아의 호수도시 오리드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한 번쯤은 세상과 규범이 정해준 길이 아닌 '나만의 길'을 찾아 미개척지를 헤매고 싶어 한다. 어떤 인간이 제게 주어진 평생을 아침에 출근해 점심엔 자장면이나 설렁탕을 먹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잠을 청해야 하는 단조로운 일상만을 수십 년 살고 싶어 하겠나.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산다. 나 역시 학교를 마친 후 10여 년 이상을 그 단조로운 패턴 안에서 움직였다. 마음속에는 정글을 뛰노는 눈빛 형형한 호랑이가 사는데 그 호랑이는 포장된 아스팔트만을 매일 오가야 했다.

물론 그 삶은 안전했다. 고정적인 몇 푼의 월급과 오랜 노동 후에 주어지는 아주 잠깐의 휴식, 거기에 이 세상 한구석에나마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는 터무니 없는 자족감. 하지만, 그런 서푼 짜리 위로로는 마음속 짐승을 길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미쳐 날뛰는 가슴 속 짐승을 어찌하지 않고서는 나까지 미칠 것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마흔이 가까워져 오던 시기였다. 공자는 사내 나이 마흔을 '세상사 미혹에 흔들리지 아니한다'고 해 '불혹'(不惑)이라 칭했건만, 천만에다. 감히 말하건대 대한민국을 사는 어느 40대가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아니할까.

그랬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던 나는 그 흔들림이 주는 현기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20대 초반 청년처럼 배낭을 꾸렸다. '단 1년 만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 익숙지 않은 풍경 속에 나를 떨어뜨려 보자'는 결심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긴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2011년 1월 27일. 39년 하고도 6개월을 살아온, 아니 아등바등 견뎌온 이 땅에서 떠나던 날은 몹시도 추웠다. 5kg이 넘지 않는 단출한 가방을 메고 인천공항에서 태국 방콕행 비행기에 오르던 그날. '다시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뭇 비장한 마음가짐이었다. 독을 묻힌 칼을 품고 단기필마로 진시황을 암살하러 역수를 건너던 자객 형가(荊軻)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일정 없는 마구잡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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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오리드의 호수. 최고 수심이 200m를 넘는다. 오염이 되지 않은 투명한 물빛 탓에 수십 m 아래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인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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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오리드의 호수. 백조가 헤엄치는 평화로운 풍경. ⓒ 홍성식


이름조차 생소했던 동유럽의 조그만 나라 마케도니아에 도착한 건 그런 독한 마음을 품고 한국을 떠나온 지 5개월이 지난 무렵이었다. 애초에 언제 돌아오겠다는 계획도, '어디어디를 가겠다'는 일정도 정하지 않은 마구잡이의 무모한 여행.

치앙라이와 치앙콩을 비롯한 태국 북부·캄보디아 북서부·라오스 중북부를 거쳐 베트남의 해안선을 따라 남중국해를 바라보며 사이공에서 하노이까지 몰아치던 여행 초기. 비행기와 버스는 물론, 통통거리는 작은 배를 잡아타고 국경을 넘나들며 마음 안에서 울어대던 호랑이를 쓰다듬어 달랬다.

남부 아시아를 떠나서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거쳐 바로 코앞에 유럽의 바다가 일렁이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한참을 머무른 후, 한국 관광객의 거의 없는 동북부 트라브존과 민족은 있으되 나라는 없는 비극적 삶 속에 놓인 쿠르드족이 대거 거주하는 도우베야짓을 돌아봤다.

결정의 순간, 문득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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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동북부 도우베야짓의 이샥 파샤 궁전. 지상의 풍경 같지 않다. ⓒ 홍성식


이어진 17일간의 이란 여행. 히잡과 차도르로 대변되는 이슬람 신성국가 이란에서 다시 터키로 돌아와 남부 해안선을 타고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 이스탄불에 재입성하니 어느새 초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올 당시 단단했던 마음가짐은 짧지 않은 여행이 가져다준 피로감과 '세상 어느 곳이나 사람살이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라는 심상한 깨달음 탓에 많이 무뎌져 있었다.

