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부터 노란 목도리를 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불운했던 한 해, 계속 '시민전사'로 살겠습니다

등록 2012.12.27 09:30수정 2012.12.27 11:5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2년 1월 1일 새벽, 나는 고장의 명산 백화산을 올랐다. 정상에서 열린 '새해맞이' 행사에서 '신년축시' 낭송을 했다. 축시의 제목은 <우리 모두 용꿈을 꾸고, 용이 되자!>이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 두 번의 선거를 염두에 두고 지은 시였다. 두 번의 선거를 잘 치르고 정권교체를 이루면 국민 모두 용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백화산 정상의 새벽 공기를 가르며 절절하면서도 우렁찬 소리로 시를 낭송했고, 한껏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새해맞이 행사를 마치고 떡국을 먹을 태을암으로 내려가던 길에서 그만 낙상을 하고 말았다. 한 순간의 방심 탓이었다. 땅바닥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언 나무뿌리를 밟는 순간 몸이 두어 번 구르고는 1m 아래 구덩이에 처박혔다. 한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해 보니 다행히 깨지거나 부러진 데는 없었지만 한쪽 엉덩이가 몹시 아팠다.

불운했던 한 해, 두 번의 낙상

a

불편한 글 쓰기 다리 불편 때문에 책상 밑에 작은 의자를 놓고 그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또 허벅지 위에 키보드를 올려놓고 작업을 한다. 그것만으로도 불편한 자세인데, 오른속목을 다쳐 깁스를 한 채 겨우겨우 글을 쓴다. 요즘은 오로지 글 쓰기만으로 마음의 공황 상태를 달랜다. ⓒ 지요하


겨우 태을암으로 내려와서 떡국을 먹으며 올 한해 운수가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깨지거나 부러진 데는 없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으나, 새해 초하루 새벽의 낙상은 아무래도 불길한 일일 것만 같았다. 여러 날 동안 엉덩이 통증을 견디면서(연초부터 병원에 가는 것이 싫어 병원은 가지 않고) 불길한 예감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4.11 총선을 치르고 난 다음날 불현듯 새해 초하루 새벽 백화산 낙상을 떠올렸다. 백화산 정상에서 새해를 맞으며 힘차게 낭송했던 '신년축시'의 기원, 그 뜨거운 소망의 절반이 무참히 무너져 버린 것을 함께 실감해야 했다. 무안하고도 비참한 심정이었다.

4월 총선으로부터 7개월이 지나고 바야흐로 대선 분위기가 무르익던 11월 20일, 나는 또 한 번의 낙상을 경험했다. 조상님들께 제향을 올리려고 간 곳에서 당한 일이었다. 나는 올해 2월 '충주지씨 서산태안종친회'의 회장 임무를 맡았다. 내 7인승 승용차에 족장들을 태우고 충주, 파주, 남양주 등의 큰 제향 행사에 참석한 다음 11월 20일에는 충남 당진시 합덕읍을 가게 되었다. 


합덕읍 석우리에는 고려 말에 찬성사를 지낸 16세조와 충원부원군이었던 17세조의 묘소가 있는데, 해마다 그 선영에서 지내는 제향은 매우 거창한 규모였다. 지역종친회 회장인 나는 당연히 그 제향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선영 아래 음식 준비를 하는 토지 관리인 집의 옆길을 걷다가 그만 길바닥에 놓인 전깃줄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왼발로 전깃줄의 한쪽을 밟은 탓에 오른발이 올가미에 걸리듯 걸렸고, 보통 걸음걸이였지만 고꾸라진 다음에서야 내가 넘어진 것을 알았다. 얼마나 오지게 넘어졌던지 왼손 장지에 20년 가까이 끼고 살았던 18금 묵주반지가 빠져 달아나버렸다(30분쯤 후에 반지가 빠진 것을 알고 열심히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해 내 왼손 장지는 허전한 상태다). 

오른손목이 몹시 아프고 부어올랐지만, 손가락들을 움직일 수가 있어서 부러지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오른손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끝까지 제향 행사에 참여하고 밥까지 먹고, 다행히 왼손잡이라 왼손으로 차 운전을 하여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면서 1월 1일 새벽의 백화산 낙상과 총선 결과를 상기했고,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서 발생한 또 한 번의 낙상에 이상한 근심을 안아야 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한의원을 다녔다. 부황기로 환부의 피도 빼고 침을 맞고 뜸을 뜨기도 했다. 열 번 이상 한의원을 다니는 동안에 손의 부기가 가라앉고 차도가 있었지만, 손목이 계속 불편하여 아무래도 뼈에 문제가 있는가보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당연히 정형외과에 가서 사진을 찍어봐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선거운동에 몰입해 있는 상황이었다. 몸도 많이 움직이고 글도 많이 써야 했다. 정형외과에 가면 필히 손등에서부터 깁스를 할 터였다. 손목은 불편해도 손가락들은 움직일 수 있어 키보드를 두드릴 수가 있는데, 깁스를 하면 그나마 글도 못 쓰고 행동이 더 불편할 터였다. 그런 지레 판단으로 나는 계속 한방치료만 받으면서 키보드를 두드려 많은 글을 쓰고, 시민캠프와 국민연대 서산태안공동대표 자격으로 선거운동에 최선을 다했다.

