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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디스토피아 기차여행... 기차에서 내려라

[리뷰] 영화 <설국열차>

13.08.12 13:49최종업데이트13.08.1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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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는 자가발전을 한다. 주변의 절망을 외면한 채 궤도위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 모호필름·오퍼스픽쳐스


부자(父子)가 길을 걷는다. 잿빛 하늘 아래서 아침인지 저녁인지 알 수도 없고 세상이 이렇게 된지 몇달 째인지도 모른 채.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야 한다. 가만히 있다가는 승냥이와도 같은 괴한들에게 당하거나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지구는 폐허가 됐고 인간들은 하이에나가 됐다. 혹한과 기아를 견디기 위해 매 순간 삶의 목표는 그저 입으로 뭔가가 들어가는 것. 잠을 잘 때 뭔가 덮을 수 있으면 하루를 또 이어갈 수 있다. 모든 것이 정지된 지구에는 좀비만 존재한다.

코맥맥카시의 소설 <더로드>의 표지, 지구의 종말을 맞이한 아버지와 아들의 수개월에 걸친 여정을 기록한 책.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 Vintage

어느 날 느닷없이 디스토피아로 내던져진 우리를 상상하게 하는 코맥 맥카시의 소설 <더 로드>(2007)의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5~6년 전에 읽은 소설임에도 그 충격 때문일까 뇌리에 또렷하다. 영화화 되기도 했지만 책이 주는 감동을 반감시키는 결과만 초래했다는 평이 있었다.

21세기가 되면서 지구의 몸살은 점점 더 심해져서 이젠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된다. 영화<설국열차>를 보는 내내 나는 소설 <더 로드>와 제러미 리프킨의 <3차산업혁명>을 생각했다. <더로드>는 절망을, <3차산업혁명>은 에너지혁명과 지구 구성원들의 수평적 공존을 통한 희망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영화 <설국열차>는 나에게는 다소 지루했다. 벽안의 배우들 속에서 발견한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 송강호와 고아성이 반갑긴 했지만 좀비처럼 변한 이들이 낯설다.

영화 내용은 뻔하다. 열차에 탄 승객들에게 위계가 정해져 있고, 열차 속 세상의 평화 유지를 위해 잔인한 일상을 감내해야 하는 꼬리 칸에 탄 소위 '루저'(Loser)들. 그들의 혁명과 그 안에서의 예상치 못한 반전 쯤으로 영화가 요약 가능하다면 좀 그런가?

지구 온난화가 심각해 지고 있다. 엊그제 울산의 기온은 섭씨 38도를 기록했다. 마침 오사카에서 온 친구의 말을 들으니 거기도 마찬가지로 섭씨 40도를 육박한다고 한다. 이제 CW-7을 살포해야 할 시기가 다가 오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곧 현실이 될 것이고 그것은 공포 그 자체가 된다.

영화에는 공포는 현실이 되고 현실은 다시 공포가 되는 악의 순환을 겪으면서도 인간의 아니 우리의 권위와 기만은 반복되고 평등은 요원하며 심지어 순간의 쾌락마저도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화<설국열차>에는 우리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윌포드의 하수인격인 메이슨총리가 꼬리칸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즉 분수를 모르면 곤란하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있다. ⓒ 모호필름·오퍼스픽쳐스


자가발전으로 끊임없이 궤도를 무한질주하는 열차에는 물과 음식 심지어는 술도 있다. 다만 제한된 공간임으로 인구가 팽창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고충이 있을 뿐. <설국열차>에 오른 마지막 인류조차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마약을 한다. 도대체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피조물인가?

열차는 곧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이다.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계층이 발생한다. 문제는 누구도 그 계층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 그러난 가진 것이 없는 그들은 그저 가진 자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외에는 도리가 없다. 거부의 순간 팔이 잘려 나갈 것이며, 다리가 절단 날 것이다. 아니면 열차 밖으로 내던져지든가.

<설국열차>의 흥행 속도는 당분간 가속화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솔직히 봉준호의 전작 <괴물>보다는 재미가 없다. 재미 보다는 영화적 장치와 어떤 의미 등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로 여러 번 보는 관객도 있다고 하니 영화 마니아 혹은 봉준호 감독의 코드를 읽어내느라 이미 여러 번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겐 욕먹을 소리지만….

다만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불쾌했던 것은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지구 위에 존재하는 인간들에 대한 실망이 냉소로 바뀌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의 수준으로 격하된 지점, 바로 그 지점이 주인공 '커티스'가 뚫어야 하는 꼬리칸과 그 외의 칸들을 연결하는 네 개의 문이다.

설국열차의 꼬리칸은 닭장과 흡사한 모습이다 ⓒ 모호필름·오퍼스픽쳐스


그 네 개의 문은 리프킨의 <3차산업혁명>에도 출현한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를 생산하고 유지하는 미국의 유태인 사업가 집단과 정부관료, 정치인들의 공고한 결탁이 그것이다. 리프킨에 따르면, 그들 에너지로 카르텔을 형성한 집단들은 유럽연합의 지원하에 여러 나라들에서 시도하고 있는 태양열·지열·풍력·조력 등의 환경을 이용한 에너지 대량생산을 반대한다. 자연을 이용한 에너지는 집집마다 건물마다 자체적 생산과 사용이 가능하고 잉여 에너지는 이웃들에게 여기저기 나누어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수십 년 자본가들에 의해 유지되던 수직적 지배구조가 수평적 공존의 구조로 재편되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혁명적 사회질서가 생성될 수 있기에 기득권층의 반대가 불가피하다.

<설국열차>는 망한 인류의 마지막 보루를 표현한(그래서 그것이 정말 마지막일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일지는 판단 보류다) 일종의 재난 영화다. 여기에 무슨 인문학적 성찰이나 철학적 해석이 필요한가. 고아성이 흑인 소년과 백설 위의 백곰을 바라보며 끝나는 장면에서 <괴물>에서 송강호가 딸이 구해낸 소년과 식사하면서 끝나는 장면을 보며 느낀 희망을 추출하기 힘든 이유다.

공해의 근본, 화석에너지에서 환경을 이용한 그래서 무한 재생이 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CW-7의 살포가 불가피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설국열차>가 없지 않은가?

설국 코맥맥카시 3차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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