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전설의 빨치산'이었다

[공모-나의 아버지] 평생 한량이었던 아버지, 하지만 나쁘지 않다

등록 2013.05.25 20:58수정 2014.04.28 16:24
2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부군>(1989)의 한 장면 ⓒ 남프로덕션


내 아버지는 우리 마을 전설의 빨치산이다. 그가 빨치산 부대원으로 복무한 기간은 대략 일주일가량이었다. 당시 마을 인근의 험준한 산맥의 최고봉인 말봉산 자락에는 여순반란사건의 잔류세력인 제14연대 소속 빨치산 부대가 주둔 중이었다. 아버지는 남태인 대장이 지휘하는 부대에 강제 입산 당해 일주일 동안 그의 '동무'로 사상개조를 받은 바 있는 빨치산 출신이다.


전쟁 막바지 끝까지 결사 항전한 진정한 전사들은 거의 잊혀졌지만 고작 일주일 '병영체험'이 전부인 아버지는 우리 마을 전설의 빨치산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가, 일주일 동안 산에 머물면서 한 일이란 어떡하면 무서운 빨치산 대장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무사히 산을 내려갈까 하는 고민에 몰두한 것이 전부였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첩첩산중 우리 마을도 어지러운 전란의 소용돌이를 비켜 갈 수는 없었다. 인민군과 국군이 엎치락뒤치락 번갈아 가며 마을을 장악하는 가운데 현명한 주민들은 양 세력에 적절하게 동조, 부역함으로써 아슬아슬한 등거리 전략으로 생존을 모색했다. 인근에서 가장 큰 동네인데다, 엄청난 인구과밀지역인 우리 마을이야말로 인민군도, 국군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첨예한 분쟁지역이었다.

제주 양씨, 하동 정씨. 양대 성씨가 주류를 이루는 씨족 마을에서 한 성씨는 국군 쪽에, 한 성씨는 인민군들에 호의적이면서 좌우의 균형을 유지했다. 빨치산 보급투쟁의 작전 내용은 군량미 비축과 생필품 확보에도 있었지만 특별히 농사 일로 잔뼈가 굵은 신체 건강하고 억센 농촌청년들의 모병에도 주력했다. 한 명의 전사라도 더 확보하기위해 그들은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스무 살이 된 아버지도 어느날 밤, 마을을 급습한 '산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입산하게 되었다.

빨치산 부대원들 눈에 유독 거슬렸던 아버지

빨치산은 주로 야밤에 암약했다. 그날 아버지와 마을 청년들을 대량 나포한 빨치산의 보급투쟁도 한밤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고 젊은 남자는 닥치는 대로 끌고 가기에 바빴다. 그렇게 행해진 간밤의 무리한 작전이 약간의 차질을 빚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침이 되어 지난 밤 마을을 돌며 차출해온 서른 세 명의 청년들을 앞마당에 도열해 놓고 보니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데려온 청년들 중에는 빨치산 전사로 길들이기에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을 지닌 이들이 다소 섞여 있었던 것이다. 아직 나이가 한참 어려 엄마를 찾으며 징징 울어대는 미성년자가 없질 않나 다리를 심하게 저는 사람, 팔이 한 쪽 없는 사람,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약간 정신연령이 모자라 보이는 사람 등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 외, 정상등급을  받은 청년들을 따로 분류해 놓고 보니 거기에도 또 한 명의 청년이  유독 부대원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는 육안으로 봤을 땐 특이한 신체적 결함은 없었다. 허우대도 멀쩡했다. 그런데 유난히 흰 얼굴과 굼뜬 행동이 문제였다. 깔끔한 외모에 단정한 용모는 높이 살 만 했지만 장차 빨치산 전사에게 요구되는 신체조건은 아니었다. 다른 청년들은 지금 당장 총을 쥐어줘도 혁명전사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농촌청년들 사이에서 그 청년만이 유독 출신성분이 의심되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농부는 아닌 것 같고 필시, 사상개조가 시급히 요구되는 '먹물' 든 인간이 분명해 보였다.

"쟤는 뭐하다 왔나? 학교 교직원인가 아니면 면서기인가?"
"아닌데요. 쟤도 우리랑 같이 농부인데요."
"우린 척보면 안다. 그러니까 바른대로 대라. 공무원인가 아니면 선생인가. 그럼 혹시 경찰? 딱 봐도 농부는 아니고 도대체 정체가 뭐야!"
"걘 원래 일은 안 해요. 그냥 놀아요. 그렇지만 공무원은 아니고 선생도 아닙니다. 농부가 맞습니다."

