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은 안 받겠다고 실랑이, 한쪽은 10배 폭리

[불혹 배낭여행기 19] 베트남, 자존심과 바가지 상혼 기묘한 동거

등록 2013.02.19 15:10수정 2013.03.2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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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의 왕궁. 몰락한 왕의 거처는 쓸쓸한 상념을 부른다. ⓒ 서영진 제공


정본이건, 축약본이건, 그게 아니면 만화로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을 중국의 고전 <삼국지>. 거기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맹획칠금(孟獲七擒)이다. '맹획이란 사람을 일곱 번 잡아들이다'로 해석하면 되려나.

전후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촉나라의 승상 제갈공명이 '남쪽 오랑캐'(남만·南蠻)를 정벌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베트남 일대를 침략한다. 당시 남만의 우두머리가 바로 맹획. 무시무시한 완력과 두려움을 모르는 배짱으로 이름 높았던 장수다. 제갈공명의 군대에게 일곱 번을 사로잡혀 일곱 번의 고초를 겪었음에도 맹획은 결코 "내가 졌다. 항복이다"란 말을 하지 않았다.

이 고사를 통해 중국 입장에선 공명의 넓은 아량과 상대를 압도하는 빼어난 전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불리한 전쟁에서 생포된 장수가 일곱 번을 다시 목숨 걸어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는 게 쉬운 일인가? 그처럼 맹획은 굴복을 모르는 자존심 덩어리였다. 바로 그런 베트남식 기질이 지구 위 초강대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을 자기 땅에서 몰아낼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었는지도 모른다. 

후에, 기차를 타고 새벽에 도착한 조용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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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을 모방해 만들었다는 후에의 왕궁. ⓒ 서영진 제공


수백 km에 이르는 냐짱-후에 구간을 베트남 종단열차가 오후 내내 힘겹게 달렸다. 지친 철마가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춘 곳은 후에. 불과 7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곳.

새벽 2시. 역 주변은 물론, 도시 전체가 깊은 잠에 들어 사위가 캄캄절벽이었다. 가로등도 없고, 달빛도 졸고 있다. 왕조의 중심지였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전형적인 조용한 시골마을 분위기.

숙소부터 구해야했다. 가지고 있던 낡은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을 펼쳤다. 후에 관련 정보는 지극히 적었다. 겨우 하나 발견한 숙소 이름은 '민꽝 게스트하우스'. 그런데 책에 실린 조잡한 지도만으론 도무지 찾을 자신이 없다. 그때다. 기차에 동승했던 청년 서너 명이 내게 다가와 묻는다.

"도와줄까요?"

후에에서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지금은 제각각 다른 도시로 떠나 대학에 입학하거나, 일을 한다는 20대 초반의 베트남 젊은이들. 그러니까, 고교동창 야유회 비슷한 걸 떠났다가 나와 같은 기차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숙소 찾기 고민은 해결. 함께 맥주라도 한 병씩 하라며 내가 내민 5달러 지폐를 한사코 마다한다. 이방인에게 베푼 호의를 몇 푼의 돈으로 계산 받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다.

민꽝 게스트하우스는 가족이 운영하는 작고 소박한 곳이었다. 온갖 꽃나무가 흐드러진 정원을 바라보며 발코니에서 마시는 달콤한 베트남 커피가 나쁘지 않았다. 연유를 듬뿍 넣은 베트남식 커피에선 초콜릿 향기가 났다. 평소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지만, 민꽝 게스트하우스의 드립 커피는 좋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아주머니와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들은 커피는 물론, 바나나와 파인애플, 드래곤 후르츠 따위를 머무는 사흘 내내 무료로 줬다. 로비에 앉기만 하면 그것들을 내왔다.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성의가 고마웠다.

후에를 떠나는 날. 예상한 금액보다 적은 숙박료를 요구해서 한 번 더 놀랐다. "난 사흘을 묵었는데, 왜 이틀 치만 계산한 건가"라고 물으니, 영어가 서툰 아주머니를 대신해 아들이 답한다. "첫날은 새벽에 왔잖아요, 그날 건 계산에 포함 안 시켰어요."

