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나니 빚 1300만원... 알아서 조심하라고?

저축은행, 허술한 대출심사에 서민피해 늘어나... 관리감독 시급

등록 2013.06.15 12:35수정 2013.06.1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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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6일 오전, 평소와 다름없이 잠에서 깬 취업준비생 권진수(가명·28·서울시 서대문구)씨는 자신을 찾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본인 앞으로 약 800만 원이 대출돼 있으니 빨리 갚으라는 내용이었던 것.

전화기 속 굵직한 목소리의 남성은 "당신 우리 은행에서 돈 빌렸지 않느냐. 잠 깨고 밀린 이자나 내라"며 위협적인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가족들 앞에서 잠시 공황 상태에 빠진 권씨는, 작년 말 외사촌형인 김민수(가명·33·연기자)씨가 운영하던 중소사업체 입사를 위해 서류를 낸 사실이 기억났다.

사촌형은 재직 증명 및 회사를 법인사업체 전환에 필요하다며 권씨의 신분증 사본과 졸업증명서, 통장사본 등을 요구했다. 그것도 당시 음악학원에서 근무 중이던 권씨를 독촉, 점심시간을 쪼개 서류를 보내게 만들었다.

외사촌이 명의를 도용해 S저축은행(금리32%)과 M저축은행(금리37%)에서 받은 대출은 총 1300만 원. 명의 도용 사실을 전혀 몰랐던 권씨는 "그야말로 날벼락"이라며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출심사가 이렇게 허술한지 처음 알았다. 저축은행도 금융기관인데 대출심사가 이렇게 허술할 줄은 몰랐다"고 덧붙였다. 권씨는 현재 금융감독원에 이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고, 사촌형 김씨를 형사 고소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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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생 권씨는 저축은행의 허술한 대출심사를 이용한 사기 피해를 입었다. ⓒ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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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형 김아무개씨는 명의를 도용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당초 목적은 그렇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 화면 캡쳐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서 제공하는 '묻지마 대출'로 인한 피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저축은행은 20~38%대의 고금리임에도 본인확인 절차가 전화 등으로 매우 간단, 이를 악용한 금융사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1일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2012년 저축은행은 영업정지로 업계전반에 걸쳐 부실화가 진행되면서 전년대비 민원제기가 54.3%나 늘었다.

보이스피싱 집단소송을 진행 중인 이준길 변호사(법무법인 선경)는 "피해를 입증하는 것은 소비자가 아닌 금융기관의 의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소비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계속 똑같은 사고가 나는 걸 방치한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와 함께 작년 12월에 소장을 낸 보이스피싱 집단소송 제기자는 230명, 피해금액은 약 60억에 달한다. 그런데도 감독당국은 물론 해당 금융기관도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어 피해를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출신청 직접 해보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출 허가


기자가 직접 시도해본 결과, 실제로 S저축은행의 청년 대출상품은 졸업증명서 등 관련 서류만 제출하면 600만 원의 대출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직장인 대상 대출상품을 취급하는 H저축은행은 최소한의 조건인 서류마저도 필요 없었다. 해당 은행의 서아무개 대출상담사는 "공인인증서와 고객님 휴대폰 명의 확인만 되면 최고 1500만 원까지 당일 입금이 가능하다"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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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저축은행에 간단한 개인 신상정보를 입력하자, 바로 600만원의 대출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 유성애


대출자가 직장인인지는 어떻게 확인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일단 전화통화를 통해 고객 정보를 전산망에 올려놓고, 대출자 회사에 택배나 카드 수령이 왔다고 확인하는 식으로 진행한다"면서 "월요일 오전에 신청하면 오후1~2시에도 받을 수 있는, '당일 송금 개념'의 빠른 대출"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공인인증서와 휴대폰 인증을 통해 대출 가능한 해당 상품의 금리는 9.9%~최대 34.8%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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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저축은행은 무서류, 무방문으로도 당일 대출이 가능한 대출 상품을 팔고 있다. ⓒ 화면 캡쳐


그러나 금융 거래의 주된 결제수단으로 쓰이는 공인인증서가 안전하지 않다는 문제제기는 꾸준히 있어왔다. 지난 5월 민주당 최재천 의원과 이종걸 의원이 입법예고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에 함께 참여한 김기창 고려대 교수는 "한국의 공인인증제도는 전세계의 인증 메커니즘에서 신뢰받지 못하는 제도"라 말했다. 그는 "금융사고가 나면 금융회사가 물어야 한다는 규정이 전자금융거래법 제9조에 있음에도 유명무실해진 이유는, 정부가 공인인증서를 안전하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더불어 영국과 미국에서는 비슷한 사례가 일어날 경우, 금융기관에 더 큰 책임을 물어 은행 당국이 '보안강화'에 힘쓰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설명한다. IT관련 소송을 주로 담당하는 김경환 변호사(법률사무소 민후) 또한 "우리나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면서, "저축은행이 인터넷 대출 등 온라인 서비스 제공을 하려면 충분히 준비해야 하는데, 보안 역량이 없는 금융 기관이 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고 덧붙였다.

'보안 강화땐 절차 더 번거로워져" vs "복잡해도 근본 대책 고민해야"

이렇듯 피해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저축은행을 관리·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금융감독원에서는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을까. 송인범 금융감독원 저축은행 감독국 총괄팀장은 "개인정보를 함부로 주지 않는 등 일단 본인이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명의 도용 등 저축은행과 관련한 서민 피해에 대한 해법을 묻자, "보안을 강조하느라 본인확인을 더 강조하게 되면, 절차가 번거로워지고 지나치게 복잡해지는 부분도 감안해야 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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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은행의 묻지마 대출과 이를 방치하는 정부 당국이 피해자를 늘린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은행에서 상담 중인 소비자들의 모습(해당 이미지는 기사와 상관 없음). ⓒ 유성애


지난달 15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오는 9월 26일부터 모든 금융소비자를 대상으로 '전자금융사기 예방서비스'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공인인증서를 재발급 받거나 인터넷뱅킹으로 하루 300만 원 이상 자금을 이체할 때는 지정한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이용해야 한다.

김경환 변호사는 그러나 지정 IP제도 등은 이전에도 다 있던 서비스라며 "당국이 시키니까 마지못해 하는 이런 대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매번 사후 처방전 식으로 가는 것보다는 멀리 내다보고 전자금융서비스만의 원칙, 근본적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전자금융 사기에 대해서 금융기관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밝힐 필요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명의도용 사기 피해 사례를 제보한 권진수씨는, 취재가 진행되는 내내 녹취파일, 캡처 화면 등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이렇게 쉽게 대출해주는 상품이 있으면 사회적으로도 피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허술한 대출심사를 계속한다면 나처럼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늘어날 거고, 특히 사회초년생들이 속아 신용불량자가 되면 다른 취업도 힘들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며 더 이상의 피해자가 없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권씨는 조만간 청와대 신문고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해당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글도 올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기피해 #대출사기 #저축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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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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