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만세'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 대한민국

칼라스, 드레퓌스, 채플린의 눈물 그리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

등록 2013.03.26 14:51수정 2013.03.27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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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항이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이 민주공화국의 필수적인 요소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돌이켜보면 이 나라가 정말 민주주의 국가가 맞는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최근 국방부가 천주교에서 추천한 군종신부 3명을 탈락시켰다. 면접에서 '제주 해군 기지,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한 질문에 "잘못된 과정으로 사람들이 아파하는데, 그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이겠는가", "분단국가의 60년 응어리가 곪아터진 것이다. 사제 입장에서 어느 한편에 치우친 대답을 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답변을 한 군종 신부 후보가 탈락했다. 이는 유신시대에도 없었던 일로 군종제도가 생긴 이래 사회문제에 대한 견해를 이유로 탈락시킨 건 처음이라 한다.

이런 일은 또 있다. 새 학년을 맞이하여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의 만남이 한양대, 전북대 등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흉하게 찢어지고 결국 대학 본부가 강연 장소 대여를 불허 또는 취소하여 행사 자체가 무산됐다.

이정희 대표나 진보당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 본부에서 나서서 정치적 논란을 이유로 공당 대표의 강연 자체를 막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나 새누리당, 민주당 대표가 대학교에서 강연을 한다고 해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장소 대여를 불허할까?

국방부, 경찰청, 국정원까지... 참 웃긴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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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자격심사 청구안 막아달라"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자신과 김재연 의원에 대한 자격심사안을 공동 발의 관련 신상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이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기 전 비례대표 경선 과정 문제와 관련하여 아무런 혐의가 없다고 결론이 난 조건에서 자격심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법조인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며 상식"이라며 "지난 해 검찰이 장장 7개월 동안 먼지털이식 수사를 벌였지만 저에 대한 어떠한 혐의점도 증거도 없어 결국 입건조차 하지 못하였다"며 자격심사 청구안 발의에 대해 비판했다. ⓒ 유성호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김재연 의원에 대한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국회 자격심사안 제출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국회의원들끼리 진보당을 좋아하든 말든, 김재연·이석기 의원을 좋아하든 말든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6개월 간의 검찰 수사 끝에 구속, 기소는커녕 입건도 못한 두 의원을 부정선거, 종북 의원 운운하며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시키겠다고 나서는 것은 참으로 웃긴 일이다.

새누리당이야 원래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당까지 여기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것은 이승만 정권에서의 진보당 조봉암 당수 사법살인과 박정희 비판을 이유로 한 민주당 김옥선 의원 제명 그리고 유신 말기 김영삼 의원에 대한 제명과 같은 반민주적 행태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2013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가 맞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최악의 사태는 국정원과 국방부, 경찰청 등의 '내부의 적', '종북' 어쩌고 하는 국민 사상 검증, 정치개입 논란이다. 국방부는 참여연대, 한대련, 전교조 등을 종북세력으로 낙인 찍는 정훈 교육을 하고 있다가 적발되었으며, 경찰청도 정권에 비판적인 시민운동까지 종북 세력으로 편가르기를 하고 있었다. 국정원은 민주노총, 전교조 등을 아예 '내부의 적'으로 낙인찍고, 심지어 야당 후보를 비판하는 댓글 달기 공작까지 하고 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행태들이 원세훈 국정원장의 지시 사항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2013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사건들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기 힘든 것들이다. 현재 우리 인류가 이 정도라도 누리고 있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피와 눈물로 얻어낸,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이 소중한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사건들 몇 가지를 살펴보자.