빨치산 간부들의 집요한 의심도 당연했고 친구들의 말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공무원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농부가 맞긴 하지만 일은 거의 하지 않는 농부였다. 한 마디로 처치 곤란한, 보급투쟁의 '실패작'이었다.

그는 함께 잡혀온 농촌청년들처럼 체격이 다부지지도, 행동이 날렵하지도 않았다. 생전 힘든 일이라곤 거의 해본 적 없는 허약한 심신은 빨치산 부대에서 요구하는 신체조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약한 성격에 굼뜬 행동은 국군과 첨예하게 대치중인 빨치산 부대의 신임 전사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였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누구보다 아버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입산 첫날부터 그는 줄곧 하산할 궁리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예리한 눈빛의 저 빨치산 대장이 호락호락 하산을 허락해 줄 리는 만무했다. 탈영은 꿈도 못 꿀 일이었고 아버지는 그럴 용기도 없었다. 오로지 누군가 붙잡고 하소연 하는 수밖에. 그러나 분위기는 살벌하고 규율은 엄했다. 빨치산 부대에서 하산은, 나이 어린 미성년자이거나 팔 한 쪽이 없거나 다리를 심하게 절거나 정신연령이 모자라는 등 심각한 결격 사유에 한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위의 사항에 해당되지 않는 멀쩡한 사람의 하산 요구는 탈영으로 간주되어 곧바로 처형감이었다.

아버지가 산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

a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부군>(1989)의 한 장면. ⓒ 남프로덕션


보아하니 빨치산 대장은 달려가는 고라니를 가볍게 쫓아가서 잡아올 만큼 행동이 날렵했다. 작고 다부진 체격에 상대방을 쏘아보는 듯한 눈빛은 강렬했다. 꼭 다문 입술에 과묵한 표정으로 부대를 순시하는 그는 감히 근접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렇지만 부대 내에서 유난히 인자한 표정의 한 간부를 아버지는 눈여겨보았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알고 보니 같은 성씨 동성동본이었다. 아버지는 그 인정에 약해 보이는 빨치산 간부를 집중 공략했다.

"전 우리 집 삼대독잡니다. 아버지는 병환이 깊어 제가 가장이나 다름없으니 제발 내려 가게 해 주십시오. 제가 아니면 부모님과 동생들은 당장 굶어 죽습니다."

잡혀온 서른 세 명 청년들 중 저마다 집안의 삼대독자거나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거나 아님 처자식이 달렸다거나 하는 절박한 사연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개인 사정을 일일이 봐주다간 빨치산 전선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애처로운 하소연에 서서히 마음이 약해진 빨치산 간부는 아버지의 하산계획에 그만 동조해 버리고 말았다. 살벌한 빨치산 진지에서 아버지는 마음 약한 간부의 동정심을 유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너처럼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이 하산하겠다면 탈영으로 간주되어 당장 총살이야. 그러니까 넌 지금부터 밤눈을 아예 못 본다고 둘러 대라. 우린 밤에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빨치산에게 야맹증은 치명적이거든. 그러니까 이제부터 밤눈 어두운 행세를 잘 해야 해. 알겠지?"

아버지는 그때부터 그가 시키는 대로 야맹증 환자 행세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입산한 밤부터 산 중턱의 보초병으로부터 이상한 정보가 들려왔다. 아래 산중턱에 밤마다 한 여자가 나타난다는 내용이었다. 그 산은 감히 남자들도 오르기를 꺼려하는 험준하고 으슥한 곳이었다. 하물며 여자가 혼자서 밤에. 산 생활에 익숙한 빨치산 전사들도 오싹할 일이었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 졸지에 삼대독자 아들을 산사람들에게 빼앗겨버린 할머니는 밤마다 산중턱에 서서 부대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이다.

빨치산 부대는 한 여인의 출현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더군다나 그 여인은, 하산을 설득한 보초병을 향해 오히려, '아들을 돌려주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노라' 빨치산 대장을 향해 포고를 했다는 전갈이었다. 남편은 병들고 어렵게 얻은 삼대독자가 산으로 끌려간 마당이라 할머니는 빨치산 대장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오로지 귀하디귀한 삼대독자를 무사히 데려가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집념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연이은 일인시위와 아버지의 가짜환자 행세는 급기야 강철 같은 빨치산 대장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입산 일주일 만에 팔이 하나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 등 등급 외의 신체부자유자들과 더불어 의가사제대를 했다. 멀쩡한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하산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말봉산 자락에 제14연대 빨치산 부대가 주둔한 이래 사지 멀쩡한 사람이 아무 조건 없이 하산을 허락받은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동네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뒤로 한 채 아버지는 그렇게 하산을 했다.

