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검사·광주경찰·십자가밟기... 이제 속시원한가

[取중眞담] '53일 국조'가 남긴 색깔론·헌법무시·지역감정 유발... 국정원 개혁은?

등록 2013.08.21 20:40수정 2013.08.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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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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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국정조사 특위 소속인 새누리당 김태흠 의원이 25일 경찰청 기관보고를 위한 전체회의에서 야당 의원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다. 오른쪽은 김진태 의원. ⓒ 남소연


1614년 일본 에도막부 시절, 금교령이 선포된 후 기독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이어졌다. 지금은 관광지가 된 운젠 유황물의 고문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어갔다. 발가벗긴 채 칼로 벤 상처에 뜨거운 유황물을 들이붓거나 돌을 매달아 온천에 던져 넣었다. 막부는 기독교 신자를 가려내기 위해 '십자가 밟기'를 사용했다. 십자가나 성화를 밟고 지나가지 않으면 기독교 신자로 낙인찍는 것이다. 조선시대 말에도 천주교 신자를 탄압하기 위해 이 방법이 도입됐다.

국회에 '십자가 밟기'가 등장한 것은 국정원 국정조사 2차 청문회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19일 늦은 밤이었다. 김태흠 새누리당 의원이 증인으로 참석한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심문하고 있었다. 지난해 대선 당시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 수사 책임자였던 권은희 과장은 이날 청문회에서 경찰 상부의 '수사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해 주목을 받았다.

권은희 과장을 상대로 한 김태흠 의원의 심문 내용은 이랬다.

김태흠: "공무원이라 밖으로 표현은 못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당선되길 바랐죠?"
권은희: "수사를 진행하기에 여념 없어서 투표도 못했습니다."

김태흠: "마음속에 (지지했던 후보가) 있을 거 아니에요? 지금도 이 나라 대통령이 문재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권은희: "의원님이 하고 있는 질문은 헌법에서 금지하는 '십자가 밟기'와 같은 질문입니다."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직접적인 강제뿐 아니라 충성의 선서나 '십자가 밟기' 등과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도 자신의 내면적 사상과 양심을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국회의원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무원에게 십자가 밟기를 강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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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현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이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증인심문에 응하고 있다. ⓒ 남소연


국정원·경찰 변호한 새누리 특위위원들... 보수지도 "너무 노골적" 질타


국정원 댓글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활동이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면서 일부 특위 위원들의 자질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주로 대선 개입 및 사건 축소·은폐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과 경찰을 비호하기 급급했던 새누리당 소속 위원들에게 비난이 집중됐다.

새누리당 특위 간사인 권성동 의원이 대표적이다. 권 의원은 지난달 24일 법무부 기관보고에서 "국정원 직원임을 눈치 못 채게, 공무원이 댓글 단다는 생각을 못하게 교묘하게 댓글을 다는 것을 장려해야 한다"며 오히려 국정원을 옹호했다. 국정원 직원이 신분을 속이고 국민을 상대로 선동을 해도 된다는 식의 발언을 서슴없이 한 것이다.

이와 관련 지난 19일 2차 청문회에서 민주당 특위 간사인 정청래 의원은 권성동 의원이 '장려'해야 한다는 댓글의 실체를 지적했다. 정 의원은 증인으로 출석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을 상대로 한 심문에서 "국정원 직원이 '김대중 조국은 북한이다.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에 보내드려야 하는데'라는 패륜적 댓글을 달았다"면서 "이게 대북심리전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권 의원을 비롯한 새누리당 특위 위원들은 국조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국정원의 선거·정치개입은 없었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들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진상규명'이라는 국정원 국정조사의 목적에 동의하지 않거나 실효성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권성동 의원은 "국조에서 진상규명이 이뤄지겠냐. 국정조사는 정치 쇼"라고 스스로 고백했다. 김태흠 의원은 "댓글 의혹 사건은 민주당이 공작한 제2의 병풍 사건"이라고 규정했고, 이장우 의원은 "이번 국정조사는 민주당 친노세력이 계획하고 짜맞춘 웃기는 코미디"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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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권성동 경대수 의원이 5일 남재준 국정원장 등 국정원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회 국정원 국정조사 특위 기관보고에서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 남소연


'국정조사 특위 위원'이라는 점을 망각한 이들은 국정조사 내내 국정원과 경찰을 변호하고 비호하면서 면죄부 주기에 급급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검찰, 그리고 경찰 상부의 수사 축소·은폐 의혹을 폭로한 권은희 과장을 탄핵하는 게 이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권성동·김도읍 의원 등 검찰 출신 새누리당 특위위원들은 "검찰에 실망했다", "참으로 의심스러운 수사 결론이다", "법 적용이 잘못됐다" 등 친정인 검찰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수사 담당 검사가 좌익 종북이라 믿을 수가 없다"는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의 발언은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다.

김진태 의원은 지난 6월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국정원 사건을 담당한 진재선 검사의 과거 학생운동 경력을 비판하는 등 색깔론을 제기해 '종북 척결 종결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김 의원은 지난달 29일에도 "과거 학생운동 전력만을 가지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최근까지 좌파단체 활동을 했다"고 진 검사 흠집내기에 열을 올렸다. 김 의원은 사실 10년 전 초임검사였던 진 검사를 가르친 부장검사였다. 스승이 제자에게 색깔론을 씌워 공격한 셈이다.

