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왕' 미끼로 책읽기 권하는 어른들, 속보인다

[주장] KBS어린이독서왕 대회, 공익적 독서문화 망친다

등록 2013.04.11 18:43수정 2013.04.1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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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독서왕대회 홈페이지 화면 ⓒ KBS한국어진흥원


한국방송 한국어진흥원과 한국방송(KBS)이 초등학교 3~6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KBS어린이독서왕 대회'(오는 9월 방송 예정)를 전국 규모로 열겠다고 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학교에서 1차 예선을 치른 뒤 시·도교육청의 2차 예선에서 100명을 선발하여 결선을 치른다. 대회에 참가하려면 선정도서 20권을 읽어야 한다.

한국어진흥원은 학생 및 학교 참여를 많이 끌어들일 요량으로 '학교별 학생 참여율과 평균 성적에 따라 도우미 점수가 배정되며, 배정된 도우미 점수는 KBS 공개 녹화에 진출 시 학교 대표에게 가산점'으로 준다고 밝혔다. 아이들이 하도 책을 읽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읽혀볼 생각이었까?

책 읽기를 시험으로 평가한다는 발상도 우습지만, 선정도서에 딸린 부록 예상문제에서 유사한 문제를 내겠단다. '선정도서 부록으로 부착된 예상문제와 유사한 내용을 기준으로 90% 이상 출제되며, 10% 이내에서 선정도서 범위(지역 역사, 환경 등) 이외의 문제가 출제한다'는 출제 기준까지 친절하게 제시해놓았다. 조금만 꾀가 있는 아이라면 깊이있는 책 읽기보다는 예상문제만 달달 외울 게 뻔하다.

아이들을 책읽기 경쟁으로까지 내몰겠다?

그런데 올바른 독서 문화를 이끌어야할 시·도교육청이 한통속으로 뭉쳐 후원까지 한다. 그 가운데 서울시교육청과 관련된 보도를 보자.

서울시교육청은 어려서부터 올바른 독서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초등학교 전 학년을 대상으로 수업시간 중 매주 1시간을 책 읽는 시간으로 지정하도록 했다고 4일 밝혔다. (……) 학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 등이 교실에 찾아와 책을 읽어주거나 EBS의 '책 읽어주는 라디오', KBS의 '어린이 독서왕' 등 독서 관련 프로그램을 활용해 독서에 관심을 유도할 계획이다. (<서울 초등학교 매주 1시간 독서 전용시간 운영> 3월 4일치 연합뉴스)

이에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울산, 경북, 충북도교육청은 지난 달 말 일선 학교에 안내 공문을 보내 참여를 독려하였다. 한 술 더 떠서 KBS한국어진흥원 누리집에는 학교서 치르는 예선뿐만 아니라 본선과 결선의 시상내역을 NEIS에 기재하는 것처럼 해놓았다. 그러나 <학교생활기록부 길라잡이>(2011. 10. 교육과학기술부) 제9조 '수상경력'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학교생활기록부의 공신력을 높이고, 사교육을 유발하는 입학전형 요소 배제의 일환('고등학교 선진화를 위한 입학제도 및 체제 개편 방안' 등)으로 2011학년도부터 초·중·고등학교 모두 '수상경력' 란에 교내상만 입력하고 교외상은 입력하지 않는다.(22쪽)

모든 교외상은 학교생활기록부 어떠한 항목에도 입력하지 않는다(진로지도상황, 창의적 체험활동상황, 특별활동상황, 교외체험학습상황, 교과학습발달상황의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등). (23쪽)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 공영방송이고 시·도교육청이고 말은 '공익적 독서 문화 캠페인'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 속내가 의심스럽다. 물론 선정도서가 정말 읽을 만한 책인지 아닌지는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이 문제는 뒤로 미루겠다.

다만 40권으로 추린 선정도서 겉장에는 'KBS 어린이 독서왕' 스티커를 붙이고 예상문제집을 부록으로 딸려놨다. 누리집에 보면, '참가학교 선정도서 단체주문 방법, 학급문고 주문' 같은 메뉴까지 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선정한 책을 출제 범위로 삼아 문제 풀이를 위한 책 읽기 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몰겠다는 말이다.

아이들을 책의 주인으로 만들 것인가, 노예로 만들 것인가

이게 공익적 독서 문화 증진인가. 내 눈에는 음흉한 '장삿속'으로밖에 안 보인다. 이와 관련 <한겨레신문>은 9일 'KBS '어린이 독서왕' 반교육성 논란'에서 "'KBS 어린이 독서왕' 스티커와 부록을 붙인 책은 이 사업 대행사인 '북허브'가 독점적으로 유통하며, 이 회사는 각 출판사로부터 공급률(정가 대비 공급액) 45%로 책을 공급받는다"며 "출판사가 도매상에 적용하는 공급률이 일반적으로 65%인 점을 고려하면, 20%포인트의 차이가 발생한다, 한국어진흥원이 출판사들에 보낸 공문을 보면, '방송 프로그램'(25억 원), '시험 시행'(5억 원), '시험 평가'(7억 원) 등 39억 원을 '진행 비용'으로 산정해 공급률 45%의 근거로 삼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 건 누구든 공감하는 문제다. (재)한국출판연구소가 2010년 전국 초·중·고 학생 30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독서 실태를 보면, 열 가운데 둘은 한 학기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고 했단다. 이 수치도 어쩌면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현상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을 책의 주인으로 기를 것인지 책의 노예로 만들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평생독자로 만들 것인가는 '아이'를 중심에 놓고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다가가야 한다. 어른들이 곧잘 빠지는 유혹 가운데 하나는 아이들 머릿속에 온갖 지식을 우겨넣고 그 출력물로 점수로 매기고 등급을 나눌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방송이나 후원한 시·도교육청들은 이렇게라도 책을 읽혀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라고 해도, 결국 이는 선정독서를 문제풀이식으로 읽게 만들 것이다. 오히려 책읽기를 지긋지긋한 일로 여기게 만들 것이다. 또 아이들이 갖고 있는 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이 아주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왜 책을 읽지 않는가. 책이 없어서 못 읽는 건 아니다. 하루 평균 백 권이 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다. 읽으려고만 하면 굳이 사지 않아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학교 도서관이나 마을 도서관도 많이 늘어났다. 그래도 책을 읽지 않는 건 무엇보다 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 숨이 차도록 뛰어 놀아야 한다. 몸이 지치도록 뛰어놀고, 그 다음에 책을 읽어야 한다.

둘레를 살피지 못하고 동무를 사귀지 못한 채 '책만 보는 바보'가 생각보다 많다. 차라리 '자녀에게 책 읽어주기', '도서관 함께 가기', '한 식구 한 책 같이 읽기' 같은 독서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교실도 달라져야 한다. 교과서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교과서 밖 출판물들을 수업에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나가야 한다.

독서교육이든 뭐든 초심을 잃어선 안 된다. 교육은 영혼을 일깨워 온전한 사람으로 키우는 가치로운 일이어야 한다.
#어린이독서왕 #독서교육 #선정도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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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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