a

투표시간 연장을 위한 일인시위 12월 9일 오후 충남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국민은행 앞 사거리에서 일인시위를 벌였다. 내 생애 최초의 일인시위였다. ⓒ 지요하


그리고 선거 다음 날, 나는 드디어 태안보건의료원 응급실(외과)로 가서 사진을 찍어보게 됐다. 사진을 본 외과전문의는 뼈가 부러졌다고 했고, 이미 한 달이 경과해서 치료가 가능한지도 알 수 없다며 정형외과로 가보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 길로 정형외과의원을 찾았다. 사진을 본 정형외과 전문의는 "치료시기가 늦어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깁스를 해주었고, "치료효과가 나타나더라도 손목이 예전처럼 전후 90도로 꺾이지는 않는다"는 말을 했다.

보름 이상 깁스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24일 나를 본 다른 의사(원장)는 한 달이나 깁스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한 달 후에 깁스를 풀면 손목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건지, 전후 90도로 꺾이지 않는 상태의 불구가 되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깁스를 하고 사는 불편함 가운데서도,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고 마우스를 움직일 수 있으니 천만 다행으로 여기며 계속 글을 쓰고 있다. 글이라도 써야지, 글도 쓰지 않는다면 오늘의 이 막막한 공황상태를 어찌 견딜 것인가!

대선 때마다 흘렸던 눈물들

내가 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 처음 맞은 대통령 선거는 '삼선개헌 국민투표' 이후 치러진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였다. 그때 나는 베트남 전장에 가 있었다. 부재자투표에 대한 기대를 가졌지만, 부재자투표시기에 있었던 무슨 작전에 동원되어 보름여 동안 정글을 긴 탓에 투표 기회를 가지지도 못했다. 영내로 귀환을 하고 보니 "파월장병들은 투표를 할 필요도 없다"느니, "이미 누가 다 대리투표를 했다"느니 이상한 말들이 들렸다.

본인이 투표를 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파월장병들의 표는 모두 박정희 표로 둔갑하여 고국으로 갔다는 얘기였다. 그것을 나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1971년 제7대 대선 때는 투표지를 구경도 하지 못했다.

a

선거 유세 12월 18일 오전에는 안면읍 승언리 버스 터미널에서 유세를 했다. ⓒ 지요하


그 후 유신독재와 5공 군사정권 하에서 16년 동안이나 잃어버렸던 대통령 직접선거권이 회복된 1987년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나를 '시민전사'로 만들었다. 그해 1월 마흔의 나이로 결혼하여 첫 아이를 얻은 나는 내 아이에게 민주화의 대로를 물려주고 있었다. '공명선거감시단' 태안대표를 맡아 여권의 동네 어깨들과 충돌도 빚으며 힘껏 싸웠다.

그때는 야권 분열에 의한 공동의 책임 때문에 참담한 결과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맞았다. 그때도 '공정선거감시단' 태안 상임의장을 맡아 여권의 어깨들과 싸웠다. 그러나 결과는 군사독재세력과 야합한 김영삼의 승리로 돌아갔다.

선거 다음 날, 성당의 주일 교중미사에 참례한 나는 주임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주임신부님이 대선 결과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께서 골고타 산의 십자가상에서 처형될 때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붙여졌던 '유다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죄목을 상기합니다. 죄목을 적은 명패에 왜 굳이 '나자렛 예수''라는 말을 적었는지 아십니까? 유다에서 지역감정에 의해 멸시받고 천대받았던 갈릴래아 지방에서도 중심지였던 나자렛―그 나자렛 예수의 죽음에는 로마의 지배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던 갈릴래아 사람들에 대한 로마의 통치술과 바리서이들에 의해 더욱 조장된 지역감정 등이 복합되어 있는데, 그런 사정과 나자렛 예수님의 슬픔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어느 면으로는 지역감정의 희생자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의 지역감정보다 갈릴래야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멸시와 천대―그 지역패권주의를 동원하여 예수를 처형했던 바리서이들을 우리는 문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호남 사람들의 지역감정보다 우리의 지역감정을 문제 삼아야 하고, 호남의 지역감정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절망과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아니고서는 새로운 한국을 건설할 수 없습니다."

a

한명숙 전 총리와 함께 12월 17일 저녁 태안을 방문한 한명숙 전 총리가 서부시장 상가를 돌 때 직접 안내를 했다. ⓒ 지요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손수건 한 장이 다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1997년의 제15대 대선과 2002년의 제16대 대선 때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2007년의 제17대 대선 때는 다시 슬픔과 분노의 눈물을 흘렸지만, 대선 때마다 눈물을 흘린 내 심성의 구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겠다.

