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혁신의 출발점, 여기에 답이 있다

[서평] 프레이리와 호튼의 대화록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에서 찾은 진보의 길

등록 2013.01.22 17:03수정 2013.01.2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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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프레이리와 마일스 호튼의 대화를 묶은 책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표지 사진. 교육 혁신과 사회 변화, 새로운 진보의 길을 모색하려는 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 아침 이슬

교사로 살아온 지 14년째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조합원으로 산 햇수도 이와 똑같다. 나는 교직에 입문한 지 처음 몇 년 간은 나 스스로 교사임을 자각하는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둥절한 햇병아리 교사였기에 말이다. 그때의 주된 고민거리는 교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 책무의 핵심은 어떤 것인지 등이었다. 그런 고민을 핑계로 나는 교원 노조 활동과 같은 교육 운동에 매진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안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교육계를 포함해 온 나라가 '비상 시국'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어두운 변화의 시작은 그 거대했던 2008년의 '촛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맨 먼저 활발하게 움직이던 교육 활동가들이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두 차례에 걸친 시국 선언 국면에서 많은 이탈자가 생겨나기도 했다. 나는 쓰라린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기력과 귀차니즘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냥 그럴 수는 없었다. 세상이 너무나도 엄혹하게 흘러갔다. 무엇보다도 나 혼자의 무기력이 나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치명적인 전염병처럼 다른 이에게 옮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내 두 눈에 보였다. 나는 짐짓 부지런한 일꾼이 돼 이곳저곳을 팔랑개비처럼 쫓아다녔다. 그리고 다시 무기력과 귀차니즘에 빠지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젠 바닥이야. 지금이 바로 바닥이라고.'

문제는 그 '바닥'이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저 멀고 높은 곳에 있는 MB 탓이 아니었다. 그 '가카'를 옹위하는 새누리당과, 그 '시뻘건' 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나와 우리로부터 비롯된 문제였다. 요컨대 이런 식이다.

어떤 회의를 한다. 회의 주재자가 안건을 제시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온다. 안건 자체가 문제라느니 해법이나 대안을 어떻게 모색하느니 하면서 갑론을박한다. 그리고 급하게 어떤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할 일은? 있는데, 우리가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조직의 명령이다. 하달 사항이다. 그래서 모두들 입을 한 발씩 내민 채로 회의장을 빠져 나간다. '이 일을 언제 다한담'이라면서.

그렇게 2~3년을 지내고 나자 내가 문득 무슨 거간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 상부에서내려온 일(팔려는 물건)을 현장 교사에게 들고 가 소개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사라고 흥정하는) 거간꾼 말이다. 매번 나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가 만든 일은 거의 없었다. 회의를 하면 할수록 그런 자괴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리라. 주간 회의며 상경 집회 등 조직의 공식 행사에 늘 얼굴을 비추던 이들이 왜 갑자기 '은둔자'가 돼버렸을까? 이들이 그 마음의 문조차 단단히 닫아 건 이유는 뭘까? 우리 스스로 세상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본 현실의 사태는 실상 그들(상부)이 본 것이었다. 전교조의 핵심 기조인 민족·민주·인간화를 소화하기에는 우리의 가슴 품이 너무 좁았을까.

그러다가 최근 3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에 거간꾼은 되지 말자는 자성의 목소리도 커졌다. 그렇게 해서 지회 차원에서 스스로 기획하고 실행한 사업들이 많이 생겨났다. 성과도 좋았다. 다른 어느 지역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사업도 즐비하다. 나는 그런 변화된 교육 운동의 말석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우리가 바닥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지난 대선의 후유증이 있는 이들은 여전히 바닥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 그리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의 의의를 깨달았으니 별 걱정이 없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와 '우리'다. 우리에 대한 자각,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세계 이해 말이다. 당장에는 그 결과물이 편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길게 보면 그것이 답이고 길이 된다. 다른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서 힘을 얻고 해결책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된다.

한 초청 강사분이 '국가노사관계위원회'에 대해 강의해주신 적이 있어요. 그분은 아주 많은 읽을거리를 갖고 오셨습니다. 한 참여자가 "시작하기 전에 잠깐만요, 우리는 선생님하고 토론하고 싶은 문제가 있어요. 질문드릴 것도 있고요"라고 말하자, 그 강사는 "책에 다 있습니다. 책을 찾아보세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질문자는 "그러면 당신이 꼭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책만 주고 가셔도 됩니다. 당신이 책 내용을 모른다면 당신에게 도움 받을 일도 없겠네요. 이 책만 읽어도 된다면 워싱턴으로 돌아가시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책을 읽고 있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212쪽)

