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새벽 3시에 일어나 '똥장군'을 졌다

[공모-가족인터뷰] 82살의 엄마... "목사, 너는 그 마음을 모를끼다"

등록 2013.08.26 10:03수정 2013.08.26 11:56
1
원고료로 응원
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지난 10일 어머니와 인터뷰를 했다. ⓒ 김동수


"이리 못난 옴마(엄마)가 뭐 좋다고….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몸으로 온지 벌써 여든두 해. 어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묻는 아들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해도 어머니는 자신이 겪은 삶이 보름을 밤새워 이야기해도, 책 열 권을 내도 모자랄 것이라고 말했던 분입니다. 응급실에 실려가고, 비록 오진이지만 '폐암' 진단까지 받아 <오마이뉴스>에 몇 번 등장하신 어머니이는 참 기구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전에는 엄마(마흔여덟 살이지만 아직 '어머니'로 부르지 않습니다)가 살아오신 이야기 많이 하셨잖아요?"
"이제 말하고 싶지 않다."

"엄마가 살아온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요."
"됐다니까."

"목사, 너는 그 마음을 모를끼다"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하셨던 어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하나둘씩 풀어내셨습니다.

"첫 결혼 기억나세요?"
"하모. 해방하는 해였다. 동짓달이었지. 지금이 이렇게 쭈글쭈글하지만, 그땐 나도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지금도 예쁘세요."
"뭐? 이런 쭈글망태 할매가 예쁘다고? 우리 아들이 그래도 낫네."



어머니도 여자인 모양입니다. 예쁘다고 하니 좋아하십니다. 어머니가 1932년생이니, 해방 때 결혼했으면, 14살입니다. 남편은 18살이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온 삶이 참 기구하고, "첫 결혼"이라고 물은 이유가 있습니다. 동짓달 그 추운 날 새색시가 된 어머니는 행여나 평생을 함께할 그이가 언제 들어올까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게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습니다. 아니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났습니다. 열한 해를 그렇게 했다니.

"목사(어머니는 저를 '목사'로 부르십니다) 너는 그 마음을 모를끼다."
"……."

"여자가 남자 하나 보고 사는 긴데. 11년을 몸 한 번 섞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알 것나."
"……."

김한길 대표 닮았던 외할아버지... 왜 외동딸은 그런 집에 시집보냈을까

자주 들었던 말씀이지만, 들을 때마다 말을 못 합니다. 시집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다 이길 수 있지만, 11년 동안 단 한 번도 사랑을 나누지 않고 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기구한 삶이 아니라 '잔인한' 삶을 11년이나 사신 것입니다.

"우리 집이 가난한 집도 아니었다. 네 외갓집이 가난해 내가 팔려갔더라도 그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거다. 외할아버지가 부자였다. 동네에서 셋째 가는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자랐는데 왜 엄마를 아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했어요?"
"그때는 아부지가 가라면 안 갔나. 지금도 왜 외할배가 나를 그 집에 시집 보냈는지 모르겠다."

외할아버지는 외동딸인 어머니를 애지중지 키웠다고 합니다. 여학교 문턱까지 보냈습니다. 하지만 평생 한으로 남을 이런 결혼을 시켰다니, 저 역시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이야기 나오자 술술 풀어내셨습니다.

"외가는 고기가 천지였다. 숭어, 전어 없는 고기가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술고래였다. 내가 그때 술을 맛 본다고. 술을 배웠다. 지금도 술을 한 잔씩 하는 이유다. 그때는 전깃불이 들어왔다. 쌀을 부엌을 파놓고 숨겼다. 논도 많았다. 일본 사람들 쌀밥을 먹게 하나. 만날 빼앗으로 왔다. 누구를 닮았나 하면 요즘 어깨에 무언가 두르고, 광장에서 목소리 높이는 머리허연 사람(김한길 민주당 대표인듯)과 외할배가 닮았다."
"아 엄마가 술을 한 잔씩 하는 것이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거네요. 그리고 머리 허연 사람은 김한길이에요."
"김한길?"
"예. 그럼 외할아버지 굉장히 잘 생기신 분네요?"

