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대하소설, 그러나 부부의 매일은 시가 되어야

등록 2013.05.22 20:46수정 2013.05.22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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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그 아득하고 막막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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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산책 중에 한상구작가의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인 모습과 만났습니다. 외출을 준비 중인 이 가족의 화목한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가정은 세상의 모든 화목의 가장 기초단위입니다. ⓒ 이안수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된다는 의미를 담아 이 날을 부부의 날로 정했다는군요. 인간으로 태어나 부부로 함께 살 수 있는 확률에 대해 생각해보셨나요? 

부처님은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날 확률을 조갑상토(爪甲上土)로도 비유하셨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흙들이 축생계로 태어나는 분량이면 인간계로 태어날 가능성은 손톱위에 올린 흙만큼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로는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고 하셨습니다. 먼 바다의 심해에서 영원히 사는 눈이 먼 거북이가 백년마다 한 번씩 숨을 쉬기 위해 해면으로 떠올랐을 때 우연히 바다를 떠다니던 거북 모가지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린 판자와 부딪혀 그 구멍에 목을 끼우고 잠시 휴식할 수 있는 확률을 말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이렇듯 희박한데 그 인간이 남녀로 갈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동시대에 태어나, 지구의 광활한 지역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또다시 부부의 연을 맺을 확률이라는 것은 계산이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이 모든 단계에서 호리지차(毫釐之差)의 어긋남이 있어도 결코 성사될 수 없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런 아득하고 막막한 확률을 한마디로 한다면 그저 '숙명'이라고 할 수밖에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맹세는 사실 부질없는 헛된 약속입니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가능성은 전무하다시피하고 다시 부부가 될 확률은 부처님의 비유를 상기해보면 과연 있을 수 있을 법한 일인지를 어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부간에 허황된 공약(空約)을 남발하는 대신 지금 바로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할 일입니다.

더블 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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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더블주례. ⓒ 전기보


저는 지난 5월 4일에 소엽 신정균 선생님과 함께 결혼식의 주례를 보게 되었습니다. 형식에 있어서 특별했던 것은 두 사람이 주례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두 사람이 주례로서 집례하는 일이 불가능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신랑이나 신부가 두 사람에게 함께 주례의 청을 넣는 일 자체가 큰 결례일 수 있는 일로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엽 선생님과 저는 서로 막역한 사이일 뿐만 아니라 함께 혼주를 잘 알고 신랑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형식에 갇히기보다 기존의 형식을 깨는 것에 더욱 의미를 두고 계신 소엽 선생님의 충만한 자유정신이 큰 몫을 했습니다.  

주례 없는 결혼식이 성행하고, 더블 사회로 예식을 치르기도 하는 지금, 복수의 주례를 세우는 일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양측의 혼주와 저희가 모두 일치된 의견이었습니다. 향후 신랑 측에서 한 분, 신부 측에서 한 분 등 평소 존경한 인생의 멘토를 결혼이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출발선에서 보호자로 천명해주실 것을 청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례가 없는 더블주례를 진행함에 있어서 절차와 형식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예식장 측에서 오히려 난감해하셨습니다. 담당자와의 요청은 기존 형식을 크게 바꾸지 않는 것으로 결론 냈습니다.  

소엽 선생님께서 먼저 단상에 올라가셔서 신랑·신부를 맞아 혼인서약과 성혼선언을 하고 특별히 준비한, 두 사람의 성혼을 하늘에 고하는 고천문을 낭독하고 이어서 제가 주례사와 그 후의 의례를 진행하는 것으로 순서와 역할을 정했습니다.  

이 낯선 형식에 대해 하객들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집중해주셨습니다.  

고천문 

소엽선생님은 손수 쓰시고 족자로 만들어 오신 고천문(告天文)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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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혼을 하늘에 고하는 고천문 낭독 ⓒ 이안수


告天文

계사년 5月 4日 이곳 부평호텔에서 한 쌍의 善男善女가 百年佳約을 맺습니다. 

신랑은 金大寧씨의 외아들 龍燦君 신부는 張仁順씨의 막내딸 恩珍孃.   

이 두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낳아주고 길러주신 父母님과 여러 친지하객을 모시고 人倫之大事인 혼례 정사를 하게 되었음을 하늘에 告하나이다. 

여지껏 홀로이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가 하늘의 보살핌으로 이 두 사람 인연이 닿아 夫婦라는 이름으로 더욱 튼튼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서고자 합니다. 

