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하나 꼬마 신랑과 열 여덟 아내... 장인은?

[불혹 배낭여행기 29] 우리가 잊고 살았던 행복의 조건들

등록 2013.05.09 19:30수정 2013.05.1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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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비엔티안의 마사지 가게에서 만난 친절하고 밝은 소녀들. ⓒ 홍성식


조악한 내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날짜가 아니더라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2011년 3월 27일. 그렇다. 그날이다.

나, 언제 이토록 티끌 한 점 없는 환한 웃음을 지어봤는지 기억이 아득하다. 이 소녀들의 웃음만을 재료 삼아 시 100편은 거뜬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시경>에 담긴 빼어난 시 300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무사(思無邪)라 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 마음 안에 사악함이 없으면 표정에서도 그게 드러나는 게 사람이다.


마사지 가게, 그녀들과 옥수수를 먹으며 함께 웃다

라오스를 두 번째 여행한 2011년 봄. 여장을 푼 첫 도시는 비엔티안이었다. 한 나라의 수도답지 않은 한적함이 좋았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라오스식 마사지'를 받으러 들어간 가게. 거기서 일하는 일곱 명의 아가씨들. 넷은 라오스 중남부 사완나켓, 셋은 그것보다 더 남부에 위치한 마을 팍세에서 왔다고 했다. 스물넷인 최고참 언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19세에서 20세 사이. 말 그대로 소녀들이다.

1000원 어치 반짝이는 스팽글을 사와 흑백화면 핸드폰을 장식하는, 핸드폰의 기종만 스마트폰이 아닐 뿐, 한국의 여고생들과 비슷한 취미를 가진 아이들. 손님이 없는 한낮의 마사지 가게. 수다를 떨며 옥수수를 먹고 있길래 "나도 하나 주세요"라고 청했다. 뭐가 부끄러운지 쪼르르 달려와 그것만 건네고 제 자리로 재빨리 돌아간다.

그 모습이 귀여워 옥수수를 더 사와서 나눠먹자고 했다. 한국 돈 2000원에 옥수수 10개. 옥수수 알을 뜯으며 영어를 못하는 그 소녀들과 라오스어를 하나도 못하는 내가 뭐가 좋았던지 손짓 발짓 섞어 한참을 낄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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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라오스의 시골 풍광. ⓒ 홍성식


다음 날도 거길 다시 갔다. 삶은 옥수수 10개 사들고. 서울 갔다 돌아오신 오빠가 비단구두 사온 양 기뻐하는 아이들. 1시간 내내 처음 보는 사람의 몸을 주무르고 겨우 5500원을 받는 그 소녀들. 그중에 절반은 가게 주인이 가져가고, 절반만을 자기가 가지면서도 언제나 웃는 아이들. 손님이 올 때 돌아가며 마사지를 한다면 일 평균 손님이 20명이라니, 그 친구들의 하루 수입은 5000원에서 7000원 남짓.


거친 일 탓에 손바닥이 중년여성의 그것보다 더 거친 그 아이들을 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서 어린 동생들 돌보며 빨래와 청소, 농사일까지 도맡아 하다가, 결국엔 동생들 스케치북 사고 연필 사줄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로 올라온 젊은 시골 여성들. 한국의 1970년대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네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나는 그저 이런 혼잣말만을 했을 뿐이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너희들 모두를 한국으로 초대해, 귀여운 핑크색 핸드폰 고리와 반짝이는 은 귀걸이라도 하나씩 사주고 싶구나. 동대문 패션몰에 데려가 1만 원짜리 티셔츠 한 장씩이라도 선물하고 싶구나. 너희들의 그 빛나는 나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주위사방 아니, 어두운 세상을 밝히지 않겠니."