대선 뒤 착용하기 시작한 노란색 목도리

대선기간 동안 선거운동을 하느라 몸을 많이 움직이면서도 불편한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부지런히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낼 수 있는 인터넷 언론매체가 존재하는 것을 큰 다행으로 여기며 늘 감사하곤 했다.

대선이 끝난 후에도 쉬지 않고 글을 써서 하나는 <오마이뉴스>의 '오름' 기사가 되기도 했다(<미래의 발목 잡은 5060의 박근혜 몰표, 부끄럽습니다>). 그에 따라 수십 만 명의 독자들을 만났고, 수백 개의 댓글들을 접할  수 있었다. 내 인터넷 주소가 등록되어 있는 포털 네이버의 쪽지함과 <오마이뉴스>의 쪽지함에 수많은 편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게 감동을 표시하며 감사를 전하는 편지들이 물론 많았지만, 나를 비난하거나 반박하는 말들도 많았다. 그런데 나를 반박하는 말들 가운데는 욕설도 많았고, 차마 옮길 수조차 없는 난폭하고 추악한 욕지거리들도 있었다. 내 나이도 있고,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욕설들은 물론이고 점잖은 충고에도 꼭 등장하는 것이 빨갱이타령이고 종북타령이었다. 모든 생각과 말들이 빨갱이타령으로부터 발동하고 종북타령으로 귀결되는 양상이었다. 박근혜 당선자가 국민대통합을 강조하며 남북관계 개선을 천명하는데도 그들의 빨갱이타령과 종북타령은 개선될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과거와 오늘의 모든 문제와 모순들을 빨갱이타령과 종북타령으로 덮어버리려는 의도마저 엿보이는 것 같다. 사실 그 카드로 그들은 지금까지 재미를 보아왔다. 어떤 거짓과 어떤 문제도 종북타령 하나로 덮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앞으로도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지 결코 그 카드를 버리지 않을 것 같다.

a

노란색 목도리 선거기간에는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노란색 목도리 착용을 사양했다. 뭘 걸치는 것을 싫어하는 탓이다. 그러나 대선이 끝난 다음날부터 노란색 목도리 착용을 시작했다. ⓒ 지요하


나는 5년 전 이명박 정권이 탄생할 때도 이명박 정권의 속성과 한계를 꿰뚫어보았다. 절대로 탄생되어서는 안 될 정권으로 보고 다시금 '시민전사'로 싸웠다. 그리고 5년 동안 이명박 정권의 패악과 실정들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비판정신이 기본인 시민정신의 발현을 멈추지 않았다. '행동하는 양심'의 전형을 보여주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내가 이명박 정권을 비판한 것은 단순히 실정과 악정 때문이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으로 하여금 실정과 악정을 거듭하게 하는 기본적인 속성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그 속성과 한계를 그들 스스로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 천박한 속성과 습성으로 지금까지 재미를 보아왔고, 대중조작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무슨 일이든 빨갱이타령을 앞세우고, 그 어떤 일도 종북타령으로 감추고 분식하는 그 야만적인 습성으로 그들은 오늘의 승리도 거머쥐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본적 속성에는 야만성이 내재하기 마련이며,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폭력성이 발전하고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빨갱이타령과 종북타령의 대가이며 전도자인 윤창중을 박근혜 정권의 대변인으로 발탁한 것부터 폭력성 발현의 전조로 보인다.

나는 빨간색 유니폼과 목도리를 착용한 채 빨갱이타령을 더욱 강화하는 새누리당의 이중적 속성을 염려하여 그 속성의 '연장'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효과와 재미를 보아온 그들의 속성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전체 유권자의 절반에 가까운 1470만 명의 국민은 그들의 속성을 잘 알기에 그 속성의 연장을 반대했다. 그 속에 나도 있다.

나는 평소 목도리나 넥타이 매는 것을 싫어한다. 장식도 싫어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선호한다. 그래서 선거기간 노란색 목도리를 한 번도 두르지 않았다. 여러 번 유세를 하면서도 노란색 목도리 착용을 사양했다.

하지만 선거 다음날 손목 치료를 위해 정형외과를 찾던 날 처음으로 노란색 목도리를 목에 둘렀다. 그 후로는 외출을 할 때마다 노란색 목도리를 두르고 나간다. 성탄절 날 성당에서 누군가가 내게 노란색 목도리에 대해 관심을 표해서 명확한 소리로 대답했다.

"1470만 국민들을 대표하는 심정으로, 앞으로 5년 동안 줄기차게 이 노란색 목도리를 두르고 살 겁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