아버지의 귀가로 마을은 술렁였다. 생때같은 자식을, 남편을 산으로 보내놓고 노심초사하던 동네 사람들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 사람들'은 한 번 데려간 사람을 아무런 하자도 없는데 그냥 돌려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유례없는 하산으로 인해 '전설의 빨치산'이 되었다. 당시 뒤에 남겨졌던 신체 건강한 친구들은 훈련을 통해 전사가 되었거나 작전 중 전사 하거나 훗날 토벌대의 소탕작전으로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다. 

"산 사람들이라고 보는 눈이 왜 없었겠냐. 저 양반을 데려다 어따 쓰겠냐, 골치만 아프지. 너희 할머니는 밤마다 아들 내놓으라고 울어쌓고."

엄마 말은 일리가 있었다. 평생 한량으로 유유자적한 아버지 인생을 짚어보면 만약 그때 산에 남았더라면 심각한 '고문관' 병사로 빨치산 부대에 두고두고 민폐를 끼칠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가정경제와는 담쌓은, 아버지는 '천상 한량'

아버지는 '전설의 빨치산' 외에도 '천상 한량'이라는 칭호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게으른 농부에 불성실한 가장이었다. 가정 경제는 일찌감치 상황을 간파한 엄마 몫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한 여름이면 시원한 모시 한복을 차려 입고 한가하게 마을 앞을 배회하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낮잠을 청하곤 했다. 아니면 말쑥하게 양복을 갖춰 입고 바깥출입을 했다.

양복을 멋있게 입고 나선 아버지의 출입처는 주로 관공서였고 늘 공사다망했다. 마을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미해결 사안들이 산적해 있었다. 지지부진한 신작로 막바지 공사 건으로 이장 대신 면사무소에 압력 넣기, 삽질도 못하고 있는 신설저수지 건으로 주민들 설득하고 면장하고 담판 짓기, 졸업장 없는 이웃집 총각 청탁으로 중학교 서무과에 위조서류 만들러 가기, 새로 부임한 초등학교 교장하고 학교 상수도 건설 건 의논하기, 군청 과장한테 모종의 건으로 줄 대러 가기 등등.

그는 면소재지, 군청, 학교, 대도시 광주, 서울 등지로 몇날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열과 성을 기울이는 그 모든 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가정경제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명예직 관련 업무들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이웃과 마을과 사회의 미해결 사건을 처리하러 다니는 동안 우리 집 돼지우리는 다 쓰러져서 돼지가 튀어 나와 마당을 활보하고 다니고 뿌려만 놓고 타작을 미처 못 한 볏단은 비에 홀딱 젖어 일 년 농사를 망쳐버리곤 했다. 타인과 사회를 향한 그의 멸사봉공 정신은 길이 칭송받을 일이지만 결코 바람직한 가장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또 농촌문화에 어울리지 않게 지독한 활자 중독자였다.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읽을거리가 변변찮은 시골에서 독서는 그다지 좋은 취미가 아니었다. 정 읽을 것이 궁해지면 하다못해 <농민신문>이라도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렸다. 한 번은, 그런 유약한 아버지 옆에서 언니가 교과서에 실린 소설 한 편을 소리 내어 읽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매료당한 아버지는 새벽마다 감동적인 그 소설, 황순원 <소나기>를 같이 읽자고 우릴 깨워댔다. 그럴 때마다 우리 자매들은 아버지랑 나란히 누워서 언니가 대표로 낭독하는 <소나기>를 조용히 경청해야 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읽어서 다음 장면을 다 외고 있음에도 아버지는 바야흐로 죽어가는 소녀의 유언에 다시금 눈시울을 붉힐 것이고 우린 그런 아버지의 감동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다.

다른 어른들은 진즉 일어나서 거름 지게를 지고 들에 나갈 시간에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 속 주인공의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부엌아궁이에서 엄마가 지피는 새벽 군불소리가 타닥, 타닥 정겹게 들려왔는데, 그렇게 평화로운 정경만큼 무능한 가장이 방치한 가정경제는 그때쯤 바닥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그는, 뜻 맞는 마을 청년들과 연극공연을 한다고 어울려 다녔는데 그 자신이 직접 연극 대본을 집필하느라 몇날 며칠 밤을 새는가 하면, 마을에 공식 지정곡이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길이 남을 마을 찬가를 짓는다고 고심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명 아마추어의 손을 거쳐 탄생한 '마을 찬가'는 악보도 없이 현재까지 구전되어 오고 있다. 비공식 마을의 지정곡으로 채택되어 마을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는 관광버스 안에서 음주가무가 시작되기 전 첫 순서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난 어렸을 적에 어른이라면 누구나 그처럼 공자와 논어를 무시로 외고,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줄줄이 꿰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간파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그가 지은 시가 일본인 선생의 눈에 띄어 지방신문에까지 실렸다는 회고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가정경제에 드리운 그늘을 한 번도 자책하지 않은 아버지

