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짐싸기, 이론대로 하면 될 줄 알았건만

[어느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②] 짐싸기의 기술

등록 2013.07.10 11:24수정 2013.07.3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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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 네팔, 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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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sxc


"짐은 다 싸 놨지?"
"응. 음… 싸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배낭 주위에 물건들을 늘어놨기 때문에 차곡차곡 주워 담기만 하면 돼."


더스틴의 마지막 짐을 챙기고 배낭을 꾸려서 내 짐을 정리해 놓은 부모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춥고 인터넷도 안 되던 이대의 골방과도 이젠 작별이다. 준비성이 심각하게 없는 나의 성격을 무척 잘 아는 까닭에, 더스틴은 내 대답을 듣고도 전혀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준비성이 없는 나라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장기 여행인 만큼 나 나름대로 배낭 꾸리기에 대한 전략을 짜보았다. 간간이 들여다보던 여행자 커뮤니티에는 배낭싸기에 대한 여행 고수들의 충고들이 넘쳐 흘렀다.

충고① : "여자라면 인도에 가더라도 멋진 드레스 한 벌과 구두 한켤레 정도는 가지고 가야 해요. 디너 파티에 초대 받을 때를 대비해서요."

음…. 신데렐라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이라면 모를까, 서울에서도 평생 없던 이벤트가 인도까지 가서 생길 일은 없을 것 같다. 혹여라 있더라도 가서 사면 되지. 이건 탈락.

충고② : "6개월 이상 여행이라면 아무리 체구가 작은 여자라도 50L 용량 이상의 가방은 메야 해요. 나갈 때 다 안 채우고 간다고 해도, 들어올 때 선물 가지고 들어올 걸 생각해야 하거든요."


큰 용량의 배낭이 필요하다는 점은 스포츠 용품 매장의 직원도 강조하는 바였다.

"여행을 얼마나 오래 가시는데요. 네? 6개월 이상이요? 어휴. 한 달 이상만 가도 60L 이상은 필요해요."

매장 직원이 장기 여행을 가보고 하는 소리인지에 대해서는 증명할 길이 전혀 없으나, 일단은 50L 배낭을 착용해 봤다. 체구가 작은지라 내가 배낭을 맨 건지 배낭이 나를 맨 건지 모를 꼴이다. 어차피 나는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 걱정은 나중에 하는 미래지향적 인간이 아니던가. 한 치 앞을 모르는 여행길에 한국에 돌아올 일까지 걱정하여 50L짜리 배낭을 매일같이 매고 다닐 순 없다. 탈락.

모아놓은 물건을 배낭에 넣기만 하면 됐는데...

충고③ : "일단 아웃도어 매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배낭을 하나 사세요. 그리고 필요할 것 같은 짐을 몽땅 주위에 늘어놓는 거죠. 처음에는 소주도 한 5병 싸고, 목베개 같은 것도 싸고…. 그런데 다 넣고 배낭을 메면, '이걸 정말 다 이렇게 들고 다닐 자신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럼 하나씩 빼는 거예요. 마음도 비우고, 짐도 비우는 거죠. 이걸 한 일주일정도 반복하다 보면, 내 여행에 꼭 맞는 초정예의 배낭이 완성되게 됩니다!"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론이었다. 떠나기 1주 전, 더스틴과 나는 아웃도어 매장에 가서 고대하던 35L 짜리 배낭을 샀다. 하지만 그 고수의 충고를 받아 들이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있었다. 배낭이 너무 큰 것 같아 교환. 무거운 것 같아 교환. 이리 교환을 몇 차례 하다보니, 내 것이다 싶은 배낭을 손에 쥐었을 때에는 짐싸기를 위해 주어진 시간이 고작 이틀 남아 있었다. 나는 일단 급한대로 필요할 것 같은 짐을 방 한 구석에 모아두었다. 더스틴의 마지막 짐을 정리하고, 이대 골방을 떠나 내 짐을 모아놓은 엄마집에 도착했다.

"어제 내가 빨아서 옥상에 말려놓은 스포츠 타월있잖아, 어디있어?"

그 많던 시간은 다 어디로 가버린걸까. 3개월, 한 달, 1주일, 항상 충분히 남아있을 줄만 알았던 출발 시간은 흐르고 흘러 3시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어쩌랴. 뭐라도 들고 가야지. 패닉상태의 나는 '내가 챙겨놓은 잡동사니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알리가 없는 엄마에게 다짜고짜 따졌다.

배낭 주위에 잘 모아놓은 물건을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더스틴 엄마가 보내준 초록색 수첩은 꼭 가지고 가고 싶었는데. 수건으로 발까지 닦아버리는 더스틴이랑 수건을 같이 쓰는 일만은 피하고 싶은데. 

"Suji, I thought you were all packed!(짐 다 쌌다며!)"
"I did! I just had to pack them in the backpack!(그래! 가방에 집어 넣기만 하면 됐었다고!)"
"배낭에 짐을 싼다는게 무슨 뜻인지 몰라? 배낭 주위에 물건을 둔다는 게 아니고, 배낭 안에, 이 안에 물건들을 다 집어넣는 것이 배낭을 싼다는 의미라고!"

이런식이라면 고수들의 배낭 싸기 이론은 다 헛것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적어도 여행 가기 전날에는 배낭 안에 물건들을 모두 넣어 놓는 것을 잊지 말라는 그런 충고는 해주지 않았단 말이다.

나를, 불타는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던 더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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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sxc


집 안에는 온갖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고, 딸인 내가 떠난다고 슬픔에 잠겨 있을 게 분명한 엄마에게 시간을 두고 다정한 작별 인사는 해주지 못할 망정, 양말이나 칫솔 따위가 어디 있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사이, 더스틴은 방 구석에 서서 '내가 아무리 너를 오래 알았다지만…'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리를 지를 사람은 자기고 호통을 들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장모 앞이라 화는 못내고 오히려 소리를 꽥 지르며 제정신 아닌 사람처럼 방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나를, 불타는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결국은 스포츠 타월과 양말 한 짝, 그 외의 기타 등등은 찾지 못한 채 배낭 싸기를 마감했다.

"휴. 그래도 다행이다 그치?"

공항에 데려다 주겠다는 오빠 차에 짐을 겨우 구겨넣고 한숨을 돌리며 내가 말했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두들.

"우리 수지가 보고 싶으면 어떡하나."

내 손을 잡고 운을 뗀 엄마는 눈물을 내비쳤다. 내가 어렸을 때는 눈물을 절대 보이지 않던 엄마. 무뚝뚝한 성격에 속마음도 서로 잘 내비치지 않던 엄마와 나. 엄마는 근 몇 년 간 몸이 약해지면서 마음도 여려졌다. 나는 세월을 먹으며 강해졌지만, 엄마는 세월을 먹으며 여려지고 야위어갔다. 서로 다른 세월을 살기에 서로의 세월을 위로해 주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것. 그것이 나이 차이가 많은 우리 엄마와나 사이의 비극이다.

"전화 자주 할게. 화상 통화도 있고."

못난 나는 이런 말이나 수줍게 내뱉었다. 이별은 언제나 어렵다. 차라리, 나처럼 허겁지겁 떠나는 것이 이별을 위해서는 치사하지만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배낭여행 #여행 #부부여행 #인도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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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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