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년 전부터 현재까지... '손주바보' 할배들의 일기

'황혼육아' 선택한 할아버지들의 육아서 4선

등록 2013.08.07 11:07수정 2013.08.0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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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에서 조부모의 역할이 커지면서 최근에는 할아버지가 기록한 육아서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 안기성


여기, 나이 들어 손주를 돌보는 일이 힘들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커가는 아이들과 함께 행복과 감동을 느끼며 늙어가는 일이야말로 노년을 풍요롭게 보낼 썩 괜찮은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맞벌이가 대세를 이루면서 자식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돌봐주는 '황혼 육아'가 늘어나고 있다.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부족한 현실에서 맞벌이 부부가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곳은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다.


육아에서 조부모의 역할이 커지면서 최근에는 할아버지가 기록한 육아서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명쾌한 자녀교육서나 육아지침서를 넘어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있는 '손주 바보' 어른들의 사려 깊고 묵직한 이야기를 담은 책 4권을 소개한다.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정석희 저, 황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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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 (정석희 저, 황소자리). ⓒ 안기성


50일 간격으로 태어난 두 손자와 함께 보낸 3년간의 아름다운 기억을 모은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는 아내와 함께 외손자 둘을 맡아 키우며 노년에 뜻하지 않게 찾아온 파릇한 봄을 보낸 한 할아버지의 기록이다.

저자 정석희씨는 은행 지점장을 지내다 1998년 IMF 사태를 맞아 27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명예 퇴직해 작가활동을 펼쳐왔다. 이후 2006년 11월과 이듬해 1월, 50일 간격으로 태어난 두 외손주를 키우겠다고 나선 건 순전히 딸들에 대한 애프터서비스(AS) 차원이었다.

아이들을 맡아서 돌보게 될 아내가 결정한 일이기도 했지만, 내심 딸들에게 살갑게 대해주지 못했던 지난 시절을 보상해주고 싶은 부정이 간절했다. 


직장생활에 매여 사느라 자식들은 대부분 아내 혼자 키웠고, 그에겐 손자를 돌보는 일이 첫 번째 육아나 다름없었다. 모든 게 낯설고 어렵기만 하던 두 아이 돌보기는 이내 난생 처음 맛보는 환희와 보람을 선물했고, 인생 최고의 자랑이 됐다.

손주들과 함께 지내게 된 이후 그의 삶은 철저히 아이들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밤낮없이 기저귀 갈고 우유 먹이고, 유모차 한 대씩 번갈아 밀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 건 피로나 권태가 아닌 기쁨이었다.

아이들이 가져다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껏 가슴으로 껴안지 못했던 아내와 딸들의 삶이 그에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육아를 아이 가진 엄마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현실 속에서 젊은 부모들이 감당해야 할 무게에 가슴 아파하고, 품속의 아이들이 뛰놀게 될 미래를 그려보는 사이 그의 노년은 너그럽고 풍요롭게 성숙해졌다.

저자는 손자들과 부대끼는 유쾌한 에피소드와 더불어 육아가 힘들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현실적 장애들, 그리고 인생 후반기를 사는 남자로서의 소회 등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들려준다.

<하빠의 육아일기>(신상채 저, 세종씨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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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빠의 육아일기’ (신상채 저, 세종씨앤씨). ⓒ 안기성


엄격할 것만 같은 전직 경찰서장이 퇴직 후 세 명의 손자들을 돌보며 육아일기를 펴냈다.

전북경찰청 전주북부서장(현 전주덕진경찰서)을 지낸 신상채(63)씨는 맞벌이하는 아들 부부를 대신해 전주 황방산 자락의 한 마을에서 두 손녀 희수(4), 유수(1)와 외손자 이겸(4)을 맞아 기르면서 일어나는 일상을 <하빠의 육아일기>라는 산문집에 담아냈다.

책에는 아이의 이름을 호적에 올리려고 주민센터를 찾았다가 인명용 한자가 아니어서 낭패를 본 일부터 아이들이 자라면서 겪은 일화와 소소한 일상 등이 할아버지의 시선으로 고스란히 담겨있다.

저자는 "하빠는 발음이 서툰 손녀가 세상에 나와 처음 내뱉은 말로 이 호칭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며 "아이들이 장성해 이 책을 봤을 때 할아버지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책을 썼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다.

