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 먹던 한화갑,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

[주장] 호남을 후벼파고 있는 '김대중 아이들', 한화갑·한광옥·김경재

등록 2013.01.01 19:53수정 2013.01.0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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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촌놈인 내가 <오마이뉴스> 인턴기자로 활동했던 2012년 1월. 서울 망원역 근처의 한 홍어집에서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만났다. 술이 약간 들어간 그는 내가 앉아 있던 <오마이뉴스> 기자 무리에게 격려차(?) 인사말을 전하고 식당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한 선배가 "이놈이 광주놈입니다"라고 내 출신 성분을 알렸다.

그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잘 해야제"라고 전라도 억양이 짙게 배인 말을 건넸다. 일선에서 물러난 '옛사람'이었지만 정치 원로이자 '리틀 DJ'인 그의 한 마디에 나는 막걸리 몇 잔의 취기가 더해져 알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머리로는 어떻게 자제가 안 되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전라도 DNA'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정치 일선에 등장했다. 이번 18대 대통령선거에서 그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것. 기자들이 그의 말을 일일이 받아 적기 시작했다. 이후 박 후보는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급기야 그는 선거가 끝난 지난 26일 <평화방송>에 출연해 "전라도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다 보니까 타성이 생겨서 그 탄력을 벗어나지 못했다"라며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썼을 때… 지금 생각하면 (그 정책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전라도민들은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말하자면 춘향이처럼 변하지 않는 그런 게 있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의 호남 득표율이 낮은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었다.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째야 쓰까'의 '짠한'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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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갑 전 평화민주당 대표가 지난 6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의 미래와 지도자의 역할' 특강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 권우성


지난 해 12월 19일 오후 6시 언저리의 광주 광천동 종합버스터미널. 18대 대통령선거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출구조사 결과 발표 직후, 광주의 현장 분위기를 취재하기 위해 대형 TV 부근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박근혜 후보가 이긴다고 나올 경우, 그리고 문재인 후보가 이긴다고 나올 경우, 이렇게 두 가지 경우에 대비해 각각의 반응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야권 성향이 짙은 광주였기에 '박 후보 우세'가 타전될 경우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는 '현실 부정'에서부터 '욕설 난무' 정도였다.

출구조사 결과, 박 후보의 승리(박근혜 50.1%, 문재인 48.9%)가 점쳐졌다. 현장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조용했다. 그러나 찬물이 끼얹어진 분위기는 아니었다. 분노로, 아쉬움으로, 섭섭함으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아무 말 없이 오갔다. 예상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어디서 누구 하나가 '에라이, XX'라고 욕이라도 해주길 기다렸다. 그때 적막을 깨는 한 아주머니의 음성이 작게 터져 나왔다.


"워매… 워매… 어째야 쓰까."

'짠한' 감정이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던 그 '어째야 쓰까'에 담긴 짠한 정서는 아마 자신이 지지한 후보는 물론,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이, 그리고 함께 그 후보를 지지한 모든 이를 향해 있었을 게다. 그리고 상상하건대, 32년 전 5월, 금남로의 전남도청·전남대·조선대·광주역·양동시장 그리고 이름 모를 골목 곳곳이 그 '어째야 쓰까'로 가득 찼으리라.

12월 19일 밤이 깊어 갈수록, 대한민국은 유권자 절반의 가슴이 허해졌지만, 광주는 32년 전 그날처럼 대부분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32년 전 그 동네, '지역감정'이란 말로 표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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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19일 오후 6시 경 광주 광천동 종합버스터미널. 오후 5시 59분(왼쪽 사진의 왼쪽 상단) 방송 3사 출구조사가 나오기 직전 기대하고 있는 시민들의 표정과 오후 6시(오른쪽 사진의 왼쪽 상단)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의 시민들의 표정이 상반된다. ⓒ 소중한


대선 후 '멘붕(멘탈 붕괴)'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 지인은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난 중년 남성의 '어제(19일) 잠 못 주무셨지요?'라는 인사말에 감정이 풀려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 고백했다. 내 또래의 대학생도, 나이 지긋한 교수도 각자의 입에서 '멘붕'이란 단어를 꺼냈다. 금남로 복판을 지나며 내 눈에 들어온 모든 이들이 쓸쓸해 보일 만했다.