요즘도 가끔 궁금하다. 비엔티안 마사지 가게 종업원 소녀들의 안부가. 비엔티안 여행자거리 외곽에 위치한, 지금은 상호를 잊어버린 마사지 숍 꼬마숙녀들, 모두 건강하시지? 여전히 세상이 부러워할 웃음을 잃지 않으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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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친구가 된 스물한 살 신랑(노란색 셔츠)과 그의 처가를 방문했다. 뒷편에서 흰 색 셔츠를 입고 웃고 있는 사람이 그의 열여덟 아내다. ⓒ 홍성식


쉰셋의 라오스 슈퍼맨 "난 자식이 11명이에요"

여행을 하다보면 현지인 친구가 생긴다. 특정 도시에 오래 머물 경우 그 가능성은 더 커진다. 1주일을 같은 호텔에서 머문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도 몇몇 친구들이 생겼다.

그중 한 청년은 한국 사람이 교수로 와 있는 루앙프라방의 대학에서 영어를 배운다고 했다. 인터넷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군데 싹싹하고 착했다. 나이는 스물 하나. 헌데, 뜬금없이 자기 학교를 구경시켜준다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내 숙소 앞으로 왔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규모인 조그만 학교에서 내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다가 돌아오는 길. 내친김이었는지 그 친구가 "우리 집에 가서 저녁 함께 먹어요"라고 제의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 발언. "내 아내가 요리를 잘 해요". 엥? 스물한 살짜리가 아내가 있다고. 더 놀라운 건 와이프 나이가 열여덟이란다. 충격은 또 이어졌다.

"나는 표준이에요. 빨리 하는 애들은 열여섯에도 결혼합니다."

그 '꼬마 신랑'이 대체 어떤 아내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라도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라오스는 결혼하면 남자가 여자 집으로 들어간다. 당연지사 집엔 그 친구 장인과 장모가 있었다. 놀라지 마시라. 그 장인, 이제 쉰셋인데 자식이 11명이다. 아들 셋에 딸이 여덟. 그 친구와 결혼시킨 딸은 9번째 자식이란다. 막내아들은 이제 겨우 12살.

열여덟 살 아내가 요리를 하면 얼마나 잘 하겠나. 한국에서라면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도시락 싸서 영어 과외나 다닐 나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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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신부가 만들어준 라오스 가정식 요리. ⓒ 홍성식


허나, 이게 또 놀랍다. 야채와 돼지고기를 넣어 끓인 국과 민트에 칠리소스를 더한 일종의 '라오스식 샐러드'가 제법 맛있다. 처음으로 먹어본 '오리지널 라오스 가정식 요리'. 맞다. 마르크스가 서술했듯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그 아이의 존재는 이미 열여덟 소녀가 아닌 누군가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 의식도 그에 맞춰 성장한 것이다.

"당신은 11명의 아이를 만든 슈퍼맨"이라는 내 부러움 섞인 농담을 아홉째 딸의 사위가 통역해주자, 그 사내, 호쾌하게 웃는다. 멋지다. 그리고, 당장 눈에 보이는 가족들만을 불러 모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 이토록 행복한 가족사진이라니.

난 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 번도 그를 의심한 적 없고, 그가 하지 않은 것 중 '이걸 해 주세요'라 말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딱 하나의 불만은 겨우 자신의 아내와 나, 동생만을 가족으로 만들어준 것. 너무 적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난 형제, 남매, 자매 많은 이들이 참으로 부럽다. 어려울 때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기댈 곳은 결국 가족뿐인데·……. 적은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도 크게 웃을 수 있는 그 옛날 한국의 대가족 풍경. 그와 닮은 행복한 모습을 내게 보여준 스물한 살 신랑과 열여덟 신부가 고마웠다. 물론, '슈퍼맨' 장인어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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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 고풍스런 양식의 루앙프라방 건축물. ⓒ 홍성식


식구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용하고, 심심하며, 지루하지만 적요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도시 루앙프라방. 거기 머물던 동안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으니, 어린 스님들의 새벽 탁발(托鉢·라오스 사람들은 '탁밧'이라 발음했다)이다.

