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이별을 말하고 '시베리아'로 떠났다

[시베리아 이별여행①] 사랑 대신 모험을 택하다

등록 2013.05.28 11:38수정 2013.07.0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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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을 마친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한국에 돌아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나의 꿈이었다. 전 세계의 3분의 1에 달하는 길이, 그것이 지나는 이국적인 풍광, 그리고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 것일 일주일의 시간….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길 위에서 나는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생활을 준비하리라 마음먹었다.

베를린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비자 초청장을 가지고 러시아 대사관을 찾았다. 그러나 비자 발급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결국 독일 유학비자가 끝나는 날,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행 비행기표 대신 서울행 비행기표를 가지고 공항에 나와 있었다.


일주일의 최소 유예기간도 없이 고작 몇 시간 후면 한국에 있을 거라 생각하니 불안했다. 기차 여행 준비를 하느라 제쳐놓은 미래에 대한 고민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곁에는 유학 중 만나 3개월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S가 있었다. 하지만 그리 큰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내 미래에 대한 고민 해결은커녕 우리 둘 사이조차 어떻게 될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도 착잡한 내 마음을 풀어주려 했던 건지 S는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왔다. 공항에 오기 직전까지 준비하다 틀어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 대한 질문도 당연히 빠지지 않았고 질문 끝에 그는 실망하지 말라고, 다음에 함께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어쩌면 나를 달래기 위해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눈을 반짝였다. 나에게 막연하지 않은 다음 일정이 생긴 것이었다. 한국에 가면 영영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남자친구와도 다시 만날 이유가 생겼다. 우리는 그렇게 시베리아를 통해 한국으로 간 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또 하나의 길,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으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2007년부터 준비해온 여행, 하지만 남자친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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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 그대로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를 달리는 자동차. S와 나는 시베리아를 함께 여행하며 우리를 가르는 경계들을 넘고 싶었다. ⓒ 예주연


독일에 사는 이탈리아인 S는 전형적인 유럽 남자에다가 나와 나이 차이도 꽤 났기 때문에 서로 좋아하는 만큼 다른 점도, 다툴 때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놓인 두 길, 시베리아와 실크로드를 함께 여행하기만 한다면 동양과 서양, 성(性)과 나이에 따른 차이는 쉽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매년 유럽에 갔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생활하는 S를 따라 유럽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그러면서 S에 대한 나의 사랑은 깊어졌고 그가 나에게 그랬듯 그에게 어서 한국을, 그곳의 내 가족과 친구들을, 추억과 일상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함께 기차를 타고 한국에 올 수 있겠지, 하고 편도 비행기 표를 끊어 유럽에 갔던 나는 늘 애먼 돈만 날리고 (알다시피 편도 비행기표를 두 장 사는 것은 같은 구간 왕복표를 사는 것보다 훨씬 비싸다) 혼자 한국에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S에게는 긴 여행을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2011년. 약속된 여행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나는 러시아 관광 비자와 세세한 일정계획 등을 다시 한번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S는 이번에도 여행을 미뤘다. 러시아는 너무 추울 테고 기차는 너무 위험할 거라는 이유였다.

황당했다. 나라고 러시아의 겨울이 겁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름엔 조금 더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벽까지 해가 지지 않는 백야에 네프스키 거리를 오래도록 걷는 낭만적인 상상도 해보았다. 하지만 여름에 일이 많고 겨울 휴가가 긴 S의 직업 특성상 우리는 겨울에 여행할 수밖에 없다고 오래전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나는 그래서 러시아 하면 역시 겨울이지, 하얀 눈밭과 예쁜 털코트, 털모자를 실컷 불 수 있겠지, 스스로를 격려해왔다. 무엇보다 '러시아는 좀 위험하지 않나'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러시아 기차 여행 계획을 처음 꺼냈을 때 들을 법한 반응이었다. 수년 동안 함께 준비해온 사람이 막판에 못 가겠다며 꺼내놓는 변명 치고는 너무 궁색했다.

