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장작을 담으려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실랑이

[불혹 배낭여행기 28] 메콩강... 잊을 수 없는 추억 세 토막

등록 2013.05.08 14:28수정 2013.05.0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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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강변 풍광. 적요하고 평화롭다. 또한 아름답다. ⓒ 류태규 제공


처음으로 라오스를 찾았던 것은 2007년 10월이다. '지구에서 가장 조용한 수도'로 불리는 비엔티안에서 사흘, '파티'와 '급류 타기' 덕택에 아시아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강변 마을 방비엔에서 사흘.

채 일주일에 미치지 못하는 기간이 아주 향기로운 기억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무계획-무일정 나 홀로 세계여행'을 떠난 2011년 봄, 다시 라오스를 찾았다. 그때는 이전 여행보다 2배인 보름을 그 나라에서 머물렀다. 조용하고, 선량하며, 부끄러움 많은 사람들이 사는 라오스.


2011년엔 라오스 북부에 주로 머물렀다. 고풍스럽고 매혹적인 도시(라기보다는 시골마을에 더 가까운) 루앙프라방.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어린 스님들에게 과자와 찰밥을 나눠주는 재미에 빠져 6일을 머물다가 무비자 여행 기간이 임박해서야 태국으로 국경을 넘었다.

내가 선택한 월경의 방법은 언필칭 '슬로우 보트'. 시속 30km를 넘지 않는 느리고 작은 목선을 타고 루앙프라방을 출발해, 팍뱅과 훼이싸이라는 중간 기착지를 지나 태국 북부 치앙콩으로 들어가는 2박3일의 낭만적인 국경 넘기.

선택은 탁월했다. 만약 루앙프라방에서 출발해 치앙마이로 가는 비행기(1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면 절대로 볼 수 없는 장면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산중턱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는 원시적인 마을의 풍광, 대나무에 줄 하나만 매달아 메콩강 지류의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원초적인 낚시법을 선보인 소수민족 청년, 이틀간의 동행에서 친구가 돼버린 태국 여성 핌과 팜. 평생 잊기 힘든 추억을 만든 '슬로우 보트 여행'이었다. 아래는 그 여정의 핵심이라 할 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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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제 삶처럼 무거운 장작을 가지고. 그것도 맨발로. ⓒ 홍성식


[장면 하나]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해봤던가?


위 사진은 2011년 4월 6일 새벽 6시 10분경에 찍은 것이다. 전날 루앙프라방을 출발한 '슬로우 보트'가 중간 기착지 팍뱅에 해질 무렵 도착했고, 극장과 서점은 물론, 그럴싸한 놀이문화 하나 없는 그 마을. 라오스 토속주 '라오라오'에 맥주 섞어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든 터라 새벽에 잠이 깼다. TV도 없는 낡은 호텔방이 무료해 강가로 산책을 나갔다.

거기서 보았다. 엄마는 다 떨어진 고무 슬리퍼, 아들은 맨발인 모자(母子)가 산에 가서 베어온 것인지 적지 않은 장작을 쌓아놓고 커다란 바구니에 나눠 담고 있었다. 산악지대가 대부분인 라오스 북부의 4월 새벽은 한국의 늦가을처럼 춥다. 양말도 신지 않은 두 사람의 발은 분명 시렸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아, 그때처럼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엄마는 자기 바구니에, 아들은 제 바구니에 더 많은 장작을 담으려 하고 있었다. 서로 무거운 걸 들고 가겠다는 소리 없는 싸움. 엄마와 아들은 장작을 이고 지고 또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하는 걸까?

자꾸만 엄마는 아들 바구니에서 장작을 꺼내 자기 몫으로 가져가려 하고, 이제 겨우 10살 남짓의 아들은 그걸 제지하며 엄마의 바구니에서 장작을 다시 꺼내기에 바빴다. 한참 동안이었다. 아름다운 실랑이. 바라보는 내 목구멍이 휘발유를 삼킨 듯 뜨거웠다.

그리고, 기억의 회로를 뒤로 돌렸다. 40살이 넘은 내가 여전히 '엄마'(어머니가 아닌)라고 부르는 한 여자가 불현듯 떠올랐다. 공자가 말한 바 세상사 미혹에서 자유스러워진다는 '불혹(不惑)'이 되기까지 단 한 번도 엄마가 진 세상사 무거운 짐을 나눠 들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하여, 10살짜리 꼬마만도 못한 나는 그토록 착한 아들과 선량한 엄마 앞에서 감히 사진기 따위를 들이댈 수가 없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면 99%의 라오스 사람들이 그렇듯 그 모자도 하던 일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카메라 앞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내가? 그리고, 감히 어떤 이가 있어 그 '위대한 다툼'에 주제넘게 개입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이유로 사진은 언덕을 오르는 엄마와 아들의 뒷모습만이 담겼다. 그들은 집으로 가는 길에 얼마나 자주 마주보며 웃었을까? 내 남은 생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모자의 뒷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 같다.

[장면 둘] 착한 것도 이 정도면 병이다

라오스라는 나라는 딱 한 마디로 정의가 가능하다. '착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부연이 필요 없다. 가보면 안다. 심지어 관광객을 상대하는 닳고 닳은 장사꾼도 보통의 한국 사람보다 훨씬 순박하고, 친절하며, 선량하다.