결정을 해야 했다. 그만 유랑을 접고 돌아갈 것인가, 이집트로 날아가 아프리카를 종단할 것인가, 그게 아니면 불가리아를 시작으로 낭인처럼 동유럽을 떠돌아 볼 것인가. 이스탄불 싸구려 숙소 침대에서 뒹굴며 며칠을 고민했다. 답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미국 플로리다의 한 대학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는 중년의 한국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교수인 미국인 남편과 터키를 여행 중이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마케도니아에서 1년을 산 적이 있어요. 거기에 오리드라는 호수에 접한 조그만 시골마을이 있거든요. 여행을 적게 한 편은 아닌데, 나이를 먹을수록 거기가 자꾸만 그리워져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친절하고 착한지..."

어딘지 모르게 내밀한 사연을 간직한 듯한 그녀의 얼굴과 진정성 어린 말투를 떠올린 나는 더 이상의 머뭇거림과 갈등은 시간 낭비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어 이스탄불역으로 종종걸음 쳐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로 향하는 야간열차 티켓을 예약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터키에서 마케도니아엘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나라였다.

이스탄불발 소피아행 기차에서 몇 번의 여권 검사를 거치고, 소피아에서 나흘을 머문 후 안팎으로 키릴문자가 잔뜩 적힌 버스를 달려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 도착한 것은 6월 말이었다. 그 규모가 서울 종로거리 10분의 1이나 될까 말까 한 조그만 스코페 도심. 동으로 만든 거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조형물만이 수십 미터 높이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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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스코페 도심에 세워진 거대한 알렉산더 동상.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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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 저녁 무렵 풍경이다. ⓒ 홍성식


한때 유럽 전역과 아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민족의 후손이라는 기억으로 서유럽과 비교해 물질적으로 누추한 삶을 살아가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오늘을 위로해주려 도시 규모에 비해 어색해 보일 만큼 거대한 형상을 만든 것일 터. 그런 이유로 알렉산더의 동상 앞에 선 나는 위압감보다는 쓸쓸함을 더 크게 느껴야 했다.

남으로는 그리스, 북으로는 세르비아, 동서로는 알바니아와 불가리아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마케도니아는 1990년대 초반 유고연방이 독립할 때 같은 연방국에 속해 있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과 달리 인종-종교간 유혈 사태 없이 독립 정부를 수립했다. 그런 전통 탓인지 수도 스코페에는 마케도니아인은 물론 알바니아인과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터키인, 떠돌이 집시들까지 큰 불화 없이 섞여서 생활하고 있다.

조그만 도시에 가톨릭교회와 이슬람 사원, 거기에 마케도니아 정교회의 성당까지 오밀조밀 모여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인도 콜카타에서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로 살았던 탓에 '성녀'로 불리는 테레사 수녀가 바로 이 도시 스코페에서 태어난 알바니아인이다. 인종과 종교의 벽을 평화적으로 뛰어넘은 화합의 도시에 태어난 그녀였기에 빈자와의 화합에도 거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거기서 이틀을 머물고 도착한 곳이 바로 평생 '사랑'이란 단어의 사용을 꺼렸던 내가 사랑에 빠진 도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도시 오리드(Ohrid)다. 유럽인들은 '오흐리드' 혹은 '오크리드'라고 발음하는 곳. 거기서 나는 2011년의 여름 한 철을 보냈다. 6월 말에서 7월 중순까지 그리고, 8월 중순에서 9월 초까지 두 번에 걸친 방문.

무엇이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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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오리드의 시내 풍경. 마케도니아 정교회 성당과 이슬람교 모스크가 마주 서있다. 표면적으로나마 종교간의 불화가 그친 평화로운 풍경.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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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의 호수마을 오리드의 저물녘. ⓒ 홍성식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리드를 떠나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까지 거침없이 올라갔던 내가 이탈리아 베니스행 열차 티켓을 환불하고, 하룻밤 사이 세 나라의 국경을 허위허위 넘어 다시 오리드로 돌아왔던 이유는.

단순히 앞서 이야기한 아름다운 저물녘 풍경이 그리워서?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 '회귀의 이유'를 몇 가지의 키워드로 유추해보려 한다. 나는 오리드의 어떤 면을 사랑했고, 무엇이 나를 그 도시와 대책 없는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일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계간문예지 <문학의오늘>에 연재되고 있는 여행기입니다.
#마케도니아 #오리드 #세계여행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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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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