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무뇌아'로 만드는 한국사 교육의 '축구장'

[주장] 획일적인 시험으로 강제하는 역사 교육은 안 된다

등록 2013.08.05 10:15수정 2013.08.05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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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축구를 싫어한다. 일종의 축구 혐오증에 가깝다. 무엇보다 공차는 실력이 젬병이다. 원래부터 '공'이라는 둥근 놀이 기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한때는 축구공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실력 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군대 시절이 그랬다. 빼어난 축구 실력은 군대 내에서의 삶을 한결 매끄럽게 해주었으니까. 하지만 딱 그때뿐이었다. 군 시절을 빼고 나면 축구를 좋아하거나 잘하고 싶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축구 혐오증에는 배경이랄까 맥락이 있다. 우선 가을걷이가 끝난 논이나 마을 어귀 공터에서 벌이곤 했던 동네 축구. 그 시합은 마을 공터의 부연 흙먼지 속이나 무논 봇도랑의 진창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길에 깔린 잔돌에 미끄러져 제법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에이 매치' 못지 않은 '전투적'인 경기였다. 그런 치열한 '전투성'이 싫었다. 그게 싫어서 빠지기라도 할랴치면 이런 말이 돌아왔다.

"넌 우리 동네 사람 아니냐?"

동네 아이가 두 패로 갈린 그 축구 시합은 대개 머리가 제법 큰 동네 형들이 주도했다. 아이들만의 어설픈 놀이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가령 이긴 편은 승리의 찬가만 부르면 되었으니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진 편에게는 어김없이 머리 큰 형들이 주도하는 푸닥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심하게 욕을 먹든가, 꿀밤 두어 대를 쥐어 박히든가.

점점 나이를 먹고 머리가 커질수록 형들이 강제하는 푸닥거리의 강도가 더 강해졌다. 그럴수록 공을 차는 일이 더욱 더 무서워졌다. 5, 6학년 때쯤부터는 스스로 축구로부터 멀어지려고 무던히 애를 쓰기도 했다. 그 덕분에 동네 형들이나 또래들로부터 남자가 축구도 안 하느냐는 비아냥을 제법 들었다. 그 시절은 내 축구 혐오증의 본격적인 발아기였다.

중·고교 시절과 대학 다닐 때는 축구 혐오 증세가 더 커졌다. 그럴수록 축구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내 노력의 양도 늘어났다. 고교 시절에는 반별 '떼축구'를 자주 했다. 그런 날이면 꾀병을 핑계로 스탠드에서 죽을 상을 지으며 가짜 병치레를 할 때가 많았다. 나는 그 덕분에 우리 반이 경기에서 져도 담임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학과별 대항 축구 경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경기가 있을 때마다 나는 몰래 교문을 '탈출'해 나가기 일쑤였다. 선후배들로부터 게임 호출을 당해 축구를 하게 되는 '몹쓸' 장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똥볼 찬다고 욕 먹고, 잘못해서 부상이라도 당하는 그 '몹쓸' 놀이를 도대체 왜 하는지···.


교문 '탈출' 작전이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군대 전역 후 복학한 이듬해 가을, 후배들 손에 이끌려 반강제(?)로 운동장에 끌려간 적이 있다. 예의 학과별 대항 축구 대회의 준결승(결승?)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후배들은 덩치 좋은 내가 후방 수비를 맡아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그런데 우리 팀이 지게 되면 어떻게 되나. 후배들이 있는 데서 당할 창피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웠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통사정을 하기도 하고, 정색하며 화를 내기도 했다.

결국 선수로 뛰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운동장을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나는 학과의 한 조직원이었기 때문에! 그날 나는 스탠드에서 응원하는 여학생들 옆에 앉아 어색한 응원가를 내내 따라 불러야 했다. 그 응원 덕분(?)이었을까. 경기는 우리 과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직후 운동장 한켠이 웅성웅성해졌다. 곧이어 경기에서 진 상대팀 학과의 학생 몇몇이 각목을 들고 운동장으로 뛰어들었다. 패싸움이라도 벌어질 듯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다행히 실제 폭력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것은 일종의 패배 한풀이를 위한 자위적 '쇼'였을 게다. 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정말 축구에 대해 온갖 정나미가 싹 가셔버렸다.