'무능한 가장'이라는 원성을 달고 사는 그였지만 다양한 사회활동 외에도 조상을 섬기고 가문을 보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는 충만해 있었다. 유서 깊은 정씨 문중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마을의 상대 성씨인 제주 양씨를 은근히 견제하고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의, 가문에 대한 의무감은 남달랐다. 정씨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선양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그가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과년한 문중 처자들을 외부의 음흉한 청년들로부터 무사히 지켜내는 것이었다.

마을의 우편배달부는 수신인이 정씨로 되어 있는 모든 편지와 서류에 한해서 아버지에게 먼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마을 입구에 버티고 선 아버지의 철통같은 검열을 마친 편지들만이 비로소 수신인에게 배포 될 수 있었다. 내용이 의심되는 모든 편지는 가차 없이 아버지 손에서 개봉되어 그 민망한 사연이 낱낱이 드러나곤 했다. 익명을, 가명을 사용한 청년들의 교묘한 위장편지도 아버지의 예리한 시선을 비켜가진 못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아버지는 그 모든 부고와 문서로 위장한 연애편지들을 여지없이 가려냈다.

그렇게 적발된 불온한 편지의 여파는 컸다. 사건의 전모를 들켜버린 큰댁언니는 마을 밖 출입이 금지되었고 발신인으로 지목된 청년은 끝까지 추적하여 감히 하동 정씨 가문을 능멸한 죄 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아버지 한 사람의 고독한 몸부림에도 과년한 일가 처자들은 계속 자라났고 혼자서 연애의 진원지인 그 많은 물방앗간을 통제하는 일은 점점 버거워졌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해이해진 기강과 유교문화에 기반 한 씨족사회의 붕괴를 한탄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야말로 남의 청춘사업에 개입하여 연애편지를 붙들고 부들부들 분노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자신도 마을의 전쟁 미망인으로 부터 날이면 날마다 구구절절 구애의 편지를 받는 수신인이었던 까닭이다.

집에서는 소설 속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눈물 흘리던 아버지는 학교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운동회나 어버이날 행사에서 아버지는 항상 내빈석 중앙에 교장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학생들의 사열을 받았다. 아버지가 앉아 있는 육성회장 자리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영진이 아버지나 경숙이 아버지 같은 분들이 더 어울림직했다. 그러나 고졸 학력의 그들은 들에서 열심히 쟁기질을 하느라 바빴고 육성회장 자리는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아버지가 차지했다. 학교 상수도시설추진위원장, 마을 개발위원장, 신설저수지담당총무, 농협비상근명예이사 등 모호한 이름의 감투를 그는 평생 몇 개씩 달고 있었다.

아버지의 지나친 대외활동으로 인해 우리 집 가정경제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논에는 벼보다 피가 많이 자랐고 제때 손보지 않은 무논은 끄떡하면 방천이 나서 논두렁이 비에 휩쓸려갔다. 수확시기를 놓친 농작물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당연히 단위면적당 소출이 형편없었다.

"한나절만 '출입' 안 하고 피를 뽑으면 될 것을. 내가, 나락 적게 나올까 이러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논에 피가 끓으면 남 보기가 민망해서 그러요. 눈 딱 감고 한 나절만 피를 뽑으면 안 되겄소?"
"어허, 이 사람이. 나도 다 생각이 있다니까. 지금 '우루구아이 라운드'협상이 한참 진행 중이란 말이지. 난 그거 결과 나오는 거 보고 농사지을 거니까 귀찮게 말라구."

도대체 시골의 소농규모 농부에게 논에 피 뽑는 거하고 우루과이라운드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아버지는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는 채 엄마 말을 단번에 묵살해 버렸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바라는 바는 소박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장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밖으로 돌아다닐 바에야 이장이라도 하고 있으면 그러려니 포기하고 살겠다는 것이 엄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가장 재미없어 하는 일이, 직책이 바로 그 이장이었다. 이장도 싫지만 학교선생도 지서경찰도 심지어 면장, 농협조합장도 아버지가 한심해 하는 직업군들이었다. 그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하는 골치 아픈 일들을 극도로 꺼렸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애덤스미스가 제시했던 '푸줏간 주인의 이기심, 빵집 주인의 이기심, 양조장 주인의 이기심'이라는 명제는 내 아버지의 경우에 적용되지 않는 이론이다. 아버지가 방치한 우리 집 가정 경제는 엄마의 극심한 희생과 이웃 친척 아저씨들의 자발적인 박애심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유교적 성향이 짙은 씨족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엄마는 평생 재봉틀 앞을 떠날 수 없었고 이웃 친척들은 십시일반으로 가장이 해야 할 일을 거들어 주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무능으로 인해 가정경제에 드리운 그늘을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았다. 그에게 인생이란 항상 즐겁고 행복하고 순조로운 평탄대로였다. 그래서 특유의 유머와 낙천적 기질을 유지할수 있었다. 