할아버지의 손자손녀 사랑은 책 곳곳에 묻어난다. 저자는 아들과 딸을 키우던 젊은 날엔 '먹고사는 데 급급해 여유가 없었노라'는 변명으로 무책임함을 덮어버린 채 살아왔지만, 되돌릴 수 없는 그때의 아쉬움을 곱씹으며 손자들에게만은 후회 없는 사랑을 듬뿍 쏟아주고 싶다고 말한다. "남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더라도 기꺼이 '손자바라기'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전남 고흥 출신인 신씨는 2003년 문예사조 수필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와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현재 경찰문인협회장을 맡고 있다.

<하찌의 육아일기>(이창식 저, 터치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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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찌의 육아일기’ (이창식 저, 터치아트). ⓒ 안기성


<하찌의 육아일기>는 20여 년간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100여 권의 역서를 남긴 이창식씨가 외손자를 돌보며 기록한 따뜻하고 경쾌한 육아 일기다.

맞벌이 부부인 딸 내외를 대신해 아내와 함께 손자를 돌보면서 1년 동안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 속에는 육아를 통해 느끼는 가족의 소중함과 소소한 행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출산휴가가 끝난 후 아이 맡길 곳이 없어 쩔쩔매는 딸을 위해 손자를 맡아 기르면서 수시로 마주치는 감동적인 순간들,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드는 개구쟁이 손자의 유쾌한 재롱, 다칠까봐 가슴을 쓸어내렸던 아찔했던 기억 등 육아 과정에서 겪는 기쁨과 어려움, 고민들이 진지하면서도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 일기 속에 잘 녹아 있다.

나이 든 노부부가 손자를 위해 각종 만화 캐릭터를 섭렵하고, 품에 안고 토닥이며 노랫말이 예쁜 동요를 골라 나지막하게 불러주는 모습에는 가족이 아니면 결코 줄 수 없는 깊고 깊은 사랑이 가득 배어 있다.

육아를 노동이 아닌 만년의 큰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노부부의 이 따뜻한 이야기는 '아이 돌봄'의 가치와 가족 관계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해준다.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김찬웅 저,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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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김찬웅 저/글항아리). ⓒ 안기성


부모가 아닌 할아버지가 손자를 키우며 육아일기를 쓴다는 것은 요즘 시대에서도 드문 편에 속한다. 그 일을 450여 년 전에 행한 사람이 있다. 바로 조선시대 사대부 선비였던 이문건(1494~1567)이다.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는 이문건이 유배지에서 본 손자를 출생부터 16세까지 키우면서 기록한 육아일기 <양아록>을 현대적 필치로 읽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아이의 탯줄을 끊어주는 과정에서부터 홍역·이질·학질 등을 앓는 손자를 간호하는 할아버지의 안타까움,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 앞에 앉혀놓고 공부를 시키다가 잘 따라오지 못하자 속상해하는 마음, 손자를 앉혀놓고 토론을 하다가 언쟁을 벌이는 장면 등 오늘날 가정에서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문건은 손자의 성장 과정을 성장과정을 빠뜨리기 않고 기록하고, 간략한 일기와 함께 중요한 사건은 시를 지어 후세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도록 했다.

자식들이 모두 일찍 죽고 유일하게 남은 손자를 돌보는 일은 이문건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당연히 그의 모든 관심은 손자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손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회초리를 들고 종아리를 내리쳤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자신이 죽은 후에도 손자가 할아버지의 글을 보고 그 마음을 헤아려 어긋나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

양아록을 새롭게 엮은 저자 김찬웅씨는 마흔에 첫아이를 얻고 어떻게 자식을 길러야 제대로인지 고민하던 중 양아록을 만났다. 저자는 손자를 출세보다는 인륜을 아는 사람으로 키우려고 노력했던 한 할아버지의 삶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경쟁이 유난히 강조되는 요즘,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적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어기지 않고 사랑하며 사는 것임을 그것이 행복하게 잘 사는 길임을 가르쳐주는 부모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문건의 삶을 재구성했다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육아전문지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황혼육아 - 여행으로 손자녀 키우기

이정우 지음, 김진규 사진,
프로방스, 2018


#황혼육아 #육아일기 #육아서 #조부모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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