가짜 병치레나 교문 탈출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악명 높은 군대 축구가 그것.그중에서도 내가 두 번째 중대장을 맞았던 일병 이후 시절은 최악이었다. 그 중대장은 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한 열혈남아였다. 운동, 특히 족구나 축구는 수준급이었다. 그는 주로 족구를 즐겼지만 축구도 상당히 많이 했다.

그는 부대원 모두가 인근 부대와의 축구 경기에 뛸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축구 경기를 철저하게 부대원 훈련이나 교육의 한 과정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편이 이기면, 그날은 경기 이후의 모든 일정이 아주 평화롭고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패배라도 한 날에는 혹독한 질책과 연병장 돌기, 얼차려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쓰라린 패배자들의 마음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기억만으로도 공포스러운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은 왜 축구를 하지 않는 내게 동네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서슴없이 했을까. 진 경기에 각목을 들고 난입한 그 대학생들은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내 두 번째 중대장처럼, 고작 한 판의 축구 경기에서 진 사람들을 정신과 육체의 패배자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정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지금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질문들이다.

축구를 함께 하면 땀을 흘리고 몸을 부딪는 과정에서 팀원 간에 좋은 관계나 유대감이 형성된다는 축구 옹호론이 있다. 한 팀원끼리는 그런 면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를 거꾸로 말하면, 다른 팀원과는 적대적 관계가 형성된다는 식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예의 축구 옹호론은 딱 절반의 수준에서만 진실이다.

안다. 내가 애먼 축구에 대해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지. 이 세상에는 나라와 사람, 조직 사이의 평화와 우애를 증진하는 축구 경기가 얼마나 많은가. 과도한 몸싸움이나 부상이 없고, 승부에도 집착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즐거운 놀이로서의 축구 말이다. 그런데도 당분간, 아니 앞으로도 계속 축구에 대한 내 혐오 증세는 쉬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지난 주말, 나의 축구 혐오론을 더욱 굳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지난 주말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한·일전에서 한국 응원단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대형 펼침막을 내걸었다. 그 직전에 일본 응원단이 욱일승천기를 내건 행위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한다. 그 사례를 보면서 거대한 축구장이 '국가주의 파시즘'의 유령이 지배하는 공간을 떠올리면 지나칠까. 우리나라에서 축구라는 경기가 갖는 과도한 국가주의적 이미지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왜 한국 응원단은 역사 문제를 '고작'(축구 옹호론자들은 용서해 주시라) 축구 경기장으로 끌고 갔을까. 그런 문구를 내보이면 일본 사람들이 역사적 죄의식(?)을 느껴 속으로 '우리가 정말 문제야'라며 반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일본 응원단이 욱일승천기를 휘둘렀을 때, 우리 응원단이 가령 "한국와 일본, 우리 함께 과거 역사의 진실을 찾아요" 같은 문구가 새겨진 펼침막을 내걸었다면 과연 분위기가 어땠을까.

지난 주말 이후 정말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역사 교육에 관한 것도 그중 하나다. 한국사 과목을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자는 분위기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역사 교육 강화 차원에서 한국사 과목을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교원단체인 교총은 이를 위해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도 시험을 통해서라도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역사 교육을 왜 하는가. 올바른 역사 의식을 갖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오류의 역사, 배반의 역사가 다시 펼쳐지지 않기를 바라서다. 역사 교육이 주요 사건의 순서를 외거나 이를 문제로 확인하는 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올바른 역사 의식은 역사적인 사건의 배경과 맥락을 따지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다. 획일적인 시험 제도를 통해서는 결코 형성될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역사 교육을 시험으로 강제하겠다는 발상도 발상이려니와 그렇게 해서 역사의식이 강화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두렵기만 하다. 아니, 그들은 우리 아이들이 진정으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목적이 아이들을 한 꿰미로 엮어 맹목의 '축구장'으로 끌어가는 데 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그곳에서 권력의 입맛에 맞는 역사 교육을 강제하고, 그들을 역사의 '무뇌아'로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이 모든 일이 근거 없는 망상이길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역사 교육 #축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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