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이정희를 위해 싸워줄 수 있을까

[주장]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진실

등록 2013.04.05 11:27수정 2013.04.1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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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0일 오후 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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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통령선거 날인 지난해 12월 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언주중학교에 마련된 삼성2동 제3투표소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기표를 마친 뒤 기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절차적 민주주의는 성취했으나 내용적 민주주의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국민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는 절차에 관한 것으로, 한국에서 선거 경쟁 만큼은 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내용적 민주주의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 선출된 정부가 국민 다수가 누릴 수 있는 정책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경제 민주주의'가 좋은 예이다. 그런데 한국은 과연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한 것일까? 이제 경제적 민주주의에 집중하면 되는 것일까? 이런 낙관적 판단에 의문이 제기되는 몇 가지 점을 논의해 본다.

우선,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가장 핵심으로 이야기되는 선거 경쟁에 대해서 살펴보자. 민주주의 선거는 1인 1표라는 매우 민주적인 제도임과 동시에, 대표자를 선출하여 통치하는 매우 '제한적인' 제도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직접 민주주의, 전원 참여 민주주의는 작은 단위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불가능하다.

단적인 예로 100명이 모여서 오늘 저녁 무슨 음식을 먹을지를 결정하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상상해보라. 그래서 수천만 명의 국민을 대신하여 국가를 운영할 대표자를 선출한다. 즉 민주주의는 국민이 직접 통치하는 제도가 아닌, 선출된 대표자를 통한 위임 통치 제도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권력을 위임한 국민과 권력을 위임받은 대표자 사이에는 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은 손에 쥔 권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싶어하게 되고, 권력을 위임한 국민들은 대표자들을 불철주야 일거수일투족 감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거, 국민과 대표자 사이의 '불완전한 계약'


'성실한 위임'이라는 선거의 계약을 위반한다면 권력을 돌려줘야 하지만,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이런 계약 위반을 처벌할 방법은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 없다. 따라서 민주적 선거란 국민과 대표자 사이의 매우 '불완전한 계약'이다. 민주주의는 링컨의 유명한 말처럼 "국민에 의한 정부"일 수는 있으나 "국민을 위한 정부"를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다.

이런 불완전한 계약을 보완하기 위해 국민소환제, 국민탄핵제, 국민투표제, 또는 시민저항을 통한 직접적 의사 표시 등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깨어 있는 시민사회가 필요하다. 임기 중 일어나는 대표자의 계약 위반에 대해 국민이 목소리를 내고, 그런 대표자에 대해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불완전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그나마 유의미하게 만드는 전제는 국민 개개인과 정치적 결사체들이 자신의 다양한 의사를 자유롭게 개진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온갖 사상이 쟁명하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보장해야 하고, 국민은 이 사상의 시장에서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과 정책을 주창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거를 통해 유권자 다수의 선택을 받은 정치세력이 정해진 임기 동안 통치의 권한을 위임받는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 사이클이다. 즉 절차적 민주주의는 1인 1표라는 선거뿐 아니라, 그 기본 전제로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공존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저마다 처지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민 개개인을 비롯한 사회의 다양한 집단, 계급이 서로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정책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자본가가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하듯, 노동자가 노동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또한 정당하다. 전자는 국가 발전이고 후자는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부여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18세기 사상가 볼테르의 말대로,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발언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오"라는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여기서 핵심은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이다. 민주주의와 압제정치의 결정적 차이는 나와 입장이 다른 세력을 무력으로 압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와 다른 주장을 한다고 입을 틀어막거나, 매도하고 각색해버리거나, 직업과 재산을 빼앗거나, 감옥에 집어넣거나, 극단적으로는 암살, 처형시켜버린다면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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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 윤성효


여기에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점이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을 참지 못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토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배제와 탄압의 대상으로 일삼는다. 일부 언론은 '사실(fact)'을 보도하는 대신 자신이 원치 않는 사실을 매도하고 왜곡하는 데 더 익숙하다. 인터넷 강국이라는 한국 온라인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은 언제 뒷덜미가 잡힐지 모른다. 노동자들은 권리 주장을 하면 해고 당하기 십상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방송인은 일자리를 빼앗긴다.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건재하다.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한 탄압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진 한국의 보수 측이 더 많이 자행하지만, 진보 진영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통합진보당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나와 다른 주장을 듣지 않고 무력으로 대립해서 발생한 일이다.

이런 한국의 현실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제적 비교 자료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의 데이터에 잘 반영되어 있다(http://www.freedomhouse.org/reports, 1-7에서 숫자가 낮을수록 민주적).

1973년 자료부터 등장한 한국은 독재 국가(Not free : 정치적 자유 5, 기본 시민권 6)에서 시작하여 1988년부터 민주 국가(Free : 정치적 자유 2, 기본 시민권 3)로 분류되었고, 2005년에는 정치적 자유 1, 기본 시민권 2로 올라섰다. 그런데 다른 민주 국가들과 달리 기본 시민권은 아직도 2로 남아 있다.

게다가 같은 자료는 한국을 언론의 자유와 인터넷의 자유 부분 모두에서 부분적 자유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하는 세계언론지수(Press Freedom Index)와 같은 다른 자료들도 한국의 상황에 대해 비슷한 수치를 보여준다.

예컨대 한국의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이 발언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삼성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삼성이 발언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햇볕정책과 같은 대북 정책에 동의하지 않지만" 햇볕정책을 주창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친미라는 대미 정책에 동의하지 않지만" 친미 정책을 주창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덕성여대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등이 참여하는 강연회를 '정치활동'이라며 불허해 논란이 되고 있다. 통합진보당 대표가 대학에서 강연을 하겠다고 하면 허하면 된다. 참여할지 거부할지, 동의할지 반대할지 대학생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만약 삼성에서, 또는 국가정보원에서 취업설명회를 하겠다고 해도 허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본인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민주주의는 주장과 사상이 교환되는 '시장'

누구나 자기 주장을 하도록 허하면 대혼란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과 마찬가지로, 온갖 주장과 사상이 교환되는 민주주의라는 시장도 자기 질서를 회복하는 자기 기재가 있다. 형편없는 물건을 가지고 아무리 약장사 광고를 해도 그런 물건은 곧 시장에서 팔리지 못한다.

소비자가 바보가 아니듯, 국민도 어리석지 않다. 국민 각자 알아서 판단한다. 국민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가르치고 선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국민을 계몽, 계도의 대상이라 생각하는 것은 식민 지배자, 독재 권력자의 사고방식이다.

서로 자기 물건을 팔겠다고, 사고 싶은 물건 값을 깎겠다고 왁자지껄한 것이 시장의 본 모습이자 매력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주장하고 토론하고 합의하고 반대하느라 시끌시끌한 것이 민주주의의 본 모습이다. 친노동 주장을, 친자본 주장을, 대북 유화 정책을, 대북 대결 정책을 민주주의라는 사상의 시장에서 시험받게 하면 된다. 국민이 알아서 선택하고 걸러낼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이런 기본 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결국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정치 엘리트에게 통치 권한을 위임하는, 그래서 그들이 국민의 비판과 감시를 받지 않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하는 제도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과연 박근혜 정부는 "박근혜 정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줄 수 있을까?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미국 빙햄턴대학 교수입니다.
#민주주의 #선거 #국민을 위한 정부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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