좀 부족한 듯 보이는 한사람이 비슷한 사람과 만나 완벽을 찾아나가는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생각되온즉 이것이 人間의 根本을 이루고 세상의 발전을 이루나니 이 어찌 하늘의 보살핌 없이 可能한 일이라 하겠습니까.  

하여 하늘이시여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의 앞날에 창창한 光明을 내려주소서.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父母님을 공경하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옵소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놈이나 부용 같은 딸네미의 웃음소리가 이들 가정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을 빌어 서로 사랑하는 이 둘이 하나가 되었음을 이 자리에 참석하여 주신 많은 분들과 함께 열과 성을 다하여 告하나이다. 

하늘이시여 

이들에게 큰 祝福을 내려주시옵소서
간절히 所望하옵니다.  

이천십삼년 꽃비내리는 오월 初四日날에 두손 모아

主禮
時中 李安洙
少葉 申貞均
拜上


 
소엽 선생님께서는 천고문의 화선지 곳곳에 '祝'자와 '吉'자를 꾹꾹 눌러 찍고 다시 '同樂'이라는 글자와 함께 특별하게 새긴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문양의 낙관으로 이 부부의 출발이 길하고 영원히 기쁨으로 동행하도록 하는 기원을 담았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사랑과 행복을 위한 당부를 주례사에 담았습니다. 먼저 서로에게 끊임없이 '칭찬'이라는 마법을 거는 것을 아끼지 말 것이며 부부싸움이 오히려 부부간 소통의 방법이 되고 문제해결의 방법이 될 수 있는 몇 가지의 솔루션을 일러주었습니다.

또한 부부 생활이 세월에 빛바래지지 않는 방법으로 결혼에 유효기간을 설정하고 새롭게 갱신해나가는 법을 제시했습니다. 유효기간이야말로 선도를 보장하는 안전한 방법이듯이….

결혼은 긴 대하소설 같은 것 그러나 그 매일매일은 한편의 영롱한 시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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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부추전에 막걸리 한 통으로 우리 부부는 부부의날을 기념했습니다. ⓒ 이안수


예식이 끝난 후 예식에 함께했던 몇몇이 선술집에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자연스럽게 오늘의 주례 형식에 대한 의견들이 중요한 술안주가 되었습니다.  

"기존 형식을 크게 바꾸지 않은 것이므로 파격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두 분이 단상에 차례로가 아니라 함께 올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애드리브가 강하므로 줄곧 토크쇼 형식으로 집례를 하고 주례사도 두 분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즉흥적인 진행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곧 자녀들을 출가시켜야할 엄마 아빠들의 기대는 소엽 선생님과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진보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그 자리에서 즉문즉답의 주례를 시연하는 즐거움으로 한 쌍의 부부로서의 새 출발을 밤늦도록 축하했습니다.  

저는 이태 전에 '결혼을 앞둔 후배에게 인생의 선배가 들려주는 지혜'를 써달라는 원고의 청탁을 받았습니다. 그 원고는 각각의 배경이 다른 작가들이 참여한 '결혼 전 물어야 할 한 가지, 결혼을 배운 적이 없는 모든 당신들을 위하여'라는 단행본으로 발행되었습니다.

저는 낯모르는 결혼의 후배들에게 무슨 얘기를 들려주어야할지를 고민했습니다. 그것에는 답이 없다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진솔된 삶이 답이다, 라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했습니다.

제게 여전히 변함없는 생각은 한 개인이 거쳐야하는 일생의 여러 의례 중에서 결혼이 가장 중요하는 것입니다. 탄생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므로 어쩔 수 없는 사건이라면 결혼은 자신의 의지가 주도적으로 개입된 결정이면서 그 결과가 평생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날인 오늘 저의 처는 회에서의 늦은 귀가에도 불구하고 부추전 거리를 준비해왔고 저는 막걸리 두 통을 준비했습니다. 

밤 11시, 아내가 부추전에 함께 넣을 고추를 써는 소리가 경쾌합니다. 전을 좋아하는 저희 부부에게 번철에 지짐질하는 날이면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만나 평생을 함께해야하는 결혼은 긴 대하소설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매일매일은 한편의 영롱한 시가 되는 날들이어야 합니다.

매일 칭찬이라는 펜으로, 웃음이라는 펜으로, 양보라는 펜으로, 희생이라는 펜으로 시를 쓰고 계신 가장 진솔한 시인이신 세상의 모든 부부에게 존경을 받칩니다.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부부의날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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