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함에 쩔다 먹은 첫 끼니, "맛없다" 말 못한 이유

[어느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③] 나는 의지의 배낭맨

등록 2013.07.12 16:55수정 2013.07.3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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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 네팔, 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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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쿠알라룸푸르 한낮의 한적한 공원 ⓒ 이수지


"여기 공간이 이렇게나 많이 남았잖아. 어차피 돈 내는 건 똑같다고. 빨리 넣어!"


내 말을 들을 리가 없는 더스틴이다. '똥꼬집 부리지 말라'고 윽박을 질러도 나의 고집은 똥꼬집이지만 자기의 고집은 이유와 근거가 타당하기 때문에 고집이 아니라며 썰을 풀어댄다. 그래, 이번에는 이유가 뭔데?

"생각해봐 수지. 앞으로 6개월 간, 혹은 더 긴 기간 동안 이 가방을 항상 메고 다닐 거라고.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작은 배낭을 골라 짐도 적당히 들고 온 거야. 인도 같은데를 상상해봐. 숙소에 짐을 놓고 다닐 수 있겠어? 하루 종일 배낭을 메고 다니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오늘도 그래야 해. 첫날인 만큼 더더욱! 앞으로의 6개월을 위해 연습을 해두는 거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숙소를 잡아도 이 배낭을 하루 종일 메고 다니시겠다? 여행 내내?"
"어!"

스틴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짙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는 어쩌다가 미국까지 가서 이런 이상한 애를 주워 왔지?

비행기 도착한 날 바로 다음날 밤 기차 예약

1월 말레이시아의 공기는 덥고 끈적였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쿠알라룸푸르 시내로 왔다. 당장에라도 아무 호텔이나 잡아 더러운 몸을 씻고 한 없이 자고 싶은 마음 뿐이지만 오늘은 그럴 팔자가 못 된다. 오늘 밤에 출발하는 밤기차를 예약해 놨기 때문에 어디 가서든 밤까지 시간을 구겨야 했다.


나라는 인간은 타인에게만 이기적인 게 아니다. 미래의 나에게도 이기적이다. 여행 전에는 여행 중의 피곤함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밤을 걸러 오는 비행기를 타고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한 바로 그날 다음 도시로 가는 밤 기차를 예약하는 짓을 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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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룸푸르 회교도 성당 ⓒ 이수지


결국 사물함 공간의 반 이상을 빈 채로 남겨두고 7kg 무게의 배낭을 걸친 미련한 더스틴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 일단은 돈이 필요했다. 지난 1개월간 분명 뭘 준비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정작 말레이시아 돈 한 푼 손에 안 쥐어져 있는 걸 보니 헛짓만 했나보다. 다행히도 은행은 가까웠다. 야자수 나무가 늘어선거리를 지나 은행에 도착했다. 휴일이라 그런지 건물 안은 한산했다.

"조심해! 우리가 돈을 얼마나 뽑는지 유심히 보고 있다가 누가 훔쳐갈지도 몰라. 복대에 재빨리 넣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놨어?"
"아 정말. 아무도 없는데 누가 본다 그래."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고."

더스틴은 자신의 그런 행동이 주위의 이목을 더 끌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복대에 돈을 두둑히 넣은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쿠알라룸푸르 구경이고 뭐고 너무 피곤했다. 일단 밥을 먹고 조금 쉬기 위해 쿠알라룸푸르 타워로 향했다.

거리에는 함께 출장을 온 것 같아 보이는 한국인 가족이 야자수 앞에서 한가로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인간의 최소 욕구인 의식주 하나 해결 못해 더럽고 피곤하고 배고픈 기구한 팔자인데, 짧게 휴가를 온 사람들은 여가라는 고급스러운 욕구를 충족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휴가와 여행은 이렇게 다른 건가. 떠나기 전 친구가 했던 한 마디가 생각난다. 장기여행은 이수지 같은 사람이나 가지, 자기는 그런 고생스러운 건 돈을 준다고 해도 안 가겠다고.

그토록 설렜던 여행 첫날, 온통 쉬고 싶은 생각 뿐

쿠알라룸푸르 타워에서 우리가 선택한 레스토랑은 고작, 푸드코트였다. 천근만근한 가방을 던져버리고 메뉴를 고르러 갔다. 그래도 우리의 긴 여행에서 먹는 첫 끼니니까, 메뉴도 고심해서 골라야지. 푸드코트를 세 바퀴 정도 돈 후 새빨간 카레 누들과 하얀 밥 옆에 반찬이 올려져 있는 메뉴를 골랐다. 낮에 출발해 다음날 낮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타는 바람에 근 24시간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우리는 피곤함에 쩔어 있었지만 배도 고픈 탓에 앞에 놓인 음식에 감사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맛없다.'

울고싶었다. 푸드코트 음식이 맛이 있을리야 없지만, 여행 첫 끼니부터 실패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기, 조금 맛이 없는 것 같지?'라고 더스틴에게 조심스럽게 말해 보고도 싶었지만, 그 말을 내뱉는 동시에 음식이 맛이 없다는 사실은 확실시 되고, 우리 여행의 첫날은 실패했다는 낙인이 찍힐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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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룸푸르의 밤 ⓒ 이수지


지난 겨울. 서울에 있는 말레이시아 관광청에서 받아 온 음식 팸플릿을 보며, 추운 골방에 앉아 우리는 얼마나 큰 꿈에 젖었던가. 맛 없다고 말해버리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우리는 말 없이, 피곤해 넋이 나간 상태로 아무런 열정 없이 면발을 씹어 삼켰다.

고대하던 여행의 첫날, 내 머리 속에 온통 쉬고 싶은 생각 뿐이라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많은 시간과 돈, 기회비용을 쏟아 부으려고 하는데 여행이 즐겁지 않으면 어쩌지? 남들은 직장도 잡고 돈도 모으고 점점 안정된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는 마당에 이렇게 훌쩍 떠나온 건 아무래도 잘못이었나?

내가 애초에 장기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면? 이런식으로 더스틴과 매일 붙어 있다 사이가 악화되어 이혼이라도 해버리면? 그러면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인 건가? 내 머리 속은 이 여행이 초래할 불행한 미래에 대한 불길함으로 가득찼고, 반드시 멋진 여행을 해내고 말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초조한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회교도 성당, 박물관, 새 공원 따위를 돌아다니다 보니 날이 저물었다. 다시 저녁 시간이다. 점심은 조금 망쳤으니, 저녁은 꼭 맛있는 걸 먹어보자! 하는 의지가 불타야 하지만 너무 피곤한 탓에, 우리는 맥도날드를 보자마자 죄책감을 느끼며 의기소침하게 빨려들어갔다. 말레이시아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시아 국가에 있는 맥도날드에 대해 칭송하던 서양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비웃었던가. 우리는 패배감에 젖어 낯선땅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을 익숙한 빅맥의 맛으로 위안했다. 이렇게 첫날이 저물었다.
#세계여행 #부부여행 #장기여행 #배낭여행 #말레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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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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