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은 늘 곁에 있는 무서움이다

[시인 서석화의 음악에세이] 이은미 <헤어지는 중입니다>

등록 2013.04.29 14:53수정 2013.04.29 14:53
0
원고료로 응원
사랑은 이별이란 극과 극의 감정을 거느리며 깊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너무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마주보고 앉아 있으면서도, 미리 이별의 슬픔에 혼절이라도 할 듯 맥이 빠지면서 울어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이별의 두려움에 가슴이 내려앉는 절망으로 그의 눈빛을, 그의 말투를, 그의 침묵을 감시하듯 애태우며 지켜본 적이 있는가. 절대로 헤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믿고 또 믿으면서도, 이 사랑이 깨어질까봐 미리 놀라고, 만약에 이별한다면 나는 어떤 모습이 될 지 상상해보며 괜히 하루 종일 거리를 배회해 본 적이 있는가.

흔히 우리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이별이란 우리와 상관없는 풍경이라고 자신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아 버린다. 그게 현재 사랑을 하고 있는 연인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 상태일 것이다. 사랑이 진행 중일 때는 세상은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철 띠를 두르고 있다고 믿으며, 그는 나 없이는 못 산다는 엄청난 자기자만, 나도 그 없이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거라는 자기최면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자만과 자기최면은 영속성을 갖는 감정이 아니다.


햇살이 눈부셔 눈을 감고 말았죠
흐르던 눈물이 멈추질 않네요
가까스로 일어나도 다시 휘청거려요
이제는 정말 끝인가요

보란 듯이 살 거야
나약해지면 안 돼
그 사람보다 더 행복해야 돼
절대 뒤돌아보지 마
이런 못난 가슴아
왜 혼자서 멈출 줄 모르니

사랑해서 후회 없다던
사랑해서 보내준다던
잔인한 거짓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사랑한다면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이별했죠
이별한 거 맞죠
심장이 미쳐서 아직도 착각하고 있나 봐요
미련한 내가 나조차 너무 싫은데
서러움에 내 맘이 무너져요

정말 지운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나 울죠
당신 없는 나
어떻게 살아요
- 이은미 <헤어지는 중입니다>


새벽 네 시. 어둠을 칼로 주욱 긋는 듯한 전화벨 소리. 밤새 울어 목이 잠긴 그녀의 목소리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든 내 피로한 의식을 깨우며 들려왔다. 창밖은 아직 어둠의 휘장이 걷혀지지 않은, 물 속 같이 깊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나는 서재 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고 이런 새벽에 슬피 우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었다.

"만약에 그 사람이랑 헤어지게 되는 일이 온다면 나는 괜찮을까요? 서로가 아니면 살 수도, 살아갈 이유도 없는 우린데. 그런 우리도 변할까요? 그럴 수도 있는 걸까요?"

30여 분의 통화시간 동안 그녀는 그 말만 계속 반복했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녀도 내게 어떤 처방을 바란다거나 같이 고민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새벽에 전화를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갑자기 무서웠을 것이다. 천하에 없는 절대의 사랑이라고 믿는 만큼 만약의 이별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라도 그 마음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은 당신한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위로를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로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살아오는 동안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미 알지 않은가. 그녀의 부름을 받은 나는 그녀의 울음과 한숨을, 그리고 그 대책 없음을 침묵으로 참아주는 일 밖에 그 밤에 내가 해 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감정이든 강할수록, 그리고 그 감정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수록, 그것이 바뀌거나 바뀐 것을 보는 충격은 강하고 오래 간다. 사랑은 오죽하겠는가. 가장 뜨겁고 가장 확실하다고 믿으며 영원을 기대하는 게 사랑이라는 감정 아닌가. 그러나 관계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일체감을 느껴야 하는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 관계의 지속성에 두 사람 모두의 의지가 필수적이다. 나 혼자만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녀가 울고 있다. 그것도 서로가 사랑하고 있는 지금 엉뚱하게도 이별이 무서워서 말이다. 전화를 끊기 위해 무언가 한 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아 말을 꺼낸다.