하지만 더 큰 멘붕은 당선인 확정 이후 인터넷과 SNS를 통해 도래했다. 92%의 표가 한 후보에 던져진 광주를 '지역 감정'이란 개념어가 둘러싸기 시작했다. 한화갑 전 대표가 "전라도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다 보니까 타성이 생겨서 그 탄력을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급기야 5·18민중항쟁을 향한 음모론이 성행하기에 이르렀다. '폭동'이나 '북한 간첩의 침투' 같은 풍문은 사실처럼 퍼져 나갔다. 호남을 향한 평가 절하는 많은 호남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이런 아픔을 겪고 있는 동네를 향해 한 전 대표는 "쇄국정책마냥 어리석다"고 평했다. 28일 <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전라도 사람은) 변화를 싫어한다"며 "앞으로 전라도 사람은 생각하는 유권자가 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에 광주는 92%의 유권자가 한 후보를 지지했다. 전남은 89.3%, 전북은 86.2%의 유권자가 역시 같은 선택을 했다. 박근혜 당선인을 향해서는 광주·전남·전북 각각 7.8%·10%·13.2%의 표심이 전해졌다. 박 당선인 입장에서는 한 전 대표를 포함해 한광옥·김경재 같은 인물을 얻지 못하고도 광주·전남·전북 각각 12%·12.8%·12.6%의 표를 얻은 지난 17대 대선의 보수 진영보다 못한 셈이다.

한 전 대표가 말한 대로라면 "전라도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는데 왜 '리틀 DJ'를 '조금도' 따라가지 않았을까. 이것이 단순히 "변화를 싫어해서"라는 이유로, "타성에 젖"은 '지역감정'을 이유로 설명될 수 있는 걸까.

32년 전 5월, 현장 곳곳에서 피를 흘린 이가 살았던 동네가 바로 광주다. 그 주변에서 "어째야 쓰까"를 외쳐본 사람이 사는 동네고, 하다못해 저 멀리서 '어째야 쓰까'라고 생각이라도 해 본 사람이 사는 동네다. 그리고 그 자식들이 사는 동네다. 그 복잡한 '짠한' 감정을 지닌 동네가 '지역감정'이란 네 글자로 깔끔히 정제될 리 없다. 한 전 대표가 평가 절하했듯, "생각하는 유권자가 돼라"는 충고를 들을 만큼 생각 없는 동네는 더욱 아니다.

'어째야 쓰까'는 그들이 더 잘 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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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 마련된 선거종합상황실에서 김성주 공동선대위원장이 김경재 기획조정특보,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회 수석부위원장과 함께 지상파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며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50.1%,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48.9%로 앞서자,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한광옥 전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경재 전 김대중 총재 특별보좌역은 이번 대선에서 한화갑 전 대표와 같은 행보를 택했다. 그리고 김 전 비서실장과 김 전 특보는 각각 박 당선인 인수위의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을 맡았다. 행여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 자리 때문이었구나'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한화갑 전 대표 역시 국민의 48%를 '종북주의자'로 몰아갔던 윤창중 수석대변인 인사 조치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생각의 변화와 사상의 전환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김대중의 아이들'이 노무현 정권에서 겪은 설움 또한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선 한화갑이어서, 한광옥이어서, 김경재이어서 문제다. 그들이 유신과 싸웠고, 김대중을 지탱했으며, 호남을 대변하는 대표였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또한 노무현 정권의 설움은 호남 사람들도 그 셋 못지않게 겪었다.

셋 다 호남을 위해 박 당선인을 택했다지만 "널 위해 내가 떠난다"고 이별 통보하는 애인마냥 그들은 호남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김경재 수석부위원장의 '해양수산부 호남 유치' 발언이 호남 민심의 실소를 유발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호남 사람인 그 셋도 '어째야 쓰까'에 담긴 정서를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짠한 정서와 '어찌해야 할지'를 구상하는 미래지향적 사고를 말이다. 대선 직후 호남의 뻥 뚫린 가슴을 그들은 메워주진 못할망정, 더 뚫어 놓는 행보를 보였다. '어째야 쓸지', 즉 '어찌해야 할지'는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 망원역 근처의 홍어집, 이젠 못 갈 것 같다. 어째야 쓰까.
덧붙이는 글 소중한 기자는 2012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대선특별취재팀입니다.
#한화갑 #김경재 #한광옥 #대선 #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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