"그럼 잘 생겼지."
"엄마 다시 그 이야기로 돌아가요."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을 알고, 외할아버지가 외갓집으로 데리고 갔다."
"당연히 그래야죠."

"나는 다시는 그 남자 보기 싫었다. 외갓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는 그 남자 안 밨다. 십 년 전쯤 그 남자가 죽을 때가 되자 나를 찾았다 아이가. 하지만 나는 안 갔다."
"……."

"나는 안 갔다"는 말 속에 11년 잔혹한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친정으로 다시 돌아온 어머니 삶은 또 다른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친정으로 다시 돌아와 베장사를 하면서 재혼을 했다. 그런데 그 남자도 정신병에 걸렸더라. 결혼한지 석 달만에 죽었다. 아이가 생겼는데 떼려고 했지만, 떼지 못하고 낳았다. 혼인신고도 안 하고 살았으니까. 이혼도 아니다."

두 번째 만난 분을 만난지 석 달만에 떠나보낸 것은 이번 인터뷰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또 한 명의 남자를 떠나보낸 여성으로서 어머니를 아들 또는 남자로서 그 쓰라린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또 홀로된 어머니가 살아나갈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베장사였다고 합니다.

또 한 명의 남자를 떠나 보낸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다

"광목(무명실로 서양목처럼 너비가 넓게 짠 베-편집자주)을 이고 다니면서 장사했다. 외가에서 옆 동네로 다니면서 장사했다. 삼천포에서 큰 철선을 타고 부산에 갔다. 철선을 타고 다니면 파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모른다. 멀미도 심하고, 죽는 줄 알았다. 얼마나 힘들었지 모른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멀미가 난다. 올 적에는 경남 문산에서 내려 걸어왔다. 그때 돈을 참 많이 벌었다. 지금 집 땅도 내가 베 장사 하면서 번 돈을 산 것이다. 외가 돈도 하나고 안 가지고 했다. 빚을 내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사셨어요?"
"그냥 이를 악물고 살았다. 무슨 생각을 하겠노. 네 누나도 점점 자라고."


"엄마가 하시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상상이 안 가요."
"아까 말했지만. 니가 그거를 어떻게 알겠노."


a

아버지와 어머니. 참 두 분은 다투기도 많이 다투었고, 사랑만 참 많이 하셨다. 어머니 젊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리다. ⓒ 김동수


단 한 번도 남자 사랑을 받지 못했던 어머니에게 한줄기 빛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만약 어머니가 첫 번째 결혼으로 평생을, 아니 두 번째 만난 분과 백년해로를 하셨다면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버지를 만나게 하셨고, 저를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제게는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하늘의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아버지 만나신 이야기 좀 해주세요?"
"집에 오니까? 네 큰형님 13살, 큰누나 8살, 작은형님 5살, 누나가 3살이었다."

아버지도 두 번 상처를 하셨습니다. 두 분이 아이 넷을 두셨습니다.

"내가 여기 올 사람인 줄 아느냐"
"그런데 왜 오셨서요?"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거다."
"그러니까 저도 낳으셨잖아요."
"하모. 네가 태어났지."


"네 아버지와 참 많이 싸웠다. 또 돈을 주지 않고, 숨겨 놓았다. 내가 그것을 많이 찾아냈다."
"아버지가 숨겨놓으면 엄마는 찾고. 돈 찾는 재미가 있었겠네요."
"하모."


새벽 3시에 일어나 '똥장군 '졌다... "바닷물을 화장실에 붓는 이유를 아나"

a

집 옆에 있는 '비슨등'이라는 언덕산 어머니는 하루에 수 십번씩 똥장군을 지고 오르셨다고 말씀하셨다. ⓒ 김동수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3시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해 세 번 논에 김메기도 어머니가 하셨다니. '똥장군'을 지고 집 언덕길을 올랐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할 때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그 일을 하셨다니.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겠습니까?

