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처럼 느껴진 5시간의 버스여행, 여기는 바로...

[불혹 배낭여행기③] 크로아티아, 푸른 아드리아에 깃든 검은 상처

등록 2012.12.12 15:53수정 2013.03.2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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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해에 접한 크로아티아의 항구도시 두브로브니크. 푸른 하늘, 푸른 바다, 붉은 지붕의 집들. ⓒ 홍성식


한국에 있을 땐 그다지 친숙하지 않았던 '크로아티아'라는 나라 이름을 기억해낸 건 몬테네그로의 해변도시 코토르에서 연어구이로 혼자 점심을 먹을 때였다. 이탈리아에서 1년쯤 살다온 친구가 한 명 있다. 아래는 몇 해 전 서울에서 우리가 주고 받은 대화.

"이탈리아 사람들은 휴가 때 어딜 주로 가냐?"
"배 타고 아드리아해 건너 크로아티아로 많이 가던데."
"그래? 프랑스 남부 해변이 아니고? 의외네."
"하여간 이탈리아 애들 말로는 크로아티아 엄청 아름답대."

이탈리아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풍문이 떠돈다. 왜냐? 세계 어디를 가도 로마와 나폴리, 시칠리아와 피렌체, 베네치아처럼 멋진 풍경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일종의 '이탈리아식' 자부심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탈리아 사람들이 "엄청 아름다운 휴양지"라고 말한다면 대체 얼마나 근사해서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사흘째 머물던 몬테네그로를 떠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명불허전(名不虛傳). 크로아티아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는 피 흐르는 끔찍한 상처가 숨어있었으니.

사람을 압도하는 풍경, 아드리아의 바다

몬테네그로 코토르에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까지는 버스로 5시간이 걸린다. 한국에서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정도의 거리. 좌석에 함께 앉은 동행도, 스마트폰도, MP3도, 한국어로 된 책도 없는 여행자라면 충분히 지겨울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천만에. 낡은 버스가 두 도시를 달리는 체감시간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5분처럼 느껴진다. 왜냐? 왼편으로 펼쳐지는 아드리아해(海)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 바다의 빛깔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직접 보고 왔음에도 설명하기가 난감하다. '필설로 형용이 불가능하다'는 수사가 그대로 적용되는 드문 체험.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아내는 동시에 전투기 조종사들의 낭만을 위트 있게 그려낸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 그 애니메이션의 공간적 배경이 2차 대전을 앞둔 아드리아해의 작은 섬이다.

지금은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드문 만년필. 펜촉에서 흘러나오는 네이비블루의 잉크 혹은, 신비롭게 빛나는 거대한 담청색 사파이어 그것도 아니면, 설산(雪山)에서 바라본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하늘의 색채. 그렇다. 아드리아 바다는 이것들과 닮았다. 그러나, 그것도 정확한 묘사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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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 바다의 색채는 필설로 형용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청옥빛? 사파이어빛? 담청색? 뭐라 이름 해야 할까.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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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해에 떠있는 크로아티아 국기를 내건 목선. 로맨틱해 보인다. ⓒ 홍성식


풍경이 인간을 압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절감케 하며 달리는 두브로브니크행 버스. 방금 본 바다와 모래밭이 가장 아름답겠거니 하면, 10분 후 더 근사한 해변이 나타나고, 잠시 후엔 깎아지른 절벽 아래 심청색 물보라가 튀는 절경이 또 나온다.

승객이 30퍼센트 가량 밖에 타지 않은 버스. 좀 달리다보니 탑승객 모두가 왼쪽으로 몰려서 창문을 열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쁘다.

시간의 속도는 실체보다 느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아드리아해에 위치한 동유럽 도시 중 가장 아름답다'는 얻어들은 풍문 외에는 정보 하나 없이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했다. 숙소도 예약하지 않았고, 이후 일정도 세우지 않은 채였다.

도착 후 한참 동안을 시내 외곽의 국제버스터미널 대합실에 멍하니 서 있었다. 당시는 2011년 1월 태국으로 출발한 여행이 라오스와 캄보디아, 터키와 이란, 불가리아와 알바니아 등을 거쳐 6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던 시기. 그쯤 되면 어떤 여행자라도 알게 된다. 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가방을 메고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숙박업소에서 나온 호객꾼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건다는 사실을.

두브로브니크행을 결정한 때는 유럽인들의 장기 휴가가 한창인 7월. 서유럽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은 관광지인 크로아티아의 여행 성수기였다. 호텔방은 턱없이 부족했고, 숙소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해마다 그 시기가 되면 자기 집의 빈방을 민박 형태로 대여해주는 현지인들이 많다.

방을 찍은 사진과 숙박료를 적은 종이를 배낭 멘 여행객들에게 보여주는 민박집 호객이 터미널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다른 이들처럼 호들갑스럽게 자기 집을 홍보하지도, 가격을 깎아주겠다며 너스레를 떨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의사를 물어보곤 여행자가 거부의 뜻을 표하면 주저 없이 돌아서는 좁은 어깨의 중년 여성.

바다 빛깔을 닮은 민박집 주인 여자의 눈동자

내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 집은 어디고, 하루에 얼마면 빌릴 수 있나요?" 예상한 가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숙박료가 답으로 돌아왔다. 일단 사흘을 묵겠다 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따끈한 베이글 하나를 사서 건네며 웃는다. 눈동자가 아드리아해처럼 푸른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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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도시들 대부분은 이렇게 계단식으로 형성돼 있다. 골목마다 화분을 내놓거나, 꽃나무를 심어 소박한 아름다움을 걷는 이들에게 전해준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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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의 고성. 깎아지른 절벽에 세워졌다. 바다 건너편은 이탈리아의 나폴리나 바리 쯤일까? ⓒ 홍성식


그녀의 집은 언덕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하는 도시 외곽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관광지와 다소 떨어져 있어 시내버스를 타야 붉은 지붕이 줄줄이 늘어선 두브로브니크 올드타운과 해변으로 갈 수 있었다. 민박으로서는 입지조건이 별로다. 그래서, 여행자들이 선뜻 그녀를 따라나서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하나는 기가 막힌다. 방값을 깎아달라고 하지도 않고, 시설이 허름하니, 위치가 좋지 못하니 어쩌니 트집을 잡지 않는 내가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던 모양이다. 종이와 볼펜을 가져와 조그맣지만 예쁜 해변의 위치와 현지인들만 아는 싸고 맛있는 식당, 번호에 따른 시내버스 노선까지를 꼼꼼하게 설명해준다.

자기는 야간병동 간호사이니 내일 새벽이나 돼야 돌아온다며 밤에 들어올 땐 자신이 준 열쇠를 이용하라는 설명을 끝으로 "내 집에 손님으로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그녀가 만든 시원한 레몬에이드를 3잔이나 마셨다. "내가 이제껏 마셔본 레몬에이드 중 최고"라는 칭찬을 전하니 내일도 만들어주겠단다. 그 정도의 친절과 미소였으니, 나 역시 숙박료를 할인해달라는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점심을 먹으려는지 그녀가 거실을 청소하고 있을 때 건너편 방에 있던 남편이 나왔다. 나와는 가벼운 눈인사만을 나누었다. 그 역시 한없이 친절한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구석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 사내의 어두움 뒤에 자리한 지우기 힘든 깊은 상처를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건 이틀 후 새벽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계간문예지 <문학의오늘>에 연재되고 있는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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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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