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화' 나는 분들만 읽으세요

[서평] 20여명의 친구들과 함께 읽은 틱낫한 스님의 <화>

등록 2013.06.28 15:45수정 2013.06.2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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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애씨는 여러 가지로 잔뜩 화가 난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 박정민씨는 이 책을 읽기 얼마 전 잠투정하는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 김경훈씨는 이 책을 읽고 친구와 싸우고 나서 1년 넘게 말 한 마디도 섞지 않았던 일이 생각났다고 한다. 구유리씨는 10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한 번 펼쳤다.

틱낫한 스님의 <화>(명진출판사)를 읽은 20여 명의 사정은 저마다 다채로웠다. 나도 이 책을 읽을 당시 화나는 일이 많았다. 어떤 책을 읽느냐도 중요하지만, '언제' 읽느냐도 중요하다. 갑자기 스피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슬픈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에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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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의 <화>를 읽고 댓글놀이한 흔적들 ⓒ 명진출판


틱낫한의 <화>는 화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함께 이 책을 읽은 구유리씨도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다만 '화'가 생겨나는 과정을 차분히 살펴보고 싶은 사람은 발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힐링' 코드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출판 시장을 강타한(지금도 강타하고 있는)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의 힐링 서적들을 읽고 도움을 받은 독자라면 마땅히 틱낫한 스님 앞에 묵상하라!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내가 <화>를 잡고 읽은 이유는 화가 무엇에 쓰는 물건이고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화'는 '속도'와 관련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만물은 당연히 만물로부터 만들어지지만 단지 빠르고 늦음과 어려움과 쉬움이 다를 뿐이다. 예컨대 서로 맞대어 있는 것은 빠르게 변모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늦게 변모할 것이다."(생성과 소멸)

틱낫한 스님이 화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제안한 것들의 공통점은 '느림'이다. 의식적으로 호흡하기, 의식적으로 걷기, 그윽한 마음으로 감싸안기, 화를 이해하고 그 속에 있는 고통을 들여다보기,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을 연민하기. 마치 고요한 산숲에 숨어 있는 사찰과 같다. 역시 불교는 느림의 종교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속도를 가지고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방식이다. 마치 차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스쿨 존을 만났을 때 브레이크를 밟으며 의식적으로 속도를 낮추듯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화>가 이야기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다. 그런데 왜 이 짓을 해야 하는가? 틱낫한 스님은 자유롭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화가 나를 잡아먹어 버리거나 '화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자유인이 아닌 사람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55쪽)

<화>를 읽을 때 도움이 될 만한 TIP

당장 화가 난 사람에게는 충분히 설명을 했으니, 이번에는 책을 즐기는 독서가에게 주의사항을 일러두고 싶다. <화>는 스님, 그것도 엄청 유명한 스님이 쓴 '교리서'의 일종이다. '에세이'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교리서라는 게 무엇인가? 계몽할 목적으로 쓴 글이다. 그래서 '가르치려 드는 글'에 유난히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분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교리를 정해 놓고 거기에 살을 채워 나가는 게 <화>의 골자다. 거기다 <화>는 에세이와 자기계발서, 힐링 서적의 특징을 배합해 독특한 연출력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교리서는 교리서다. 우선 '명상과 호흡, 걷기 반복' 등과 같은 실천적 방법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지루할 수 있다. 또 사례가 나오는 부분은 '팩트'지만, 현상에 대한 인문학자의 관찰이라기보다는 교리에 맞는 사례를 소환한 느낌이다. 지적인 즐거움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줄 알고 쓸까 말까 망설였는데, 함께 읽은 오일수씨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큰 감동이나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별로 없었는데요. 명상과 마음챙김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어봤는데 방법들이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만 화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든 비유는 기가 막힐 정도로 놀라웠다. 특히 화를 '아기'에 비유하고 화난 사람을 '엄마'에 비유해 아기가 울면 엄마가 모든 일을 멈추고 달려가 안는 것처럼 화를 아기처럼 안으라는 말은 가슴에 깊이 남았다. 그리고 '선풍기 비유'도 절묘했다. 선풍기를 끄면 날개가 한동안 돌아가다가 비로소 멈추는 것처럼 화 역시 당장 멈출 수는 없으니 '연착륙'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어디서 써먹기 좋은 말들이 많이 담겨 있다.

이 밖에 함께 읽은 분들이 제안한 팁(TIP)들을 소개할까 한다. 김경훈씨는 곁에 두고 틈틈이, 특히 화날 때마다 거울을 보듯이 꺼내서 읽으면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틱낫한 스님도 화가 났을 때 거울을 보라고 말했다. 김은식씨는 화를 품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틱낫한 스님의 말에 덧붙여 "그러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상과 거리를 두고, 내 마음과 거리를 두어야 자세히 보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매몰되지 않고 깨어있다는 말이니까. 원정은씨는 '농부'에 비유했다.

"농부는 이미 수련자인 것 같아요. 늘 만지는 흙과 생명체들이 화를 흡수할 것 같아요. 너무 힘들 때 자연으로 나가면 누그러지는 경험을 누구나 하잖아요. 자연을 가까이 하는 삶도 화를 다스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박정민씨는 콕 집어서 한구절을 부적처럼 사용하라고 제안했다. "화를 내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라는 구절이다. 화가 나는 시점에 이 구절을 복기하고 부적처럼 마음 어딘가에 붙여 놓는다면 화가 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얼마 전 아내와 크게 싸운 일이 있었는데, <화>의 내용을 바탕으로 복기를 해보았다. 왜 화가 커졌을까? 정답은 '레이스'에 있었다. '레이스'란 도박에서 상대방이 돈을 걸었을 때 판을 키우기 위해서 두 배로 더 베팅하는 행동을 말한다. 아내가 화를 냈을 때 내가 만약 화를 받고 화를 키우지 않는다면 화가 커지는 일은 없다. 그래서 나는 똑같은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했다. 정말 효과가 있었다!

화 (보급판 문고본) -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명진출판사, 2008


#화 #틱낫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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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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