"윗집 한 해 논을 세 번 멘다. 아버지는 그것을 잘 못했다. 팔이 많이 아팠다. 비료도 내가 다 뿌렸다. '빼골'(논이 있는 골짜기 이름) 비료를 내가 다 뿌렸다. 내가 유일하게 안 해 본 것이 농약 뿌리는 거다."

"어머니가 비료까지 뿌렸다고요?"
"하모. 하지만 아무리해도 농약은 치지 못하겠더라."


"바로 그거에요. 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아무것도 안 되는 거에요."

"생각하니 그렇네. 이제 잘 기억이 안 난다. 동짓달에 왔는데 나락도 없었다. 목화밭을 일구면서 그 사이에 무를 심었다. 그것을 가지고 진주장에 내다 팔고 돈을 벌었다. 내가 고생한거 말하면 보름 동안 날을 새도 다 못한다."

"저도 알아요."
"니가 안 다고? 이 집 앞이 '새집'(둘째 큰아버지집) 논이었다. 이 논을 샀다. 피눈물을 흘렸다. 이 논을 사면서 조금씩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저도 이 앞이 논이었던 것 알아요."
"엄마 없는 아이들 밥 굶기지 않았다. 보리밥을 먹였지만. 빼골에 '소풀'(부추)을 심어 장사했고, 강냉이 심어 장사했고, 열무도 심어 장사했다."


열무 심고, 부추 심어 돈 벌고, 논 메고, 비료 뿌려 집안을 일군 것을 풀어내신 어머니는 비료에 관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a

힘들게 살아오셨지만, 후회를 하지 않는다는 어머니. 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 김동수


"목사야!"

"예"
"화장설 퍼봤나?"
"엄마가 그런 걸 제게 시키셨어요?"
"그렇지, 그런 거를 네게 시킬 리가 없지."
"왜 화장실 퍼봤나 물으세요?"
"응. 화장실 펄 때 바닷물을 왜 붓는지 아나?"
"모르겠어요."
"요즘은 비료도 많고, 비료도 많이 안하지만. 그때는 비료가 없었다. 바닷물을 넣는 이유는 비료를 하기 위해서다. 조금이라도 더 많아지도록 말이다. 그렇게 똥장군을 지고 '비슨등'(옆에 있는 언덕산)을 하루에 열 번 이상을 지고 올라갔다. 아이가."
"……."

"참 말을 안 할라고 했는데 하니까 자꾸 나오네."
"새벽 3시에 일어나 똥장군까지 지면서 사셨으니까 논도 사고, 집도 이렇게 지었잖아요. 다 엄마 피와 땀과 눈물이 이 집에 배였습니다."
"목사가 그것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니 고맙다. 또 하는 말이지만,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 그 더운 여름에 일하고 와서 불을 때서 밥을 해 먹였다. 아버지는 아이들 똥도 안 치웠다. 모도 제일 잘 심었다. 빨래도 열 식구 걸 다 했다. 지금은 세탁기가 있지만, 그때는 20분 걸어가야 한다. 자식 아홉을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목욕시켰다."
"엄마, 후회하세요?"
"후회는 무슨 후회. 너희들이 있어 얼마나 좋은데…."

"후회는 무슨, 너희들이 있는데..."

힘들게 살아오셨지만, 후회하지 않는다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조금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한 번씩 응급실에 실려가 놀라게 하지만 아직은 건강하십니다. 살아온 삶을 조금이라도 위로 받기 위해서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셔야 합니다. 힘들게 살아오셨지만, 남을 미워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더 섬기는 모습도 좋습니다. 타작을 하면 옆집 할머니에게 쌀을 갖다 드리고, 명절마다 작은 선물을 하십니다. 어머니를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언젠가 어머니가 육신을 놓을 때 저는 통곡하기보다는 기뻐할 것입니다. 살아온 삶이 기구하였고,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놓고 하나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가족인터뷰 공모 공지문 바로가기
덧붙이는 글 '가족인터뷰' 공모 기사입니다. 어머니와 인터뷰는 지난 10일 진행했습니다.
#가족인터뷰 #어머니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