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하지 말란 짓은 하지 맙시다

[서울처녀 제주착륙기 16] 제주 곶자왈 트라우마 극복기

등록 2013.04.15 14:42수정 2013.04.1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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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곶자왈이 있다. 곶자왈은 오름과 함께 제주를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육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제주만의 독특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큰 매력이 있는 곳이다. 


곶자왈은 나무와 덩굴식물, 암석이 뒤엉켜 있는 숲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곳이다. 생태계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제주도의 동부와 서부지역에 분포하며, 조천-함덕곶자왈지대, 구좌-한경곶자왈지대, 애월곶자왈지대, 한경-안덕곶자왈 지대 등 4개 지대로 구분된다. 길게는 15Km에 이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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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의 보고이자 '제주의 허파'라 불리는 곶자왈. ⓒ 조남희


그런데 육지에서 놀러 온 친구가 어느 날 곶자왈에 가자고 하자 나는 긴장했다. 내게는 '곶자왈 트라우마'가 있다.

작년 가을 청수곶자왈에서의 뭔가에 홀렸던 듯한 경험이 새삼 새롭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언니들과 올레길을 걷기로 했는데, 어느 코스를 걸을까 고민하다가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권유에 따라 오설록티뮤지엄 옆의 곶자왈을 가기로 했었다.

올레길 14-1코스의 중간 즈음에는 제주시 한경면 소재의 청수곶자왈과 무릉곶자왈이 있다. 오설록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곶자왈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을 끼고 조금 내려가다 보면 올레길로 진입할 수 있다. 삼십 대 초중반의 세 여자는 올레 표지인 리본을 금세 발견했고 대충 이쯤이면 되겠구나 해서 숲으로 발을 들였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곶자왈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세계가 펼쳐졌다. 그간 제주에서 보아온 비자림이나 사려니숲길의 삼림과 곶자왈은 달랐다. 이름을 알 수도 없는 생경한 원시림의 울창함이었다. 길을 잃을새라 나무에 달린 표지를 좇아 성실하게 길을 찾아 나간 지 삼십여 분 되었을까. 점점 표지를 찾기가 어려워졌고 대체 이쪽이 맞는지, 저쪽이 맞는지 고민하느라 곶자왈의 생태계 감상은 이미 저리 치워놓게 되었을 때 누군가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이제 그만 나가야 하지 않을까?"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할지 이미 방향을 잡지 못하게 된 우리는 금세 그 말에 동의하고 다시 돌아나가기로 했다. 세 여자가 높다란 나무에 붙은 리본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돌아가는 길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 보는 나무가 아무래도 아까 본 나무 같고, 분명히 이쪽에 리본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없고, 앞사람 뒤통수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늬들, 아무래도 뭐에 홀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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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자 아름다운 숲은 곧 두려움으로 변했다. ⓒ 조남희


거뭇하게 어두운 울창한 숲 속에서, 우리는 숲을 나가기 위해 필사적이 되어 있었다.

"이쪽인가? 아냐 이쪽인 것 같아."
"리본이 없어요.. 어떡하지?"

결국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자 어쩌다가 나타나는 나무의 리본 따라가기는 포기하게 되어버렸다.

"오설록 부근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었으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나가면 될 거야."

그런데 어쩐지 아까 왔던 것 같은 곳에 다시 온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되고 있었다.  

"…. 길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

누군가 마음속에만 담고 있었던 것 같은 말을 입 밖으로 내자,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했다.
전화의 신호는 아주 약했고, 지도 어플을 실행시켜 현 위치를 파악하려고 해도 위치가 잡히지 않고 엉뚱한 곳만 가리켰다. 결국 올레 사무국에 전화를 했다.

"여기 곶자왈에 들어왔는데..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요! 어떡하죠?"
"곶자왈은 십 분만 헤매도 바로 나와야 하는 곳이에요. 어서 나오세요."

우리도 무지하게 나가고 싶었다. 이러다 해가 지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다.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쪽으로 최단거리로 움직이기로 하자, 사람이 지나가기 어려운 길을 만들어 나가야 했다. 가시덤불이 살을 할퀴고 옷을 붙들자, 이 숲이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언니 여기 소주병이 있어요!!!"

바닥에 뒹구는 소주병을 발견하고 기뻐서 외쳤다.

"진짜?! 사람이 있긴 했구나! 근데 좀 오래되어 보이네…"
"혹시 이게 그 사람이 마신 마지막 소주는 아닐까……"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한참을 헤매다 보니 어느새 공사장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밖이 보이는 것 같아!"

처음 진입했던 곳에 다시 이르러서야 우리는 알게 되었다. 두 시간가량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로 뱅뱅 돌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기운이 다 빠져버린 우리를 데리러 온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우리 얘기를 듣고 말했다.

"늬들, 아무래도 뭐에 홀린 것 같다.. 거기가 그런 곳이 아닌데…."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영혼들이 있고, 그러지 않아도 무속신앙이 강한 제주도는 사람들이 헛것들을 본 이야기가 많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마을지에 실려있는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의 다양한 헛것들에 대한 이야기 중 이런 것이 있다.

'이 마을 어떤 이가 낮 열두 시에 웃너븐드르에 밭을 보러 갔는데 밤 열두 시가 되어도 안 돌아왔다. 친척들이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올라가 찾아보니 곶자왈(산속의 가시덤불) 속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 보니 가시덤불 속에서 헤매고 있었고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정신이 아득하여 이 속에 들어오게 됐다고 했다. 도채비(도깨비)한테 홀린 것이 분명하다.'  (제주거욱대 중 인용, 강정효 지음, 도서출판 각)

"이런 나를 데리고 꼭 거길 다시 가야겠냐?"
"그럴수록 다시 가서 극복을 해야지!"

반년 만에 다시 찾아간 곶자왈... 빠져나오지 못했던 이유를 찾다

거의 반년 만에 다시 청수곶자왈을 찾았다. 작년에 갔던 기억을 더듬어 곶자왈로 진입하는 길을 차분히 찾다 보니, 작년에 홀린 듯이 곶자왈을 빠져나오지 못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곶자왈 입구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무작정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곶자왈 옆구리로 들어간 것이다. 올레길 코스가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들어간 곳에도 대강 리본들은 붙어 있었고 사람이 걸어들어갈만 했으니 간 것이고, 거기서 다시 역방향으로 나오자니 더욱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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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수곶자왈 초입을 달리는 외국인이 안녕하세요를 외치며 지나갔다. ⓒ 조남희


제대로 다시 찾은 곶자왈은 정방향이든 역방향이든 길을 잃을 여지 따윈 없어 보였고, (그렇지만 제주올레길 중 곶자왈 길은 순방향을 권한다.) 외국인들이 반바지를 입고 달리며 "안녕하세요"를 외치는 것을 보니 작년의 기억이 무색했다.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면 되는데, 그걸 무시하고 들어간 나의 무모함이 문제였다. 숲의 생태 보호 차원에서도, 사람이 다니도록 해 놓은 길만 다니는 것이 맞을 것이다.

청수곶자왈이 끝나자 무릉곶자왈이 이어졌고, 길은 조금 험해졌지만 한 번도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14-1코스의 종점까지 올 수 있었다. 나의 곶자왈 트라우마는 이렇게 우습게 극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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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이후에는 진입금지'라고 써있다. 지키자. ⓒ 조남희


#제주도 #곶자왈 #올레14-1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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