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운동권, 왜 한국 목사가 됐나

[2013 전국투어 - 부산경남 ⑭] 김해 이주노동자로 일하다 귀화한 사연

등록 2013.06.12 10:36수정 2013.06.1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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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5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부산경남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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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수베디 목사. ⓒ 수베디 여거라즈


1996년 10월, 네팔의 많은 국민이 부산하게 명절을 준비할 때였다. 나는 '행복한 나라' 한국에 갈 준비에 바빴다. 많은 기대와 기다림 끝에 도착한 곳은 충남 금산군 복수면 수영리 407번지였다.

한국전쟁, 광주민주화운동, 1988년 서울올림픽, 빠른 경제성장 등으로 알고 있던 한국. 네팔 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을 졸업해도 네팔에서는 취업이 어려웠다. 어느날 해외인력송출 업체 직원이 와서 말했다.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갈래? 한국에서 선진 기술 배우며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어! 기술 배워 네팔로 돌아오면 취직도 쉽고."

선진 기술 배울 수 있다더니....

그의 말을 믿고 도착한 한국. "선진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곳은 노동자 6명이 일하는 작은 비닐 공장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해 본 사장님과 미군 부대에서 일했던 한 아저씨의 '짧은 영어'로 안내 받으며 공장 생활을 시작했다.

'선진 기술은 언제 배우지?' '이 공장에는 어떤 기술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가슴에 품은 채 힘만으로 하는 일을 시작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단순 노동만 했다. 그때야 알았다. 산업연수생 제도는 사기였다.

한국에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공장 문이 닫혔고 내 꿈은 무너졌다. 갈 곳 없던 나는 한 교회로 갔다. 어려운 이웃 등을 섬기는 그 교회는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선진 기술을 배운다는 꿈은 무너졌지만, 학생운동 시절의 꿈이 살아났다. 사회 변화를 향한 꿈 말이다.


산업연수생 생활을 마무리하고 1998년 네팔로 돌아갔다. 이후 1999년 다시 한국에 왔다. 이번엔 신학공부가 목적이었다. 학생 신분으로 살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이주노동자들과 친구가 됐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은 그대로였다. 대전의 한 교회에서 이주노동자를 위한 일을 시작했다.

2005년 3월 경남 김해로 옮겼다. 계속 이주노동자 관련 일을 했다. 조금씩 한국말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대전과 김해의 말은 많이 달랐다.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주노동자를 위한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김해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았다. 지금도 국내에서 두 번째로 이주노동자가 많은 지역이 김해다. 조금씩 이주노동자 친구가 생겼다. 이주노동자 상담 등을 위해 회사 고용주를 만나러 가면 무시의 눈길을 받으며 이런 반말부터 들었다.

"왜 왔어?"
"어디 살아?"
"돈 많이 벌었냐?"
"한국 여자랑 결혼했어?"

화가 났지만 참고 웃으며 말했다. 김해 동산동 시장 쪽에는 이주노동자가 많다. 약 2만여 이주노동자가 거주하는 동산동 시장과 서상동에서는 이주민에 대한 차별이 크지 않다. 하지만 이 지역만 벗어나면 이상한 눈빛과 신기한(?) 질문을 받기 일쑤다.

귀화를 결심하게 된 배경

가나한 나라 네팔에서 태어난 나는 원래 경제학자를 꿈꿨다. 네팔 트리부번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지만, 사회는 기대만큼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 때는 다른 문제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주노동자의 삶은 많이 열악했지만, 나 개인만을 위하며 살았다. 

인권 운동하는 한국의 기독교 목사들을 만난 뒤 조금씩 달라졌다. 나 혼자만을 위해 사는 게 싫어졌다. 노동자가 아닌 신학생 신분으로 한국에 살면서 인권단체에서 일했다. 여기에서 많은 걸 배웠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13년 이상 생활했다. 결혼해 아이도 낳았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차별을 받았고 비자를 받아 활동하는 인권운동도 한계가 있었다. 고민 끝에 한국의 이주민 인권과 삶의 질 개선을 위해 한국인으로 귀화를 결정했다.

김해 지역의 이주노동자 규모는 공식적으로 약 1만7000명이다. 미등록 노동자까지 합치면 약 2만 명 정도다. 경기도 안산시 다음으로 많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인이 꺼리는 3D 업종에서 용접, 도장작업 등의 일한다. 대개 공장 기숙사(컨테이너 박스, 공장 한 구석의 작은방, 옛날 주택 등)에 거주한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공장에서 생활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동료 외 다른 한국인을 만나기 어렵다. 일상적으로 공장 한국인 관리자에게 차별을 겪기에 다른 한국인 만나는 걸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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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2일 김해이주민의집 창립식이 열렸다. ⓒ 수베디 여거라즈


김해 이주노동자들은 쉬는 날이면 주로 같은 국적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서상동 일대 이주민식당이나 종교 시설에 모인다. 구직을 위한 공간, 마땅히 쉴 곳 등이 없이 있는 것도 아니다. 평소 혼자 생활하는 이주노동자는 쉬는 날에 친구들을 만나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

업체 변경 희망자, 산업재해와 건강 문제로 일을 못하는 이주노동자, 미등록 이주민 등에 대해 김해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대개 모른 척으로 일관한다. 노동부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이주민이 느끼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이주민이 2만 명 넘게 거주하는 김해의 현실. 당연히 이주민을 위한 쉼터, 병원, 통역서비스 지원 등이 필요하다.

전국에서 이주민 두 번째로 많은 김해... 현실은?

그동안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유학생, 선교사 그리고 이민자로 살았다. 신분에 따라 만나는 사람이 약간씩 다르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민에 대한 차별은 대개 비슷했다. 한국 국적을 갖고 당당히 한국인으로 사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남에만 약 8만 명의 이주민과 이민자가 산다. 80% 이상이 이주노동자다. 그러나 정부는 이주노동자를 아직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구성원으로 인정 못 받는 이주노동자는 쉬는 날이면 그들만의 장소에 모인다. 외로워서 더욱 그렇다. 집단으로 모이면 한국인은 이들을 범죄 집단 보듯 쳐다본다.

나는 지난 5월 여러 주변 사람들의 힘을 모아 '김해이주민의집(Ghimhae Migrants House)'을 만들었다. 5월 12일 창립총회에는 김해YMCA 등 시민단체 관계자, 이주민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주민이 직접 운영하는 김해이주민의집은 앞으로 이주민이 한국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인권과 권익을 보호받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이주노동자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당연한 일이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특히 쉼터와 의료시설, 통역 지원 등이 필요하다. 그런 지원이 한국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거다.
덧붙이는 글 글을 쓴 수베디 여거라즈 기자는 네팔에서 태어났다.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닌 뒤 현재 한국인으로 귀화해 목사로 살고 있다.
#이주민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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