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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일제의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조선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94년이 되는 오늘, 나는 만인에게 아주 끔찍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고발하고자 한다. 지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대통령소속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이하 '친일 재산조사위')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알게된 그 이름, 바로 '친일 반민족행위자 하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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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재산을 되찾기 위한 범정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2007년 현판식 모습. ⓒ 오마이뉴스 남소연

친일 재산 국가귀속 대상자는 누구였나?

2010년 1월 어느 날이었다. 2006년 7월 출범한 친일 재산조사위는 마무리 업무에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애초 위원회 출범 당시 예정되었던 활동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법에 의하면 친일 재산조사위는 기본 업무 기간인 4년 경과 후 1회에 한해 2년간 기간 연장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것이 어려웠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친일 재산조사위를 비롯한 과거사 관련 기구의 활동 기간 연장을 '사실상'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나라에서 친일파 문제를 다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1948년 제헌 국회에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집행하기 위해 설치했던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지 채 1년도 못 되어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강제 해체된 사실이나 이후 '친일 재산조사위'가 연장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을 다 써보지도 못한 채 중단된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해야할 일을 다 했다면 더 운영할 일은 없다. 하지만 지난 36년간 있었던 일제 강점기 동안의 일을 고작 4년동안 모두 처리하라는 것은 발상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당시 친일 재산조사위가 친일 재산의 국가귀속 업무를 한 대상은 친일 반민족행위자만이 아니었다. 일제 수탈기관이었던 동척을 비롯하여 해방후 반세기가 넘도록 대한민국의 영토가 일제 강점기 지주였던 일본인 명의 토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러한 토지 역시 국가귀속 대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친일파 소유의 땅임에도 전쟁 과정에서 행방불명되거나 그 후손이 끊겨 관리가 되지 않은 토지를  토지 브로커와 지역 주민들이 공모하여 가로챈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친일파의 재산을 조사하여 국가 귀속하는 한편 관련자들을 수사기관에 고발 조치하는 일도 우리가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바로 잡기에도 4년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해방은 되었지만 친일파에 대해 제대로 단죄된 적도 없었고 정리된 적도 없이 사실상 방치되어 왔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데도 당시 이명박 정부는 그저 종결하라는 것이었다. 참담했지만 지시를 '따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겠는가. 당시 과거사 관련 기구가 대부분 비슷한 실정이었다.

일본 경찰보다 더 악랄했던 조선 순사 '하판락'

그때였다. 업무 종결을 앞두고 분주하던 그때 새로 사건이 조사과에 배당된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마무리 업무에 바빴기 때문에 뒤늦게 배당되는 사건을 조사관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마무리 업무로 분주한 상황에서 새로운 사건을 배당하니 좋아할 수 없지 않겠는가. 여하간 그렇게 해서 내가 배당받은 대상자가 바로 '하판락'이라는 일제 강점기 친일 경찰이었다.

이름이 독특하다고 생각하며 기초자료로 전달된 '국가귀속 대상 재산 목록'을 살펴봤다. 대상 재산을 전부 다 합쳐도 얼마 되지 않는 평수였고 그나마 하천부지라서 사실상 재산적 가치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다. 그래서 솔직히 처음엔 그렇게 크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굳이 이런 사건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완전히 바뀐 것은 하판락의 친일 행각을 확인하면서 부터였다.

191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하판락은 1930년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 2월 처음 순사로 일제 경찰이 되었다. 그런 하판락이 사천경찰서를 거쳐 38년 부산 수상경찰서의 순사부장과 경부보로 승진하면서 고등 경찰로서 '고문 귀신'이라는 악명을 떨쳤다.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시대 최고의 고문 경찰은 바로 '하판락'인 것이다. 그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고문하는 귀신'이라는 '고문귀'가 그의 별명이었겠는가.

하판락이 이같은 악명을 얻게된 계기는 1930년대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명을 집단 고문하면서부터 였다. 이 당시 고문당한 김준기씨 증언에 의하면 하판락은 자신 역시 조선인 출신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김준기씨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분개했다.

하판락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면 알수록 기가 막힐 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자가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한 고문 행위가 얼마나 극악했던가에 대한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고발이었다. 1943년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여경수와 이광우 등 7~8명에 대한 고문이 그것이었다.