양지만 밟아온 아버지의 유일한 불행은 '세월'

이제 82살의 아버지는 예전의 훤칠했던 풍모를 대부분 상실한 채 틀니를 낀 볼품없는 노인으로 늙어가고 있다. 과거 한때 한 전쟁미망인 아주머니를 지독한 상사병으로 몰고 갔다는 그 잘생긴 외모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평생을 양지만 밟으며 살아온 그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불행이란 비켜 갈수 없는 '세월'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공사다망하다.

"아가. 김 서방이 김해 김씨 무슨 파였더라? 이번에 우리가 종회에서 큰돈 들여 족보를 갱신하는데 새 족보에는 사위들도 모두 올리기로 했다. 그러니까 김 서방이 정확히 김해 김씨 어디 누구 자손 몇 대손인지 적어서 모레까지 보내주라."
"어? 저, 김 서방하고 끝까지 살지 말지 아직 생각중인데 족보에 올려버리면 어떡해요?"

부녀지간에 예사로 오가는 농담을 보면서 가족들은 나야말로 아버지 기질을 쏙 빼 닮았다고 '지적'한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억울한 누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를 닮아서 한량 기질이 다분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평생 한량이었던 아버지 말년이 크게 잘못돼 보이지 않는 점이 내게는 위안이 된다.

"저 잘난 인물에, 저 인품을 지녀서 가장 노릇까지 잘했으면 내가 복에 겨워서 또 뭔 일을 당할지 알았겄냐. 암, 세상이 공평한 법인데 그런 과한 복을 내가 바라면 쓰겄냐. 저 인물 에 바람 안 피고 돈 안 망해 먹은 것만도 감사하지. 난 평생 그 마음으로 살았다."

엄마는 거의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 훤칠한 외모에 잘생긴 얼굴을 하고 늘 밖으로 나돌면서 그 숱한 유혹에도 여자문제, 돈 문제 안 저지르고 살아준 것만도 엄마는 감사하단다. 그런 체념이 없었다면 그 오랜 세월에 걸친 가장의 무능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이웃과 공익에 재능기부 한 아버지

일주일 만에 빨치산 부대를 의가사제대 했던 아버지는 이듬해 장가를 들어 다섯 자식을 낳았다. 하산을 하던 날, 각각 팔 하나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정신연령이 낮은 하산 예정자들을 앉혀 놓고 빨치산 대장이 했다는 작별 인사를 아버지는 지금도 종종 회고하시곤 한다.

"동무들. 오늘은 우리가 아쉽게 작별하지만 곧 해방정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여러분들이 피치 못할 사정, 부자유스런 신체조건 때문에 이렇게 하산을 하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해방의 그날까지 동무들 검둥개, 노랑개들한테 동조하지 말고 부디 목숨 부지하고 살아남기 바라오. 우리는 산에서 혁명과업 완수를 위해 투쟁할 테니 동무들은 후방에서 지상낙원 건설을 위해 노력해 주기 바라오. 곧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하시오. 그때 다시 만납시다."

그러나 곧 도래할 것으로 장담했던 사회주의 국가는 오지 않았다. 이후 펼쳐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아버지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대대적인 토벌작전에도 그 빨치산 대장의 행방은 끝내 묘연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야맹증이라는 병역면제 사유를 제공해줬던, 인정에 치우친 빨치산 간부는 훗날 오랜 세월이 지나 해후했다.  

하산하던 날 혁명과업을 위해 매진해 달라고 당부했다는 빨치산 대장의 당부를 아버지는 어느 정도 실천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총 대신 특유의 낙천적 성격과 유머를 무기로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한 열성분자였다. 우리에겐 무능한 가장이었으나 빨치산 대장의 당부대로 자신의 능력과 지식, 낙천적 기질과 유머로 이웃과 공익을 위해 재능기부 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이 험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무혈혁명의 전사였던 셈이다.
#빨치산 #아버지 #한량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시키는대로 일을 한 굴착기 조종사, '공범'이 됐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