"많이 깊어서… 그래요. 이별이 무서운 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랑하는데, 그래서 절대 헤어질 리 없다고 믿는데 왜 자꾸 겁이 날까요? 제가 방정맞은 걸까요? 복에 겨워서 이러는 거 맞죠? 그러나, 정말 그러나… 만약에 헤어지게 된다면 어떡하죠? 저는 견딜 수 있을까요?"
"……."

모든 만남은 시작되는 순간 이미 헤어지는 과정에 들어가는 것 아니겠냐는 말이 입안에서 머문다. 사랑이라고 거기에서 배제될 수 있겠는가. 그걸 알기 때문에 두려움도 공포도 미리 오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이별이 무서울 리 없다.

갖고 있던 물건을 잃어버려도 많이 아꼈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상실감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아니, 아끼는 물건은 혹시 잃어버리게 될 까봐 미리 겁을 낸다. 내게 귀한 게 아니면 닥치지도 않은 분실에 대해 그렇게 마음 졸여 지겠는가. 그러다 불행히도 잃어버리게 된다면 애착을 느꼈던 만큼 빈자리를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잃어버렸구나, 이젠 내게 없구나'라는 단정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완전한 포기 이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그때가 이별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관계 정리에 '이별'이란 단어가 허용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별은 사랑의 일부분이다. 관계의 끝맺음을 뜻하는 이별은 '소유'와 반대되는 개념일 수는 있겠지만, 사랑과 반대되는 개념은 아니다. 이별했다고 사랑하지 않은 것인가. 다만 이젠 소유할 수 없을 뿐이다.

이별을 걱정하지 않는 사랑이란, 여름날 소낙비처럼 순간의 열정만으로 끝날 허약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좋아서 행복하고 행복한 만큼 혹시라도 그 사랑이 깨어질까봐 두려움에 밤을 새워 울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진실로 견고하고 값진 사랑이리라. 그녀는 참 크나큰 축복을 받았다는 부러움이 명치를 뚫고 목까지 올라온다.

이은미의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듣는다. 늘 곁에 있는 무서움이었던 이별이 기어이 현실이 된 사람들의 모습이 느껴진다. 이들에게는 이별이라는 관계의 단락은 정해졌지만 관계의 완결까지는 아직도 지나야하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이젠 정말 끝인가요?"라는 물음, '끝'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서로가 와 있다는 거듭된 확인이다. 물음의 형식이지만 상대를 향한 물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다. 결국 이별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인정하고 있다는 걸 나타내는 확실한 표현이기도 하다. 다만 사랑했던 남녀의 이별이 어찌 '이제 끝'이라는 선언만으로 완결되겠는가. 어느 기간의 과정과 절차가 필요하다.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지만 이별은 '정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마음만 먹으면 되지만, 정리는 절대적으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헤어지는 중입니다" 라는 말은 그래서 이 사랑의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더불어 이별이 사랑에서 외따로 떨어진 상황이 아니라 사랑 속에 포함된 것임도 알게 한다.

"이별했죠/ 이별한 거 맞죠/ 심장이 미쳐서 아직도 착각하고 있나 봐요" 라고 묻고 또 묻는다.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착각을 떨어내기 위한 노력이다. 상대의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다. 이미 모든 질문과 답은 나한테 있다는 걸 안다. 반복되는 확인, 정리의 단계는 자신을 향한 수많은 물음과 의구심을 내려놓는 단계일 것이다. 때문에 자기 마음의 검증은 필수적이다. 이미 화자는 "미련한 내가 나조차 너무 싫"어 "서러움에 내 맘이 무너져"내리는 결론에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끝까지 재차 확인해 본다. 아직은 "헤어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별 후에 사람들은 무엇을 가장 걱정할까? 그건 피폐하게 상한 자신도 아니고 상대의 안위에 대한 연민도 아니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그 사람이 나를 "정말 지운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나 울"게 되는 순간이다.

이별은, 늘 곁에 있는 무서움이다. 사랑이 깊은 만큼! 그러나 이별이 무서운 그런 사랑, 그것은 축복이다. 그녀에게 내려진 축복이 오래 가기를 빌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난데없이 울음이 터졌다. 그런 날이 있었다.
#음악에세이 #이은미 #헤어지는 중입니다 #사랑 #무서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