당시 하판락은 독립투사 여경수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거듭 부인하는 그의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전기 고문, 물 고문, 다리 고문 끝에 여경수, 이미경 등 3인이 끝내 절명한 것이다. 또한 그나마 살아남은 이광우 선생을 비롯한 같은 사건 관련자의 운명 역시 크게 다르지 못했다. 하판락의 잔혹한 고문으로 모두가 신체 불구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이후 재판에 넘겨져 4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또 겪어야 했다. 한편 이러한 잔혹한 고문 덕에 하판락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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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재산조사위 2주년 기념식장 앞에는 주요 친일반민족행위자 행적 등을 전시했다. ⓒ 이철우

'착혈 고문귀 하판락'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같은 죄상이 '하판락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친일 재산조사위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이 잔악한 친일파의 만행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독립운동가에게 자백을 강요하며 하판락이 자행한 이른바 '착혈 고문'이 그것이었다.

지난 200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된 하판락의 고문 행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광우 선생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광우 선생은 하판락이 가한 '착혈 고문'을 고발했다.

1943년, 하판락은 당시 사상운동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어온 이미경 등을 고문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이미경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했다. 그리곤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하나 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착혈 고문'이었고 결국 이같은 고문 끝에 여경수 등 독립투사 3명이 목숨을 잃었고 설령 살아남은 이들은 신체 불구자가 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를 만나면 직이뿌라. 그는 사람이 아니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

하판락의 고문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폭로한 이광우 선생. 그는 자신의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받기 위한 증거 수집차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해방후 하판락,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최근 독립운동가의 후손 분들을 몇 번 뵐 기회가 있었다. 그때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예우하지 않는 이 나라 현실을 두고 안타까움을 표현하자 그 분들이 하신 말씀중에 내 가슴을 치는 몇 마디가 있었다.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님의 아들 차영조 선생님의 말씀도 그중 하나였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우리 민족이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갑작스러운 말씀에 멀뚱히 바라보니 그분 말씀이 "진짜 해방된 것은 친일파"였다고 덧붙였다.

선뜩 이해하지 못한 나에게 그분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이 잘 먹고 잘 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본 놈들 아래에 있었던 거잖아요. 순사도 경찰서장은 일본 놈이었고 관리도 높은 직책은 일본 놈들이 하고 있었으니. 그런데 45년에 일제가 패망하여 물러나니 그 후에는 그나마 자기들 위에서 지배하던 일본 놈들도 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친일파들이 차지 했잖아요. 경찰서장이고 장관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진짜 해방된 자들은 바로 친일파 아닙니까"라는 것이었다.

하판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일 경찰 하판락은 '오히려' 더욱 잘 나갔다. 해방후에도 하판락은 미 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인 적산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46년 6월에는 경남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되었다.

그러한 하판락에게 잠시나마 역사적 단죄가 찾아온 것은 1949년 1년의 일이었다. 하판락이 부산에서 반민특위에게 체포된 것이다. 하판락의 고문으로 사망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반민특위에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1949년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부산시민들이 애원할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충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반민특위에 의해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하판락은 끝내 자신이 한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끝내 부인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 발생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하판락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일제 강점기부터 형성한 재력을 가지고 사업가로 변신, 엄청나게 많은 돈을 모았고 2003년 9월까지 향년 92세의 천수까지 누리며 살다가 떠났다. 친일파로서 가장 끝까지 살다가 떠난 이가 하판락이었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할 당시 명단에 든 대상자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친일파가 바로 하판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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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 고문 경찰 하판락' 잊지 말아야

용서해야 할 것과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민족은 결코 번성할 수 없다. 94주년 '3. 1 독립운동 기념일'을 맞아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고 내려놓은 독립운동가 한 분 한 분을 생각한다. 그들이 친일 고문경찰 하판락으로부터 그 지독한 고문을 당하며 죽어갈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내가 너에게 이렇게 당하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그날에는 친일파인 네가 반드시 이렇게 당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네가 한 이 짓을 만인이 알아 네가 편히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까지 제대로된 친일파 청산도 이뤄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민초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오늘 나는 그의 이름을 나무판에 새기듯 고발한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하판락' 그가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에게 가한 '고문 만행'은 역사적 심판을 위해 남기고자 한다. 또한 하판락의 고문으로 숨져간 여경수, 이미경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외 신체 불구가 되어 참담한 생활고 끝에 생을 다한 모든 독립운동가 분들에게 후손으로서 위로하고 사죄드린다.

끝으로 94주년 3. 1 독립운동 기념일을 맞아 마음을 다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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