루앙프라방에 산재한 수많은 싸구려 호텔. 그중 내가 묵은 곳 인근 구멍가게를 자주 드나들었다. 아들 내외, 손자, 손녀와 함께 사는 할머니. 새벽 5시면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담배를 사기 위해 그 가게에 갔을 땐 10여 명의 가족이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담배를 사서 나오려는데 이 할머니, 자꾸만 나를 붙들고 찰밥 한 점(라오스 사람들은 찰밥을 지어 손으로 일정량을 덜어내 뭉쳐 국이나 소스에 찍어 먹는다) 먹고 가란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란 입에 발린 소리를 싫어하는 나다. 차린 게 없는데 뭘 많이 먹나? 그런데, 그날 아침, 정말이지 소박한 식사자리에 끼어 앉아 '차린 것 없는' 밥상에서 먹은 딱 2점의 찰밥 맛을 잊을 수 없다. 찍어 먹은 고추 소스의 향까지. 이제는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내 조모의 정을 그 할머니에게 대신 받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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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팍뱅에 가면 이 환한 미소의 친절한 식당 주인을 꼭 찾아보시길. ⓒ 홍성식


환하게 웃고 있는 이 아줌마는 팍뱅에서 생선, 돼지 내장, 라오스 소시지, 메추라기 바비큐 따위를 파는 조그만 식당의 주인이다. '배가 떠나기 전에, 뭘 먹긴 먹어야겠는데' 싶어 급히 들어간 그곳. 온통 바비큐뿐이다. 아침부터 기름기 흐르는 내장을 먹기는 좀 그랬다. 해서, 나오려는데 "다른 곳에 가서 먹고 싶은 음식을 사와라. 무거울 테니 가방은 내가 지켜줄게. 사와서 여기서 먹어도 돼"라고 한다. 서툰 영어와 손짓이 섞인 의사 표현.

이게 말이 안 되는 거다. 한국 같으면 자기 식당에 밥 먹으러 들어와 메뉴만 보고 나오는 손님한테 "배낭 맡아줄 테니 옆 가게에서 드시고 싶은 것 사와서 여기 앉아 드세요"라고 말할 식당 주인이 얼마나 있을까?

순진하고, 가난 속에서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은 착한 사람들이 있어 부러운 나라 라오스. 2006년 6일, 2011년 보름. 단 3주의 여행만으로 라오스에서 살고 싶어졌다. 괜히 해보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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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메콩강의 황톳빛 물길. ⓒ 류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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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과 모성으로 안아주는 강, 초록빛 정글. 라오스가 아름다운 이유다. ⓒ 류태규 제공



[장면 셋] 다행이다, 세상에 여자가 있어서


다시 '슬로우 보트'로 돌아온다. 말이야 근사하게 '슬로우 보트'지만, 사실 라오스 루앙프라방 –태국 치앙콩 국경을 넘는 배는 낡고 조악한 목조 통통배에 불과하다. 제대로된 식당 시설은 물론이거니와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화장실조차 없다. 음악과 영화 상영? 꿈같은 소리다. 자칫 심심할 수 있는 이 여행에 말벗이 돼준 이들이 태국 여성 핌(pim)과 팜(pam)이다.

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직장생활을 10년 이상씩 하다가 가족과 친구가 있는 제 나라로 돌아온 30대 중반 여성 둘. 지난해엔 핌이, 올해는 팜이 한국을 찾았고 둘과의 해후는 10개월의 긴 여행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과의 재회보다 반가웠다. 아래가 바로 그 이유다. 

나름의 '장대한 국경 넘기 항해'가 끝난 마지막 날. 태국 치앙콩에서 함께 국경을 넘은 태국 여성 핌과 팜 그리고, 내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현금이 없는 내게 기꺼이 호텔비를 빌려준 둘에 대한 감사 인사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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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꼬마아이도 자라면 아버지와 엄마처럼 착하고 수줍은 라오스 사람이 되겠지. ⓒ 홍성식


메콩강이 내려다보이는 야외 레스토랑. 알코올 함량이 50%를 넘나드는 토속주 '라오라오'를 초저녁부터 내처 들이킨 나는 이미 몽롱하게 취한 상태.

그런데, 이게 뭔가? 식사가 막 시작될 무렵, 차려진 음식 위로 갑자기 돌풍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열대성 스콜. 주먹만 한 빗방울만으로도 곤혹스러운데 갑작스레 불어 닥친 세찬 바람에 테이블보만이 아니라 포도주잔까지 날아가는 황당한 상황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건 전조에 불과했다. 곧이어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고, 설상가상 정전까지 돼버렸다. 비상전력으로 가동되는 가로등 따위가 없는 라오스-태국 국경의 밤은 그야말로 캄캄절벽. 손님들은 물론 레스토랑을 정리하던 종업원들까지 공황상태에 빠졌다.

근데, 그 어둠과 폭우, 벼락에도 난 손에 든 술잔을 놓지 않았다. 취한 자의 호기였을 것이다. 모두가 굵은 비를 피해 인근 호텔 로비로 뛰어가는데 혼자 출렁이는 메콩강을 바라보며 레스토랑 난간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팜이 로비로 가다말고 뛰어와 내 손을 잡은 것은.

"그만 마시라"고, "우리도 빨리 비를 피하자"고 말하는데 그녀 손이 너무 따뜻했다.

마흔이나 먹은 사내의 대부분은 천둥이나 번개, 어둠에 잠긴 강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헌데, 그녀는 손과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게 갑자기 불어온 돌풍 탓인지, 검은 하늘을 찢는 불빛과 귀를 때리는 벼락 소리 탓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왜 그녀는 두려움을 떨치고 빗속을 뛰어와 내 손을 잡았을까?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저 여자는 따뜻하다는 것, 그 명명백백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을 뿐.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아래와 같은 문장이 영화 자막인양 눈앞으로 흘러갔다.

'맞다. 여자가 없다면 누가 있어 철없는 세상 사내들을 위로하고 안아줄 것인가. 다행이다. 세상에 여자가 있어서.'
#라오스 #루앙프라방 #슬로우 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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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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