전교조 군산지회에서 자랑으로 내세우는 연간 프로그램 중에 '교사 아카데미'가 있다. 저명 인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연수의 일종이다. 이 프로그램은 교육 운동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 진행된다. 교사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이나 학생들의 참여도 제법 된다. 4~5년 간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실적과 노하우도 많이 쌓였다. 올해에는 전북에서 참교육 실천 사례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면 마음이 약간 공허해진다. 그 연수 시간에 내가 할 일, 우리가 함께 할 일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론과 대화를 통해 그런 고민을 함께 나눈다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실천으로 옮겨질 수 있지 않을까? 파울로 프레이리가 <페다고지(원제: 피억압자를 위한 교육학)>에서 주창한 '프락시스(praxis·이론에 근거한 합리적인 실천)'도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구현될 수 있으리라 본다. 요컨대 우리가 기획한 일은 우리 스스로 주도하고, 그 일에 직접 참여하려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문제 상황의 원인을 우리가 직접 찾는 것도 꼭 필요하다. 그러면 현장과 활동에 직접 참여하고, 항상 다른 이와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을 우리가 아닌 '그들', 가령 상부 조직이나 전문가를 통해 알게 되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공감과 이해의 폭이 줄어든다. 머리로는 일목요연하게 알게 되지만 가슴으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반복되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기 어렵게 된다.

전문가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과 전문가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직접 말해주는 것은 다릅니다. 제가 경계를 가르는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전문가들이 전달해주는 정보를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안 돼요. 전문가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직접 지시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경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전문가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전문가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지요. 이것이 과연 민중들의 힘을 길러주는 것일까요?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167~168쪽)

우리는 왜 무기력한가? 무력한 귀차니즘에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고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 곧 자칭 타칭으로 존경받는 전문가나 '서생님들'의 가르침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시 당신이 사회 혁신을 위한 민중과 시민의 힘을 진정으로 신봉하고 있는 전문가라면 다음과 같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만일 제(마일즈 호튼)가 전문가라면, 저의 전문성은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으며, 전문가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169쪽)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을까? 옹색하게 자기 논리에만 빠져 살아가는 외통수가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한계와 경계 확장의 문제가 부각된다. 말 그대로다.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한계와 자신의 삶의 경계를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자신의 경계를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간 나머지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스스로가 이제 자신을 둘러싼 경계 안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은 일단 한계 바깥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훨씬 더 행복해집니다. 덫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참을 수 없게 되지요.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185쪽)

물론 우리가 그 경계를 무한정 늘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한계 밖으로 나가는 일이 진정한 해방의 삶을 주는 측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를 감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권력자의 강제나 조직의 명령과 같은 외적인 이유로 경계 밖으로 밀려나는 일은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경계를 늘리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자세가 아닐까.

"나는 무얼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알아야 한다. 현장으로 가서 참여하자. 다른 이와 소통하면서 함께 하자."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설지만 경이로운 연대의 감동을 느길 수 있다. '붕어빵' 집회에 대한 말들도 많지만, 우여곡절 끝에 집회 한 번 다녀온 사람이 대오각성하여 열정적인 활동가가 된 사례가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세상을 모두 안다는 듯한 태도부터 버리자. 정말 나는, 그리고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한 지인에게서 20대 후반의 역사 교사가 지난 대선 토론회를 보고서야 박정희의 창씨개명한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는 놀라우면서도 놀랍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를테면 기존의 '박정희 = 박정희'와 새로운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겠지만, 후자를 새로 알게 된 어떤 이들은 자신의 근현대사에 대한 관점을 전혀 새롭게 쓸 수도 있을 것이겠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이유다.

프레이리가 들려주는 얘기 한 토막을 보자. 한 아카데믹한 대학생이 낚시를 하고 돌아오는 어부를 만났다. 대학생은 어부에게 지금 우리 대통령이 누구인지 물었다. 어부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대학생은 참지 못하고 내처 주지사와 주(州)의 이름에 대해서도 물었다. 하지만 어부는 한결같이 모르겠다고 말했다. 잠시 후 어부가 대학생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람 이름을 물어보니 나도 좀 묻겠습니다. 당신은 이 물고기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대학생은 모른다고 했다. 어부가 다른 두세 종의 물고기를 계속 물어봤는데도 대학생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부가 말했다.

"아시겠지요? 누구나 모르는 게 있는 법입니다."

프레이리와 호튼이 '민중의 경험에서 출발하라'는 주제의 대화를 나누는 대목(194쪽)에 실려 있는 얘기다.

정말 우리는 모두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는 각자 알고 있는 게 결코 적지 않다. 더군다나 우리 모두는 살아온 경험도 다르고 지금 살아가는 모습도 다르지만, 모두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우리가 어딘가로 걸어가면 그곳은 곧 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노쉰의 <고향> 끝 대목을 음미해 보기 바란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파울로 프레일·마일스 호튼 지음 | 프락시스 옮김 | 아침이슬 | 2006.11. | 1만3000원)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파울로 프레이리 외 지음, 프락시스 옮김,
아침이슬, 2006


#파울로 프레이리 #마일스 호튼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사회 혁신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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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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