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이유'가 될 수 있는 사람

[시인 서석화의 음악에세이] - 신용재 <가수가 된 이유>

등록 2013.07.22 20:25수정 2013.07.2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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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해)
참으로 오랜만에 당신을 이렇게 부릅니다.

부르고 나니 삼십오 년 전의 대한민국과 우리의 밤낮에 철로를 놓았던 서울과 대구, 스치는 솜털 한 자락에도 신비와 경이의 세상이 펼쳐지던 열아홉과 열여덟의 우리가 보입니다.

海(해)
저는 제가 당신에게 지어주었던 이 이름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폭풍과 해일은 몰아칠지라도 한 방울의 물일지언정 밖으로 새나가지는 않는 바다, 그런 연유로 저는 당신을 海라고 불렀지요. 당신도 참 좋아했던 호칭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아! 오랜만에 들이쉬는 숨에서 익숙했던 향기가 느껴집니다. 깊은 물속에서도 모세혈관 하나하나 직립하게 하던 피붙이 같은 느낌, 살아오는 동안 놓은 줄도 모르고 놓고 살았던 어떤 풍경들이 끝도 없이 눈앞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참 많은 풍경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서두에서 거창하게 대한민국을 먼저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인가 봅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당신과 제가 동시대에 태어나 자라고, 삼십오 년 전 1978년 9월 23일 서로 앞에 서로를 데려다 놓는 기적을 가능케 한 나라. 제게 애국심은 그날부터 생겨났다고 쑥스러운 고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海(해)
알싸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이 느낌을 무어라 불러야 좋은지요.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 그때의 풍경과 그때의 말들과 그때의 숨소리 여전한 이 기억들을 어떻게 간수하면 좋은지요. 어떻게 저미고 여며 어디에 저장해야 푸른 꽃 피는 곰팡이 피할 수 있는지요.

어금니 아프도록 물지 않아도 입 속에서 자연스레 호명되는 海(해). 오랜 시간 당신의 얼굴은 제 두 눈이 볼 수 있는 온 우주의 전부였고 당신의 목소리는 제 두 귀가 들을 수 있는 온 우주의 소리였으며 당신의 가슴은 제 생애 최초로 껴안아 본 우주의 한 복판이었습니다.

海(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장마가 다시 시작되더니 연일 장대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잠시 눈앞의 풍경이 지워집니다. 바닥에 부딪치는 빗소리만 온 세상에 그득합니다. 이런 때엔 바로 옆 사람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빗줄기에 가려 눈앞도 텅 빕니다. 그 어떤 것에도 집중되지 못하고 한 데 나와 있는 아이마냥 마음이 천 리를 헤맵니다. 삼복더위인데도 발등이 시려 안으로 오므린 발가락이 절벽 끝에 저를 세웁니다.

살아가는 동안, 사랑하는 동안, 자기의 헤진 마음과 자기 안의 추위만 오감을 지배하는 자기 안 골방의 시간,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젠 그저 바라보며 견디며 묵묵히 감수할 줄 아는 나이라는 위안으로 오늘을 버텨냅니다.

지금의 시간은 다시 언젠가 세월 저편으로 우리를 끌고 가겠지요. 먼 옛날 대한민국 국민임에 기립박수를 쳤던 이유가 당신에게 있었고, 지금 이 우기를 견디는 이유 또한 당신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앞으로 살아가게 될 제 모습의 추측 역시 당신으로부터 기인하지 않고선 실루엣도 그려지지 않으니 海(해), 당신을... 제게 생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 불러도 되겠는지요.

海(해)
며칠 전에 들은 노래의 가사가 잠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듣는 내내 그 마음이 읽혀져 먹먹해진 가슴이 결국 이 글을 쓰게 한 이유입니다. '이유'라는 단어가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게 사랑에 대응될 수 있는지요. 정곡을 찔린 것 같은 들킴 속에서 제가 살아가는 이유를 가려봅니다. 사랑 안에서 비롯되는 가지가지의 슬픔과 그 슬픔을 어루만지는 어떤 시간, 그 후를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까지 '사랑의 이유'로 육화된 이 가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터넷에 나를 쳐보면 이제 내 노래가 나와
내가 왜 굳이 이렇게 가수가 된 지 넌 알까
유명하고팠던 이유는 오직 단 하나뿐이니까
니가 날 보고 날 알아듣고 내 생각하라고

TV에 나와 노래해 혹시 니가 볼까봐
날 들으면 날 본다면 날 찾아 줄까봐
기를 쓰고 노래해 그 옛날의 널 위해
그때 다 하지 못했던 내 맘을 담아서

이렇게 노래해

못해부터 살다가까지 니가 없던 건 없으니까
솔직히 터놓고 말해 모두 너와 내 얘기니까
내 노랠 듣고 내가 울고 내가 슬퍼하고
혼자 마치는 나의 이유를 넌 알 것 같은데

TV에 나와 노래해 혹시 니가 볼까봐
날 들으면 날 본다면 날 찾아 줄까봐
기를 쓰고 노래해 그 옛날의 널 위해
그때 다 하지 못했던 내 맘을 담아서

내 아픔과 내 눈물과 내 진심을 다해
내 맘 전한다면 너에게 들릴까

이 몇 분짜리 노래가 별 거 아닌 가사가
니 귓가에 니 마음속에 울려 퍼지기를
미치도록 기도해 제발 니가 듣기를
이런 내 맘이 들리면 너 돌아오라고
눈물로 노래해
                        -신용재 <가수가 된 이유>

海(해)
꽤 긴 가사임에도 이 노래에는 사랑이란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 무엇이 된 이유, 무엇을 하는 이유, 무엇을 바라는 이유를 나열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 아픕니다. 그래서 더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그 사람과 연관되고 연관 지어지는 그런 것 말입니다.

海(해)
방금 전철이 지나가는데 잘못 느낀 걸까요? 우리가 놓았던 철로가 보이며 기적소리가 들립니다. 서울과 대구를 오갔던 열차 속에 살아온 날보다 많은 수의 이유가 실려 지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저뭅니다. 그리움이 발아(發牙)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긴 시간 저의 수많은 이유가 되 준 당신, 海(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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