[사건①] 장 칼라스 재판 사건과 볼테르의 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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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 오른쪽은 볼테르가 쓴 <관용론> 볼테르는 가톨릭신자이지만 신교도인 칼라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당시 프랑스 사회의 광신적 불관용을 비판하며 관용론을 주장했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탄압받는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당신의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 (볼테르)

사상의 자유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의 명언이다. 볼테르가 언제, 왜 했는지 분명하지 않으며, 심지어 이 말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지만 볼테르의 생애를 보면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은 명확해 보인다. 그는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1762년 프랑스 톨루스에서 장 칼라스라는 노인이 아들 살해 혐의로 재판에서 사지를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는, 이른 바 '장 칼라스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의 권위를 정점으로 한 앙시앙레즘(구체제)이 지배하던 사회였는데, 칼라스는 신교도였다.

변호사가 꿈이었던 칼라스의 아들 마르크 앙뚜안은 신교도라는 이유로 꿈이 좌절된 후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했다. 곧 변호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가족들이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고, 칼라스 가족들이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에도 살해 증거가 나오지 않았지만 칼라스는 수레바퀴에 사지를 매달아 찢어 죽이는 거열형을 당했고 가족들에게는 추방령이 내려졌다.

볼테르는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이 사건을 알게 된 후 전단을 만들어 뿌리는 등 재판의 부당성을 알렸는데, 결국 칼라스는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가 거열형을 당한 지 3년 후였다. 볼테르는 이 투쟁을 통하여 그 유명한  <관용론 Traité Sur La Tolérance>을 썼다.

여기에서 종교적 광신과 불관용이 평범한 한 시민과 가정을 얼마나 무참히 파괴하였는지, 당시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고발했다. 또한 인간의 자유와 이성이 종교적 불관용에 앞서야 하며, 이것이 억압당하는 순간 종교는 광신이 되어 인간을 짓밟는 도구로 전락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신은 우리에게 미워하라고 마음을 준 것이 아니며, 서로를 죽이라고 손을 준 것도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2013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돌아볼 말이다.

[사건②] 드레퓌스와 에밀 졸라... 맹목적 애국주의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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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나는 고발한다' 프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폭로한 에밀 졸라의 공개 서한. 오른쪽은 '분노에 찬 프랑스 군중들에 둘러싸인 졸라' 앙드 드 그루 작(1898년)


1894년 9월 프랑스 군부는 군사 기밀을 적국 독일에 유출한 혐의로 알프레드 드레퓌스(Dreyfus) 대위를 체포했다. 드레퓌스는 극구 부인했지만 군부는 비공개 군법회의를 열어 종신금고형을 선고하고 그를 이역만리 악마섬에 유배시켰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이유었다.

프랑스 군중들은 전쟁 당사국인 독일 간첩인 드레퓌스에게 사형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년 뒤 에스테라지 소령이 진범임이 드러났지만 프랑스 군은 국익을 내세우며 에스테라지에게는 무죄를 선고하고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이들을 국가안보를 해치는 세력으로 매도했다.

진실을 알게된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로로르'(여명지)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드레퓌스는 1899년 어렵게 재심을 받게 되지만 프랑스 군부는 다시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후 특별 사면을 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복직하게 된 것은 사건 12년만인 1906년이었다.

이 과정에서 에밀 졸라는 엄청난 시련에 직면한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한 그는 프랑스 의회로부터 프랑스 군에 대한 중상모략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과 벌금 3천 프랑을 선고 받는다. 그것도 모자라, 적국의 간첩을 옹호하는 이적행위를 한다는 이유로 성난 프랑스 국민들에게 테러 협박에 시달린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졸라는 결국 영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과 독일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였던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졸라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졸라는 쫓겨나다시피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그의 예언대로 평생의 업적인 책은 거리에서 불탔고, 프랑스 국민훈장(레지옹 도뇌르)도 박탈당했다. 맹목적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 적국의 간첩이라는 마타도어 앞에 진실을 향한 졸라의 외침은 매국으로, 간첩 옹호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이런 맹목적 애국주의에도 에밀 졸라와 아나톨 프랑스 등 당대 진보 지식인들은 이런 맹목적 애국주의에 맞서 진실을 향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드레퓌스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 1899년 졸라는 영국에서 조국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3년 뒤인 1902년 가스 중독 사고로 사망했고, 죽은 후 그의 죄는 사면되었다.