대신 커피와 과일값을 지불하겠다는 나와 "그건 어떤 손님에게나 공짜로 주는 것이니 받을 수 없다"는 주인 모자와의 즐거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제갈공명과 맹획처럼 피 튀기는 것이 아닌 웃음 섞인 유쾌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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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의 왕궁에선 코끼리를 만날 수 있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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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맑은 강이 흐르는 시골 풍광과 만날 수 있다. ⓒ 홍성식


자금성 닮은 왕의 궁전에서 쓴 바가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추억은 후에가 남긴 즐거운 기억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짜증과 스트레스를 불렀던 사건도 없지 않았다. 후에 체류 이틀째.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다는 숙소 인근 왕궁을 구경갔다. 왕이 머물던 시절에는 왕과 처첩, 극소수의 측근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는 내밀한 구역이 인상적이었다. 몰락한 왕조의 쇠락한 궁전은 쓸쓸한 감상을 불렀다. 흥망과 성쇠, 영화와 몰락의 부침.

뻗어나가는 우울한 잡념도 떨칠 겸 궁전 안에서 코끼리를 탔다. 그 옛날 베트남 왕조의 귀족처럼 코끼리에 올라 궁을 한 바퀴 돌아보는 프로그램이 관광객을 위해 마련돼 있었다. 햇살 따가운 늦봄. 차양막 드리운 거대한 짐승의 등에 올라 왕이 살았던 궁전을 여유롭게 어슬렁거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문제는 코끼리에서 내려 마른 목을 축이러 들렀던 궁전 내 노천카페에서 일어났다. 후에의 특산품 중 하나인 '후다 맥주(Fuda beer)'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맥주'로 불린다. 머물던 게스트하우스와 동네 구멍가게에선 30센트(약 330원)에 사서 마셨다. 그런데 3달러(약 3300원)를 내란다. 어쩌겠나. 유명 관광지에서 흔히 보는 바가지 상혼이라 생각키로 했다.

그런데 이것 봐라. 내 옆 테이블에 앉은 유럽에서 온 여학생에게는 같은 맥주임에도 5유로(7500원)를 받는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게 좋지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가만있기가 뭣해서 조용히 주인을 불러 항의했다. "맥주 한 병에 7500원이라니 한국보다 비싸다. 너무 한 거 아니냐?" 돌아온 대답에 더 할 말이 없었다.

"너희는 부자 나라에서 왔잖아. 그리고 내가 저 여자애에게 얼마를 받든 너와 무슨 상관인데?"

솟는 짜증에 남은 맥주를 단숨에 비우고 인근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커피를 가져다주며 3달러를 선불하란다. 이것 참…. 동네에서 파는 베트남식 커피 가격은 평균적으로 25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맥주도 커피도 10배의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맞은편에 앉은 백인 사내에겐 또 얼마를 받을지.

더위에 화까지 내면 불쾌지수만 높아지고, 그러면 나만 손해다 싶어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자리를 떴다. 갑작스레 피곤해졌고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궁전 밖으로 나오니 베트남의 전통 교통수단인 시클로(자전거 택시)가 줄을 지어 서있다.

무더위에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의자에 앉으며 요금을 물었다. 이런 빌어먹을…. 30달러란다. 궁에서 민꽝 게스트하우스까지는 1km가 채 안 된다. 3만3000원이면 서울에서 분당까지 택시를 타고 갈 수 있는데.

자존심과 바가지 상혼의 불안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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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꼬마숙녀와. 이 아이들이 자존심과 긍지를 가지고 보다 밝은 미래를 살 수 있기를. ⓒ 홍성식


몰락한 왕의 궁전에서 당한 연이은 바가지. 시클로 타기를 포기하고 터벅터벅 걸어 숙소를 향하며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인천공항에 상주하며 한국을 찾는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수십 배의 폭탄요금 바가지를 씌운다는 악질 택시기사에 관한 보도가 떠올랐고, 일본인에겐 한국인보다 높은 가격을 받는다고 당당히 말하는 명동의 먹거리 노점상 인터뷰도 생각났다. 남을 통해 우리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보는 마음은 참담했다.

베트남은 자존심에 기반한 독립정신으로 세워진 나라다. 거듭 사로잡히면서도 항복을 입에 담지 않았던 맹획의 자존심, 독립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힘을 모아냈던 호찌민의 자존심, 어린 나이에 마주선 총구 앞에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던 열일곱 열혈소녀 보 티 사우….

그런 나라 베트남을 나는 내심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돈 몇 푼에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남의 자존감까지 상하게 하는 바가지 상혼의 장사치들을 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판단키가 어려워진다. 그 판단유보의 심정은 베트남을 떠나는 날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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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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