S는 처음부터 이 여행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나에게 이 여행의 의미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나에게 이 여행은 우리의 관계를 이어나가게 해준 소중한 약속이었다. 그 관계를 더욱 단단히 묶어줄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반면 S에게 이 여행은 '대통령'이라는 장래희망이나 '세계일주'라는 꿈 같은 것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을 말해보는, 그러나 대개 말하는 사람 스스로조차 이뤄질 거라 믿지 않고 그렇기에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막연한 무언가 말이다.

나의 '곰스크'는 어디일까... 시베리아로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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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한 호스텔에서... 벽면에 여행자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볼 수 있다. ⓒ 예주연


실제로 S는 화를 내는 나에게 지난 몇 년 동안 반복한 말 그대로 다음에 가자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시베리아는 계속 그 자리에 있을 텐데 무엇이 급하냐고도 했다. 그렇다. 시베리아는 계속 제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거기에 가지 않는 이상 나에게로 오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S는 이제껏 내가 거기에 가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차곡차곡 쌓아놓은 정보, 그러니까 러시아는 안전하고 겨울 여행도 할 만하다는 사실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비현실적 이상주의자로 몰아갔다.

그렇게 그에게 화도 내보고 설득도 해보던 중 독일 작가 프리츠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곰스크에 대해 듣고 자란 주인공 남자가 결혼 직후 새신부와 함께 꿈의 도시 곰스크로 향한다. 전 재산을 주고 산 기차표를 가지고서.

그러나 잠시 정차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기차를 놓치고, 다음 기차만을 기다리는데 매번 기차를 타지 못한다. 처음에는 새 기차표를 살 돈이 없다. 충분한 돈을 모으자 아내가 임신을 한다. 곧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안정된 직장을 갖고 큰 집으로 이사를 하다 보니 나이가 드는 식이다. 주인공은 이건 진짜 자신의 삶이 아니라며 곰스크를 계속해서 꿈꾸지만 끝내 그 작은 시골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내가 꼭 이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S는 여행을 계속해서 방해하는 주인공의 아내였다. 아내는 기차 여행에 지쳐 시골마을에서 쉬고 싶어 한다. 주인공이 기차표를 사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하고 번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저축하는 동안 비싼 소파를 사들인다. 그 소파를 곰스크에 가지고 가려다 기차를 다시 한 번 놓치게 만들고, 혼자서라도 떠나려는 주인공을 임신을 고백하며 붙잡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맘껏 뛰어놀 정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나도 바라는 것을 영영 실행하지 못한 채 꿈만 꾸는 삶을 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 뒤에 현실을 애써 합리화하거나 주변 상황과 S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S에게 이별을 통고했고, 혼자 러시아에 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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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러시아!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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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스크 중학생들. ⓒ 예주연


곰스크는 실재하지 않는 소설 속 지명이다. 하지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첫 날, 나는 곰스크를 만났다. 같은 기차 칸의 중학생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모스크바에 단체 견학을 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그들의 고향이 바로 옴스크였던 것이다.

앞에 알파벳 하나만 더 붙이면 곰스크가 된다는 것을 알고 나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떠올렸다. 소설의 작가도 나와 같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던 건 아닐까, 도중에 만난 옴스크에서 영감을 받고 가상의 도시 이름을 만든 건 아닐까 마음대로 상상을 해보았다. 기차라는 모티프도 그렇고 당시 독일과 러시아의 교류로 미뤄 전혀 근거 없는 상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곰스크에 가게 되었구나, 다시 말해 꿈을 이루어냈구나, 감격하면서 나는 기차에서 첫날 밤을 보냈다.

덧붙이는 글 마지막 사진의 이탈리아어 책을 보고 눈치챘을지 모르겠으나 결국 S는 이 여행을 함께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금요일에 업데이트 될 2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베리아 #국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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