아침 잠이 많은 나였지만, 거기 머물던 일주일은 내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매일같이 허겁지겁 고양이세수만 하고 거리로 나섰던 이유는 맨발의 탁발승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라오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동승(童僧)이 되어 절에서 먹고 자고 글도 배우며 몇 년씩 지낸다고 했다.

비엔티안에서 만난 영어를 썩 잘 하는 똑똑한 열여섯 동승도 아주 어릴 때 집을 떠나 절에서 생활했다한다. "아버지와 형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면 그걸로 대학을 가고 싶다"고 하는 소년의 얼굴이 쓸쓸해보였다. "대학을 마치면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의젓하기 그지없다.

"은행원이 돼서 부모님과 형제들을 보살피고 싶어요."

어서 빨리 그 동승의 아버지와 형이 대학 입학금을 모으기를, 그 열여섯 소년이 대학을 마치고 월급을 300달러(이 돈이면 라오스에선 적은 월급이 아니다)나 받는다는 은행원이 되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는데, 지금쯤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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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프라방의 새벽 탁발 행렬. ⓒ 홍성식


다시 루앙프라방의 새벽 거리로 돌아오자.

사전에 얻어들은 정보를 통해 어린 스님들은 탁발 품목 중 찰밥이나 돈보다는 사탕, 초콜릿, 과자를 더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새벽에 시주를 받아 절에서 그걸 나눠 먹을 때가 되면 밥보단 과자에 손이 먼저 간단다. 왜 그렇지 않겠나. 승복만 벗으면 이제 겨우 열 살, 열한 살 꼬마들인데.

탁발 참여 첫날. 거리로 나가 과자를 파는 상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많은 동승들이 이 길로 지나가나요?"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대신 답했다. "아마 120~130명쯤 될 거예요." 50개 들이 중국산 과자가 2달러(2300원)다. 3박스를 샀다. 그러면 150개. 하나씩 다 나눠줄 수 있는 숫자다.

이윽고 희부옇게 밝아오는 여명. 저 멀리 조용한 루앙프라방 새벽 거리로 탁발승의 행렬이 나타났다. 각각의 사찰에서 주지 격인 늙은 스님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서열 혹은, 나이에 따라 줄 지어 행렬을 이루는 것으로 추측됐다.

한 40여 분을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동승들의 행렬. 탁발이 다 끝나니 날이 온전히 밝았다. 과자가 30개쯤 남았다. 그건 내 옆에 있던 일곱 살 꼬마소녀의 종이박스에 넣어줬다.

들어보니, 탁발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절대다수는 무언가를 동승들에게 나눠주는데 몇몇 아이들은 오히려 종이박스를 든 채 동승들이 주는 걸 받고 있는 것이다. "왜 저러는 것이냐"고 물으니, "가난한 집 아이들"이란다. 가난한 동승이 더 가난한 또래 친구들 도와주는 눈물겨운 풍경.

그 일곱 살 소녀. 바나나와 찰밥, 과자 따위가 담긴 종이박스를 옆에 놓고, 손으로 뭉쳐 식은 밥을 아주 조금 먹는다. 과자를 파는 노점상에 의하면 소녀가 얻은 음식은 가족들의 하루 식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분명 아버지나 엄마가 아프겠지. 어지간해선 슬퍼하지 않는 내 코끝이 찡해져왔다.

시인 황지우에 의하면 세상에 '슬픔처럼 쌍스러운 건 없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착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 루앙프라방이 나를 슬픔으로 내몰았다. 그 슬픔 속에서 내가 생각한 가난 아닌 가난이 참혹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하니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함께 밥을 나누는 존재인 식구(食口)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식구가 있어도 식구를 식구처럼 살갑게 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게 그저 나 하나만의 섣부른 예단일까? 아닐 것이다. 라오스 여행이 남은 내 삶에서 스승으로 역할할 수 있다면, 이 깨달음은 그 역할의 배경화면이 돼줄 것이 분명하다.
#라오스 #비엔티안 #루앙프라방 #탁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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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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