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닦지 않아도 그리움은 온다

[시인 서석화의 음악에세이] 김윤아 <봄날은 간다>

등록 2013.04.26 19:18수정 2013.04.2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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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닦지 않아도 그리움은 온다. 창을 열지 않아도 보고픈 이는 온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는 내 말을 들을 것이고 그렁그렁한 눈빛 보이지 않아도 그는 내 마음을 알 것이다. 깊은 밤 연거푸 마시는 향 짙은 커피, 그와 함께 마시지 않아도 그는 벌써 취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리움을 말로 하는 것은 사치라고 언젠가 나는 말한 적이 있다.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참아본 적이 있는가. 남들이 그에 대해서 말을 할 때 그의 습관은 이렇지, 그는 이런 음식을 좋아하지, 그가 우울할 땐 이런 표정이 되지, 그가 웃을 땐 여덟 개의 이가 가지런히 나타나지, 그렇게 내가 아는 그의 모든 것 아는 체하고 싶어 애써 엽차만 마셔본 적이 있는가.

기나긴 불면과 고질화된 식욕부진. '날씨 탓일 거야'라며 괜히 들뜬 음성으로 옆 사람에게 억지 확인 시켜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아.

그 모든 것 다하고도 숨길 수 없을 땐 죽기를 각오하고 침묵해 보렴. 입술이 타고 심장이 타고 머리끝도 타리라. 하지만 퀭한 눈빛엔 맑디맑은 영혼이 들어와 앉을 것이고, 네가 어쩌면 타 버렸다고 생각하는 심장은 봄날 새싹처럼 살아나리라.

사랑은, 그리고 그리움은, 스스로 감옥에 갇히는 일이다. 아주 이따금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결 고운 바람이 밀봉된 창을 뚫고 네 어깨를 스칠 수도 있으리라. 네 어깨를 스친 바람이 그의 어깨를 스친다는 희망으로 지탱하라. 거리에서도 신호등 앞길에서도 아파트로 돌아오는 작은 벤치에서도 그는 내 곁에 있다고 믿고 또 믿는 아름다운 단정, 사랑은 혼자 있을 때도 침묵하는 벅참인 것이다.

창문을 열어보자. 바람이 돌고 간 자리, 무심한 어둠만 가슴을 벌리고 서 있다. 가로등이 입술을 열고 창백한 호흡을 내뿜고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맴도는 살아 있는 이름 하나, 그대가 느낄 수 있는 모든 의미에 그 이름을 놓아 보라. 혼자 부르는 그 이름이 가슴에 가득 차  오르리라. 이제 그 이름은 온전히 그대만의 것. 절박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몰려오지 않는가. 그대에게는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고, 그대 이름 또한 그 누군가는 아프도록 부르고 있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아.

봄이라지만 아직은 바람이 스산하다. 긴 겨울 뒤끝에서 선뜻한 향기로 내려앉는 우리들의 안타까움, 무작정 일렁이는 가슴 속의 파도로 밤잠을 설친 뒤 시간도 알 수 없는 새벽에 혼자 마시는 커피 한 잔을 기억하는가. 공복에 들어간 커피가 명치끝을 쑤셔도 따스하게 손 안에 감싸인 커피 잔.

그래 사랑하자. 이 흐린 봄날을 사랑하고, 우리들의 아픔에 상관없이 피고 지는 목련을 사랑하고, 거리에 돌고 있는 뿌연 바람을 사랑하자.

우리들의 가슴은 깊고 깊어서 빈혈을 몰고 오는 새벽빛 검다 해도, 밝고 고운 햇살 쑤욱 밀어 올려 세상을 열게 하리라. 소란한 말소리 대신 따스한 시선으로 누군가의 허기를 달랠 수만 있다면 세상을 채우는 고요한 평화, 우리는 껴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 감으면 잡힐 것 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봄은 또 오고 꽃은 지고 또 지고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아.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를 들어보렴. 다시 온 봄날 속에는 가버렸다고 생각한 어느 봄날도 추억이란 이름으로 함께 왔다. '가는' 것은 단독보행이 가능해도 '오는' 것은 간 것의 자취를 거느린다. 기억이 추억이 되는 것은 다시 온 시간이 주는 선물이다. 때문에 기억은 단절될 수 있으나 추억은 이어진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기 때문에 "바람에 머물 수 없었던" 사람도 아름다움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봄날은 가"고 "무심히도 꽃잎"도 진다. 그러나 다시 온 봄날은 그 모든 걸 다시 보게 한다.

세월은 '가는' 게 아니라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아.

새벽 햇살이 아직 아스팔트에 떨어지지 않은 시간, 새벽의 냉기에 가슴 저미는 그대가 참으로 곱고 어여쁘다. 문을 열지 않아도 늘 깨어 있는 정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대 눈빛 이 아름답구나.

이제 거리는 화려해지리라. 자신감을 잃으면 공연히 주눅 들어 창에 드리워진 블라인드도 걷지 못하고, 하루 종일 불협화음의 심장 소리만 들으며 서성거려야 하는 젊고 아름다운 계절, 창밖은 봄인 것이다.

자, 하이힐 굽 소리 또박또박 울리며 새벽 햇살이 마악 떨어지는 아스팔트를 걸어보자. 길을 닦지 않아도 오는 그리움을 맞으러. 지금 시간은 온전히 그대의 것, 방금 당도한 사랑이 있어 숨찬 그대의 호흡, 기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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