전쟁 당사자이자 적국 독일을 편들고, 유대인을 옹호하는 그 어떤 논리도 받아들여지지 않던 당시 프랑스의 분위기는 한국 전쟁 후 60년이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 분위기와 너무도 닮았다.

[사건③] 찰리 채플린과 매카시... 매카시즘과 한 천재 예술가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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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의 1921년 작품 <키드>의 한 장면 ⓒ 찰리 채플린

1950년 2월,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조셉 매카시는 국회에서 가방 속의 서류 뭉치를 흔들며 "이 안에 국무부에 있는 205명의 공산주의자(소련의 스파이) 명단이 있다"고 폭로했다. 이 폭로로 온 미국을 뒤흔들었던 매카시 광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소련 스파이 어쩌고, 공산주의자 어쩌고 하는 그의 폭로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CBS 머로우 기자 등의 진실 보도와 청문회 등을 통하여 그의 폭로가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매카시 광풍의 후과는 실로 엄청났다. 공산주의나 소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정치인, 과학자, 예술인, 심지어 일반 노동자들까지 형사 처벌 위기에 내몰리고, 직장을 잃어야 했으며, 이웃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매카시즘의 피해자의 수를 정확하게 집계하기조차 힘들다. 수백 명이 반미국 활동조사위원회에 소환을 당하고 조사를 받았다는 이유로 수감되었으며 1만 명이 직장을 잃어야 했다. 특히 영화계에서는 300명이 넘는 배우 및 작가, 감독들이 비공식적인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해고당하거나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극작가 아서 밀러,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 및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과 함께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자 배우였던 찰리 채플린은 예술계의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모던 타임즈'와 '위대한 독재자' 등으로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채플린은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그의 영화는 상영이 중단되고, 조국에서 쫓겨나는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그가 63세이던 1952년 영화 시사회를 위해 영국 런던에 갔을 때 미 법무부는 그의 귀국을 불허하는 조치를 발표했고, 결국 고국인 미국에서 추방되었다. 강제로 쫓겨나다시피한 그는 스위스로 망명하였고 1972년 아카데미 특별상 수상을 위해 단 한번, 잠깐 방문한 것을 제외하면 1977년 스위스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찰리 채플린이라는 천재 예술가는 냉전시대 공산주의자, 소련 스파이라는 딱지붙이기의 희생양으로 그렇게 외롭게 영욕의 삶을 마감하였다.

50년 전 김수영이 본 2013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일까?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김일성만세', 김수영, 1960.10.6)

김수영 시인이 1960년에 썼다는 '김일성 만세'라는 시이다. 50년 전 김수영이 보기에 당시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가 없는 나라였다. 당연히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다. 김수영은 한국 전쟁 때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포로로 잡혀 거제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 시를 통해 김일성이 훌륭하다고 찬양하라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자유의 가치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자였다. 언론출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없고, 자유주의도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모국인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등이 공산주의를 허용하고, 우리와 똑같이 내전을 겪었고 분단되어 있으며  우리보다 훨씬 안보 상황이 불안한 대만까지 공산당을 헌법으로 허용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지금 인류가 누리는 이만큼의 사상의 자유, 이만큼의 민주주의도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가치이며, 우리 역사의 소중한 유산이다. 그런데 우리는 칼라스와 드레퓌스, 채플린의 눈물을 잊은 듯하다. 그들을 지키려 했던 볼테르와 에밀 졸라, 머로우 기자의 노력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진보당 조봉암 당수의 억울한 죽음도 우리는 잊었다.

김수영이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쓴 지 50년이 더 지났지만 우리는 그 때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듯하다. '빨갱이 사냥'은 '종북세력 타도'로 이름만 바꾸어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으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여전히 차가운 감옥 속에 갇혀 있다. 김수영이 2013년 대한민국을 보면 민주주의 사회가 맞다고 할까?
#사상과 양심 #이정희 #채플린 #칼라스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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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회와 민족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세상 사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글도 써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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