앞서 김 의원은 지난 4월 2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일부 야당의원들을 향해 "종북 성향 의원들이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김 의원의 매카시즘적 발언은 보수 성향 누리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김 의원의 홈페이지 자유게시판과 SNS 등에는 수백 개의 지지글이 달렸다. 김 의원조차도 "자고 나니 유명해졌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일까요"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반면 민주당은 "비뚤어진 세계관과 이분법적 정치관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며 "과대망상증이 위태로워 보인다"고 꼬집었다. 검찰 내부에서도 "도의적인 측면에서도 부적절했다", "김 의원이 검사 출신임을 포기하고 정치꾼이 됐다" 등의 지적이 나왔다.

원세훈·김용판 증인 청문회 때 보인 새누리당 특위 위원들의 행태는 보수 성향의 언론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였다. <중앙일보>는 청문회 다음날인 17일 '새누리당 국조위원인가 변호인인가'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겠다'고 공언한 새누리당은 아예 '변호인'으로 나섰다"며 "'청문회 엄호'가 여당의 고질(痼疾)이라곤 하나 이처럼 노골적으로 감싼 적이 있나 싶을 정도"라고 강력 질타했다.

"권은희 과장, 마음속으로 문재인 대통령 바랐지?"

새누리당 특위 위원들의 자질 시비가 극한에 달한 건 19일 열린 2차 청문회에서다. 이미 이날 오전부터 여야 의원들이 고성과 폭언을 주고받으면서 한 차례 파행을 겪었고, 가까스로 오후 청문회가 진행됐지만 여지없이 막말이 오고갔다. 특히 새누리당 특위 위원들은 증인들을 대상으로 한 심문 과정에서 일방적인 편들기식 질문은 물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까지 서슴없이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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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새누리당 의원은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게 "광주의 경찰이냐, 대한민국의 경찰이냐"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심문을 해 논란을 빚었다. ⓒ 유성호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이 권은희 수사과장에 대해 "광주의 경찰이냐, 대한민국 경찰이냐"고 물어본 것은 국정조사 기간을 통틀어 최악의 순간으로 기록됐다. 즉시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 상에서는 지역주의를 부추긴 조 의원에 대한 비난여론이 빗발쳤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조명철 의원이 탈북자 출신임을 겨냥해 "대한민국 의원이냐, 평양 의원이냐"고 물은 뒤, "대한민국에 오셨으면 이곳 수준에 좀 맞춰 주세요. 어디서 북조선식 선동질입니까"라고 성토했다. 이광용 KBS아나운서는 트위터를 통해 "지역감정 조장도 이쯤 되면 막장 중 막장"이라고 지적했고, 백찬홍 씨알재단 운영위원도 "대한민국 국회의원 자질이 의심스런 사람"이라며 "조명철이 일베임을 인증했군"이라고 비판했다.

압권은 단연 김태흠 의원이었다. 청문회가 마무리 되어갈 즈음, 김 의원은 권은희 과장에게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길 바랬지"라고 물었다. 김 의원의 반헌법적 질문은 국정조사 특위 위원 자격 시비를 넘어 그가 헌법을 수호해야 할 국회의원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케 했다. '십자가 밟기'라는 권 과장의 반박에도 김태흠 의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더 나아가 "출석한 다른 경찰관들은 (검찰 발표를) 신뢰 안 해서 소명하겠다고 하는데 혼자만 왜 그러냐"며 권 과장을 경찰 조직 내 왕따로 몰아갔다. 권 과장이 "증거분석팀은 증거 분석만 했다. 제가 직접 수사를 해서 잘 알고 있다"고 맞받았지만, 김 의원은 들으려하지 않았다.

21일 열린 3차 청문회는 새누리당 특위 위원들이 전원 불참한 가운데 반쪽짜리로 열렸다. 통합진보당 특위 위원인 이상규 의원은 "이번 국정조사는 방탄 국정조사"라면서 "새누리당 특위 위원들이 증인을 심문해서 진실을 규명하지 않고 오히려 (야당 위원들의) 심문을 방해하고 왜곡된 내용을 앞장서서 주장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새누리당 스스로 정치적 무덤을 판 것"이라며 "새누리당에 경고한다, 국민들이 새누리당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다"고 성토했다.

민주당은 이번 국정조사를 "어렵게 관철시킨 금은보화 같은 옥동자"(전병헌 원내대표)라고 했다. 그러나 이 옥동자를 지켜내야 할 야당은 '철통 수비'에 나선 여당 앞에 무기력했다. 이 같은 결과는 국정조사에 대한 새누리당의 부정적 시각과 특위 위원들의 부적절한 언행을 통해 충분히 예견됐다.

문제는 국정조사 이후다. 국정조사의 궁극적 목적인 '국정원 개혁'까지 용두사미에 그칠 경우, 국민적 패배감은 극에 달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의 '셀프 개혁'을 주문했다. 자질 시비에 휩싸인 새누리당 특위 위원들은 국정조사처럼 국정원 개혁에도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할 가능성이 높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말씀도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국정원이 먼저 내놓는 개혁안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국정원 개혁은 물 건너 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점점 기정사실로 굳어가는 모습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국정원 개혁이 국민의 뜻에 미치지 못할 경우 박근혜 정부는 물론 당에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정원 국정조사 #국정원 대선개입 #국정원 댓글 #권은희 #김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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